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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다"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9> 맡겨둔 오렌지와 절름발이 비둘기

비행기가 하강하여 땅을 훑으며 내려앉는다. 잠잠해진다. 통로에 깔린 카페트를 따라 발들이 움직이고, 몇몇 발들은 다른 발들을 앞질러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국 심사대 앞에 다시 모인다.

질문 : 방문 목적은?

대답 : (침묵)

질문 : (침묵)

대답 : (침묵)

질문 : 가족 방문?

대답 : 네.

질문 : (침묵)

한 쌍의 발이 심사대를 통과한다.

세관 구역은 면세점에서 끝난다. 엑스레이 기계 뒤에 서는 여행자는 아무도 없고, 지키는 이도 없는 설비 앞에서 신고할 것도 없다. 하얀 자동문이 발들의 접근을 감지하고는 날렵하게 열린다. 붐비는 대기실 벽에는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11개 언어로 적혀 있으나, 방금 도착한 여행자들을 맞으러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냉방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작은 소녀가 들고 있는 풍선을 거칠게 흔든다. 춥다. 구석구석에 보안 요원들이 서 있다. 눈들이 마주치고 누군가의 두 눈은 두려움을 숨기려고 애쓴다. 죄 지은 자만이 두려워하는 법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따라다니는 죄의식.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멀고먼 도시의 빨간 버스 안에 남겨진 여행 가방처럼.

죄인이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사람들 사이로 지나간다. 아주 지루한 생각을 하면 보안요원들을 속일 수 있을 거야. 일층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가 다섯 개 남았지. 보통은 아홉 개가 세 줄로 걸려 있는데, 첫 줄은 휴지를 다 써서 비어 있고 두 번째 줄 첫 번째 화장지는 풀려 늘어져 있잖아. 그러니까 다섯 개 남은 거야. 오렌지 색. 마지막 자동문이 저절로 열리고, 위험 지역이 끝난다. 택시가 길게 줄 서있다. 마치 도착 순간에 지은 첫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입 속에 가지런히 늘어선 이빨들 같다. 손 하나가 가방을 들어 트렁크에 던져 넣는다. 가방 속의 작은 향수병들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차 안에 손님의 퀴퀴한 땀 냄새가 진동했으나 냉방기 바람에 간신히 잦아든다. 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차창으로 땅이 차 안을 들여다본다. 산들, 집들, 새로 난 길들, 그리고 검문소들. 다른 차로 바꿔 타고, 구멍이 숭숭 난 도로를 다시 달린다. 운전사는 느낌으로 구멍을 알아채고 능숙하게 피해간다. 집들, 쓰레기더미들, 그리고 길을 좌우로 나누는 시멘트 벽. 예전에 이 자리에 있던 것들을 찾으려고 두 눈이 뒤룩거린다. 정확히는 한쪽 눈만 그렇다. 오른쪽 눈알이 훨씬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게으르게 돌아가는 왼쪽 눈알이 볼 수 있는 것은 시멘트 벽의 회색 빛깔뿐이다.
▲ ⓒ에밀리 자키르(Emily Jacir, 팔레스타인 사진작가)

또 다른 검문소. 몹시 붐벼서 발은 한 번 땅을 떠나면 다음 디딜 곳을 찾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발들이 탐색하고, 춤추고, 속이고, 일 분도 서 있지 못할 발 디딜 자리를 놓고 싸운다. 멀리 새장에 갇힌 새들이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또 다른 택시 잡아타기. 얼마 달려가지 못할 목적지로 향한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린다. 거친 나무문이라 손이 아프다. 문이 열리고 발은 문지방을 넘어 들어간다. 발들이 마주서고 떠들썩한 포옹이 벌어진다. 한 다리가 다른 다리를 지나 의자에 자리 잡고, 다른 다리는 또 다른 다리 근처에 머물고, 외따로 자리 잡은 다리도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음식은 맛있지만 그럴 수 없이 짜다. 입이 음식에 듬뿍 들어간 올리브기름을 반긴다. 치실이 이빨을 청소한다. 이빨이 깨끗해진다. 이빨을 닦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닦았고, 기분이 아주 좋다. 전등 스위치를 찾는 탐색이 벌어진다. 잔다.

아니, 몸은 자려고 하지 않는다. 안달복달한다. 그것은 이 한 밤중에 크고 작은 검문소를 지나면서 받은 소외감을 다 뱉어내야만 하겠단다. 마침내 몸이 잠에 잠시 굴복했으나, 입과 영혼에 가득한 당혹감 때문에 이내 깨어난다.

아침 식사가 준비된다. 식어버린다. 뜨거운 기름에 통후추를 넣어 향을 내고 토마토를 넣어 센 불에 지져낸 요리 한 접시가 입맛을 돋운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함부로 잡아 흔든다. 나무 밑에는 아네모네가 피어 있고 작은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벌레는 꽃잎에 달라붙어 생기를 빨아먹을 것이다. 꽃은 메말라 회색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따뜻한 봄날에 꽃, 풀, 들판, 집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메말라 부서지고 있다. 그러나 고통을 돌아보지 말고, 앞에 잔뜩 쌓인 음식을 봐야지. 맛있는 음식. 이제, 오렌지를 마지막으로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 ⓒ에밀리 자키르

오렌지 껍질은 시들고 마른다. 그것의 눈물까지 말라버린다. 오렌지는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 농부는 말한다. "어머니에게 오렌지를 맡겨두었지." 1) 그런데 그 어머니, 오렌지 나무가 강둑에 서 있어서 오렌지는 허가증이 필요하다. 오렌지색 허가증. 2) 그러나 오렌지는 개의치 않다가, 엄마 품에서 죽어버릴 것이다. 하늘에 나는 비둘기가 가까이 내려와서 보면, 오렌지는 온통 점이 찍혀 초록색으로 변해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둘기는 가지 하나에 내려앉았다가, 땅으로 뛰어내릴 것이다.

그 비둘기는 절름발이다. 오른쪽 발가락이 잘려나갔다. 영혼이 절단 난 비둘기가 단절된 장소들을 날아다닌다. 비둘기가 철조망에 내려앉는데, 철조망에는 비닐봉지들이 걸려 있다. 바람에 비닐봉지들이 찢겨나간다. 비둘기가 철조망을 떠나, 맨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높이 날아오른다. 더 이상 날 수 없을 때까지 비둘기는 난다. 어설픈 곡선을 그리며 빙빙 돌고 돈다. 멈췄다, 움직였다, 살짝 내려앉는 시늉도 하다가, 다시 또 돈다. 폐허가 된 거리에 조용히 서 있는 자동차 위로 햇볕이 내려 쬐고, 차창에는 도시의 일그러진 영상이 비친다. 절름발이 비둘기가 하늘을 오락가락하고, 그 그림자는 아스팔트에 몰래 드리운다.
▲ ⓒ에밀리 자키르

그리고 몰래, 봉쇄된 도시에 희망이 스며든다. 그 도시는 거주자를 비롯하여 그 안에 든 모든 것이 썩어버릴 때까지 봉쇄되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봉쇄된 도시의 하늘은 열려 있고, 거주자들은 숨을 쉬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썩어버리면, 그때에야, 보안요원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일층 화장실에 남아 있는 두루마리 휴지의 개수를 세는 여행자를 검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표범이 염소 옆에 누울 것이다.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시다면, 오후에 이륙할 비행기의 38D 좌석으로 돌아가 주시죠. 당신, 절름발이 비둘기.

* 역자 주

1) 1948년에 오렌지 수확 철을 앞두고 이스라엘한테 쫓겨날 때,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말했다. 다 익은 오렌지를 그 어머니인 나무한테 맡겨두었다고.

2)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오렌지색 신분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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