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전 만하더라도 브라질 노동당과 행정부의 뇌물파동이 브라질 정계를 강타하면서 룰라 대통령의 재선은 물 건너갔으며 그의 정치생명 역시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였다.
그러나 최근 집권 노동당이 실시한 대선 여론조사결과를 살펴보면 룰라는 1차 투표에서 무난하게 과반수를 득표할 것으로 나타나 두 번째 집권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현지의 정치평론가들은 브라질 정치권을 들끓게 한 뇌물파동의 혼란 속에서 야권과 보수언론들의 사임압력과 탄핵시도 등을 잠재우고 무난하게 재선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룰라 대통령을 두고 "억세게 운이 좋은 정치지도자"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필자는 막노동자에서 일약 브라질 최고통치자가 된 룰라 대통령을 지금까지 3번 가까이서 대해보았다. 지난 2003년 5월 키르츠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본 룰라는 얼핏 대인공포증이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행사장 주변의 각국 정상들과 어울리지 않는 외로운 모습이었다. 물론 대다수 정상들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국가 출신들이었고 나머지는 영어 등의 언어를 사용해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룰라로서는 대화상대를 찾지 못한 것이 하나의 이유이기는 했다.
두 번째로 필자가 룰라를 직접 대해본 건 지난해 11월 아르헨의 휴양도시 마르델 쁠라따에서 개최된 미주정상 회담장에서다. 차베스의 원맨쇼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개막된 이 회담에서 룰라는 이때 역시 그렇다 할 만한 활동이나 발언을 하지 못할 만큼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알맹이 없는 무의미한 회담이었다'는 불만을 남긴 채 귀국 행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에서는 중남미 최대국가 원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론 이때 룰라는 브라질 최대의 뇌물파동으로 재선도전 포기를 심각하게 고려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열되는 사임압력과 탄핵위기를 무사히 넘긴 룰라가 지난 7월 아르헨티나의 꼬르도바 시에서 개최된 남미 공동시장 정상회담장을 찾았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룰라는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정상들을 압도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고 좌중을 휘어잡는 여유 있는 농담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당면 현안들을 일일이 체크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키면서 대국의 지도자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남미 대국 브라질의 최고 통치권자로 등장했으나 학교졸업장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룰라는 지난 2002년 말 대통령 당선증을 받아 들고 '난생 처음 증서를 받아본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남미에서는 대통령 당선증과 졸업장이 모두 똑같이 '디플로마'다.
'룰라는 행운이 따르는 정치인'
그런 그가 정치적인 딜레마에서 벗어나 중남미 엘리트층 출신들인 남미 각국의 정상들을 압도하며 두번째 임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드라마이자 인생역전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만하다.
룰라 대통령이 일반적인 예상을 뒤집고 정치적인 위기에서 벗어나 재선까지 바라보게 된 데에는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밑바닥 인생살이를 통해 잡초 같은 질긴 생명력을 키웠고 어떤 곤경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지도자였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룰라는 결정적인 찬스에 뜻밖의 행운이 따르는 정치지도자이기도 하다.
오는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 정치권은 룰라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당후보들을 30%포인트 차이로 따돌리며 부동의 1위를 지키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그가 재선을 할 만큼 훌륭한 정치적인 업적을 남기거나 당정을 장악해 국정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브라질 국민들은 정치적인 파경과 상파울루를 휩쓴 무장세력의 난동을 겪으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그래도 서민출신인 룰라를 다시 한번 믿어보자"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지 정치인 룰라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는 분위기다. 다시 말해서 자포자기한 브라질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다시금 룰라를 선택하게 했다는 '어부지리'설이 그것이다.
이를 의식한 룰라는 최근 공직사회의 도덕성 확립과 부정부패 추방을 '제일의 통치 목표'로 선언하기도 했다.
룰라가 재선을 거의 확정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우선적으로 브라질 최대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자중지란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2006년 4월3일 필자의 남미리포트 '룰라 재선' 참조)
또 야권의 대권주자인 제랄드 알키민 후보는 브라질 우파 정치인들을 대표한다는 것과 상파울루 주지사 시절 치안 문제를 방치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 룰라의 대항마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도 룰라가 재선을 일찌감치 확정지은 이유다.
알키민 후보는 지난 5년 동안의 상파울루 주지사 재임기간 중 브라질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장범죄조직인 '제1수도군사령부(PCC)' 조직을 그대로 방치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커졌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필자의 5월22일자 '무장 범죄단과 전쟁 선언한 룰라' 참조) 공권력을 무력화시킨 무장 범죄조직을 키운 무능력한 지도자라는 얘기다.
결국 좌파 성향이 강한 절대다수의 브라질 서민들이 브라질 부유층과 엘리층들을 대표한다는 알키민 후보에게 등을 돌린 게 룰라 지지로 표가 몰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룰라는 재임기간 동안 정치권의 뇌물파동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들 가운데 그나마도 가장 서민들의 민생을 잘 챙긴 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브라질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선거를 꼭 치러야 하는가" 하는 대선 부정론도 거론이 되고 있다. 그만큼 룰라의 재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룰라가 재선에 성공해도 국정수행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지지층들인 극빈서민들의 빈부평준화 요구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며 이에 대한 엘리트 계층들의 반발도 만만치가 않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취임 초 "브라질에서 '배고픔'이라는 단어를 없애겠다"고 호언했던 룰라가 재선되어 이 약속을 지키게 될지, 그리고 고질적인 브라질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추방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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