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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게릴라 전술은 유치한 수준이었다"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91> 그를 체포한 볼리비아 퇴역장군 증언

"나는 나의 가족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재산을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서글픔(마음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쿠바가 내 대신 그들에게 먹을 것과 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 줄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검은 베레모에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문 강렬한 이미지로 중남미 젊은이들의 저항의 상장이자 반미 시위대의 슬로건이 된 어르네스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나면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장래가 보장된 사회적인 지위나 가족까지도 뿌리친 채 볼리비아 극빈자들의 해방을 위해 밀림 속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생포돼 비참한 최후를 마친 체의 혁명사상과 무장 게릴라 전술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체 게바라를 체포하기 위해 조직된 볼리비아 정부군 수색중대를 지휘했던 가리 쁘라도 장군(퇴역)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일간 <빠히나 도세> (Pagina/12)와의 인터뷰에서 "언론들과 체의 지지자들이 체의 게릴라 전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면서 "체의 볼리비아 무장혁명투쟁은 허점투성이였다"고 주장했다.
▲ 체 게바라를 체포한 군 지휘관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가리 쁘라도 장군 ⓒ볼리비아 <레뿌블리까>자료

오는 10월 9일은 39세에 볼리비아의 고산지역에서 체포돼 생을 마감한 중남미 혁명영웅 체 게바라가 사망한 지 꼭 39년이 되는 날이다. <빠히나 도세>가 보도한 가리 쁘라도 장군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본다.

쁘라도 장군은 "역사는 내가 체를 죽였다고 평가하고 살인자라는 누명을 씌웠지만 나는 체를 생포해서 산 채로 군 당국에 넘겼다는 것을 재삼 밝힌다. 다시 말해 나는 결코 체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퇴역장성에서 멕시코 대사를 거쳐 정치가와 사회사업가로 변신한 쁘라도 장군은 볼리비아 산따꾸르스 지역 부촌에서 여유롭게 생활하면서도 이른바 '체 게바라 의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는 22여 년 전 정체불명의 체 지지자로부터 등에 총탄을 맞는 등 체를 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 항상 불안하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39년 전 체 게바라 체포작전에 가담했던 볼리비아군의 지휘관급 인사들이 모두 비명횡사한 것도 쁘라도 장군에게는 악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체의 저주'가 평생에 벗지 못할 무거운 짐이 된 채 낯선 사람의 접근을 경계하던 그가 입을 연 것이다.

쁘라도 장군은 체의 볼리비아 혁명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쿠바와는 다르게 그의 게릴라 전술이 볼리비아 국민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고, 정부군의 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결국 체가 볼리비아 정국을 쿠바식으로 오판한 게 실패를 자초했다는 평가다.

"체는 자기 스스로 쓴 '게릴라 전술'이라는 책에서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라도 조성된 국가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볼리비아가 그랬다"고 주장한 쁘라도 장군은 "당시 볼리비아에는 민주주의적인 선거를 통한 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민주적인 의회활동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물론 언론의 자유도 보장돼 있었다. 쿠바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반정부 무장 게릴라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체가 볼리비아를 선택한 게 커다란 실책이었다는 주장이다.

체 게바라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쁘라도의 주장대로 체의 혁명군에 대한 농민들과 극빈층의 참여나 지지가 쿠바혁명에서와 달리 볼리비아에서는 지극히 약했다는 것이 현지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계속되는 쁘라도 장군의 체 게바라 체포 당시의 증언이다.

"체가 범한 두 번째의 실수는 자신이 지휘하던 게릴라 군대의 병력을 분산한 것이었다. 고립된 밀림에서 세력분산으로 인해 부대간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서로간의 정보교환이 두절되어 정부군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힘이 분산된 게릴라 세력은 정부군의 조직적인 토벌 작전에 맞서 하나된 힘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괴멸됐다. 군사학적으로 볼 때 이건 어린애들 병정놀이 같은 유치한 수준의 작전이었다.

세 번째로 체는 정부군의 집요한 협공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볼리비아 혁명을 포기하지 못했고 아주 낙천적으로 대처했다. 사실 그는 충분히 도망갈 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만일 체가 볼리비아에서의 투쟁을 포기하고 수염을 깎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자, 동지들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선언한 후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피신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체가 중남미의 위대한 혁명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쁘라도 장군은 "체포 당시 체는 철저하게 패배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궁금해 할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라고 술회했다.

쁘라도는 이어 최근 볼리비아 대통령에 오른 에보 모랄레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모랄레스 역시 체와 같이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을 좇고 있다는 것이다.

쁘라도 장군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친미파 정치인임을 감안할 때 그의 주장을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체가 선택한 마지막 결정과 최후의 모습을 목격한 마지막 증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현지 역사학자들과 일부 언론은 체가 현실을 초월해 이상주의자 기질이 강했다는 점만은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체는 당시 다리에 총탄을 맞아 위중한 상태였으며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인적도 없는 고산지역에서 총상을 입은 부상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정부군의 기습에 대처해 정상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총상을 입고 고통 속에 있던 체의 마지막 모습만으로 그의 일생 전체를 재단하는 쁘라도의 주장은 무리라는 얘기다.

물론 쿠바를 비롯해 중남미 전역에서 혁명군사령관으로 신출귀몰하던 체를 너무 쉽게 생포한 쁘라도에게는 체가 영웅이라기 보다는 실패한 혁명가 혹은 패잔병의 이미지로 더욱 강력하게 다가 왔을 수 있다.

실제로 쁘라도의 수색중대는 체를 체포했을 당시 쿠바 정부군이 체를 체포했다고 수 차례 발표했지만 한번도 진짜 체를 잡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체의 정체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사단사령부로 체가 이송되어 미 정보요원들이 체의 신원을 확인할 때까지 이들은 체를 생포했다는 사실 자체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됐을 당시의 체 게바라 ⓒ볼리비아<레뿌블리까>자료

그만큼 체는 볼리비아 정부군들에게도 전설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체가 변변한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순순히 수갑을 찼으니 쁘라도의 눈에는 체가 실패한 혁명가로 비쳐졌을 것은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체의 첫번째 실수는 볼리비아를 선택한 것이라는 쁘라도 장군의 주장대로 체가 왜 쿠바 다음 혁명의 대상지로 볼리비아를 선택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중심지이고,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중남미 해방을 선언한 상징적인 곳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체가 의학도 시절 중남미 여행기간 중 볼리비아 고산지역 빈민층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중남미 젊은이들에게 '저항의 상징'이 된 체 게바라 ⓒ쿠바 역사자료

"체가 왜 볼리비아를 선택했느냐는 것과 부상으로 허약해진 체의 마지막 모습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쁘라도의 주장을 일축한 현지 역사가들은 "체가 비록 볼리비아 혁명에는 실패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중남미 전역의 젊은이들 가슴 속에 '제국주의 저항세력의 심볼'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착취와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중남미 전체의 소외계층들이 체를 영원한 혁명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사실이 혁명가로서 체의 실체"라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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