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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검색이 무기수송 차단에 성공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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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선박검색이 무기수송 차단에 성공한 적 없다"

리언 시걸 "외교적인 '주고받기' 병행돼야" 경고

다음은 한반도 전문가인 미 사회과학연구원의 리언 시걸 박사가 미국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북한 선박에 대한 해상 검색과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비교하며 일방적인 해상봉쇄의 위험을 경고한 글이다.

지난 14일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 온라인 정책포럼에 실린 이 글(☞원문 바로가기)을 통해 시걸 박사는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해상봉쇄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며 외교적인 '주고받기(give-and-take)가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쿠바로 가는 소련의 미사일 수송선을 해상에서 봉쇄하는 조취를 취하며 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당시 법무장관을 주미 소련대사관으로 비밀리에 보내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을 것과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없애겠다고 약속하는 등 비밀 거래를 시도했다.

시걸 박사는 현재의 북핵에 대한 대응에서도 해상봉쇄나 선박차단만으로는 효과를 낼 수 없고 위기만 고조시키기 때문에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여 있는 북한의 합법적인 자금을 풀어주는 등의 외교적 해결 노력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후르시쵸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체면을 구기지 않는 출구를 터 놨듯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도 출구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시걸 박사는 또 미국이 북한의 선박을 차단하기 전에 그 배가 싣고 가는 것은 무엇인지, 무장은 어떤 수준으로 됐는지 등의 정보를 의회 및 동맹국들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고 명확한 교전수칙을 만들어 무력충돌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시걸 박사는 22일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 나아가 핵폐기를 향한 조그만 행동이라도 바란다면 이에 상응해 구체적인 보상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자유아시아방송(RFA)와의 인터뷰에서 "관건은 미국이 북한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느냐는 것"이라면서 "BDA에 묶여 있는 북한 자금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지원을 중단한 중유를 다시 제공해 대북 전력지원에 나서야 한다. 한국의 대북 전력지원 약속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서 "대북 안전보장과 관련한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측의 이같은 구체적인 상응 조치가 없다면 6자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편집자>

1963년 쿠바, 2006년 북한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북한 핵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이원적인(two-track) 접근법을 쓰고 있다.

6자회담 재개는 그 한 축이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 10월 31일 중국이 만들어 낸 베이징 회동에서 북한 측 회담 파트너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나 직접 협상했다. 힐 차관보는 그 접촉 후 기자들에게 "전제조건을 결코 아니지만 그들은 우리가 6자회담의 틀 내에서 금융제재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며 "나는 그 문제를 논의할 메커니즘이나 실무그룹을 만들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부시 대통령은 핵실험에 대한 또 하나의 대응 방법을 강조했다. 그것은 북한에서 출발한 핵무기, 생화학무기, 미사일의 수송을 봉쇄하거나 소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를 강화할 수 있는 의지의 동맹을 모으는 일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는 이행돼야 하고, 이 제재의 이행을 검증하고 6자회담이 재개될 경우 이 회담의 상황을 점검할 팀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2002년 미사일을 싣고 예멘으로 향하던 북한 화물선을 미국의 요청 하에 스페인군이 수색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PSI가 무기 수송을 막는 데에 성공한 적은 없다. 2002년의 경우도 미사일 거래가 합법적이었다는 예멘의 주장으로 그 배는 풀려났었다.

미국의 미사일 수송 차단이 성공한 적이 있었나? 물론 있었다.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다. 그 사건은 해상봉쇄(blockade)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 사건은 또 완력은 그 하나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함을 보여줬다. 소련이 미사일을 되가지고 간 데에는 외교적인 거래(give-and-take)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제재는 그 하나만으로 북한의 정책 변화나 체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북한 정권은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의 보상이 없으면 무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북한은 평소의 버릇대로 보복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더 높다. 영변 원자로를 멈추고 사용 후 핵연료를 추출한 후 폭탄을 추가로 만들기 위해 플루토늄을 재처리할지도 모른다. 일본에 의해 가해진 포괄적인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미사일 시험발사를 더 할 수도 있고, 그 미사일은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추가 핵실험은 첫번째 핵 실험의 결함을 수정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제재는 오히려 심각한 위협 요소가 될 것이다. 그 위협은 제재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제재를 강화하기 위한 봉쇄에 있다는 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증명됐다.

유엔의 승인없이 군사 장비와 석유를 실은 배를 봉쇄한다는 것은 전쟁행위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검역·검색(quarantine)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미 행정부는 해상에서 배를 차단(interdiction)할 수 있게 승인한 것으로 유엔 대북 제재결의안 1718호를 해석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대로 북한에 대한 봉쇄를 사치품까지 확대하는 것은 그같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할 뿐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은 해상봉쇄가 소련을 압박해 포격전이나 전쟁 없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재검토하게 할 것을 우려해 소련 군함을 정선시키고 승선하는 절차와 방법을 명확히 정립해두길 원했다. 맥나마라 장관은 해군참모총장 조지 앤더슨 제독과 교전수칙에 대해 담판을 짓기 위해 해군 제독들에게만 출입이 허가된 펜타곤의 해군사령실로 갔다. 그러나 앤더슨 제독은 맥나마라의 코앞에서 해군의 교전 매뉴얼을 흔들어대며 "그건 이 안에 다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맥나마라는 "나는 존 폴 존스(미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옮긴이)가 했던 작전을 말하자는 게 아냐. 바로 지금 당신이 하려는 걸 알고 싶어"라고 쏘아붙였다. 앤더슨은 맥나마라에게 장관실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해군에는 봉쇄를 강행하라고 명령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 해군 수뇌부는 봉쇄 라인을 넘은 소련 미사일 수송선에 교전수칙을 앞세워 경고포격을 한 뒤 해상봉쇄 조치를 취하는 것이 존 폴 존스가 활약했던 독립전쟁 이래 해군 소관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맥나마라 장관은 전쟁은 대통령의 전권이라고 질타하며 문민 통제를 관철했다 - 옮긴이)

맥나마라는 장관실로 부리나케 돌아와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맥나마라와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 상황실과 봉쇄라인에 나가 있는 지휘함을 연결하는 직통 통신선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통신선 개설에는 시간이 소요됐고 그 사이 소련의 미사일 수송선은 봉쇄선을 통과해 쿠바로 가도록 허용됐다. 지구상의 전 해양에서 움직이고 있던 미국의 잠수함들이 소련의 잠수함들로 하여금 강제로 물 위로 떠오르도록 압박한 것은 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는데 맥나마라 장관은 미사일 위기가 끝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맥나마라 장관은 또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소련의 핵무기가 이미 쿠바에 들어가 있다는 시실을 규명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을 미사일 위기가 발발한 후 수년이 지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볼 때 미국이 선박을 차단하기 전 선박이 싣고 가는 것은 무엇인지, 무장은 어떤 수준으로 됐는지 등의 정보를 의회 및 동맹국들과 공유하는 것과 나아가 명확한 교전수칙을 만들어 두는 것은 필수적이다. 배에 타고 있는 측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무기를 사용할 것인가? 배나 잠수함에서 북한 선박을 향해 발포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 배의 키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침몰시킬 것인가? 선박을 호위하고 있는 북한 잠수함을 공격할 것인가?

쿠바 봉쇄는 소련이 배를 돌리고 쿠바로의 미사일 수송을 중단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쿠바에 이미 들어가 있는 미사일 처리에 대한 협상을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위기를 고조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후르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체면을 구기지 않고 빠져나갈 길을 만들지 않고 완력만 쓰는 것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동생 로버트 케네디(당시 법무장관)를 주미 소련대사관에 보내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을 것, 그리고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없애겠다고 약속하는 비밀 거래를 소련과 했다.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자신의 체면을 구기지 않을 출구를 줄 것인가? 그를 위해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합법적인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계좌를 동결하고 있는 은행들이 돈을 풀어주도록 허용하고 지속적인 외교적 주고받기를 해야 한다. (번역=황준호)
☞ 쿠바 미사일 위기란?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기지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 간의 제3차 세계대전 일보 직전까지 갔던 군사적 위기.

1959년 수립된 쿠바 혁명정부에 대해 미국은 1961년 4월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에 의한 쿠바 반(反)혁명군의 침공작전을 시작하고, 미주기구(OAS)로부터 쿠바를 축출하고 해·공군에 의해 영해와 영공을 침범하는 등 군사적·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 ⓒwww.historycentral.com

이에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쿠바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해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했다. 미국은 그 해 10월 14일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중이라는 사실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고,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TV연설을 통해 "소련은 서반구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조치를 취했다.

미소 간의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소련은 26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27일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를 상호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유엔의 감시 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28일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선단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11월 2일 위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소련이 이처럼 후퇴한 이유는 소련이 27일 제시한 요구를 미국이 들어줬던 데에 있었다. 소련이 쿠바로부터의 폭격기 철거에 동의한 20일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었고, 12월 7일 소련은 공격용 무기를 쿠바로부터 철거했음을 미국에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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