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페론이즘'의 실체는 무엇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페론이즘'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70> 페론 주치의의 충격고백(9)

일반적으로 '페론주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르헨 서민들은 '페론주의'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하는 종교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가 좋아서 페론의 이름으로 뭉친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페론이즘'을 축구열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서로 페론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착취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슬로건으로 함께 뭉쳐 열기를 발산하고 이웃을 돕는 운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아르헨 서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페론주의'는 '약자를 돕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동정심의 발로'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따라서 아르헨 현지인들이 느끼는 '페론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나보다 못한 이웃을 도와주는 연민의 정'이라는 게 정확한 우리말 표현이라는 것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일까?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은 일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아주 유명하다.

한인 이민 초창기의 일화다. 갓 이민 온 한 한국인이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친구를 찾아 나섰다. 물론 이 분은 현지어인 까스떼쟈노를 전혀 하지 못했다. 친구의 집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 끝에 도로가에서 차 수리를 하던 현지인에게 접근, 손짓 발짓 다해가며 이러한 주소를 찾는다고 주소가 적힌 종이쪽지를 펴 보였다.
▲ 아르헨티나를 인종적인 편견이 없는 평등한 사회로 만들기를 희망했던 후안 도밍고 페론. ⓒ페론 재단

이 종이를 펴본 이 현지인은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이러저리 가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 한국인은 눈만 껌벅이며 한마디도 못 알아 듣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이 현지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이 동양인의 손을 잡더니 버스까지 태워가며 목적지에 데려다 주더라는 것이다.

이민 초창기 이런 경험을 한 한인들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의 친절함, 그리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자발적으로 도우려는 아르헨티노들의 이런 생활방식 때문에 짧은 이민역사 가운데에도 아르헨티나 한인들은 비교적 쉽게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가진 자들을 경멸한다. 아니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아르헨 부자들은 가진 표를 내지 않으며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페론주의'의 기본은 인간 모두는 지위고하나 출신을 떠나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고용주나 피고용자 모두 상호 필요에 의해 함께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나 이를 고용한 주인이 동등한 권리를 함께 갖는다는 것이 '페론주의'라는 설명이다.

아르헨 역사가들은 페론의 일생에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그의 할머니 도밍가 두떼이 여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를 양육했고 결혼시켰으며 육사에 보내는 등 페론의 인생항로를 결정지은 강한 여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페론은 할머니보다는 자신의 생모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아르헨 사회를 바로잡기를 갈망했고 모든 인종이 피부색이나 출신을 떠나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게 바로 '페론주의'라는 말이다.

대다수 현지학자들 페론에게서 사회주의 또는 좌파 성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페론주의' 자체 어디에서도 좌파 성향은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페론은 지성과 학식을 겸비한 엘리트 중 엘리트 군인이었고 상대방을 존중해줄 줄 아는 인사였다고 바레이로 박사는 밝히기도 했다. 페론은 재임 중 수많은 인사들을 접견했는데 때로는 논쟁거리를 가지고 들어온 인사들도 떠날 땐 모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면서 까사로사다(대통령궁)를 떠났다는 설명이다. 페론은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고 쉽게 사람을 설득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페론은 말년에 자신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아르헨티노로 평가받기를 바랬고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던 것을 숨기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는 하나의 정치적인 역경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페론은 어린아이들을 끔찍하게 아꼈고 측근들과 진한 농담을 즐긴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바레이로 박사는 "페론은 현실주의적인 사람이었다"며 "그는 반미주의자였고 반제국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 밝혔다. 그는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의 아르헨티나 진출을 반대하는 것으로 반미주의자임을 천명했고 반제국주의를 외치기도 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미국은 군부를 움직여 페론 제거에 앞장섰다는 주장이다.

페론은 담배는 즐겼으나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그 대신 마때(아르헨 전통녹차)를 물고 살았다(마때는 필터가 부착된 긴 대롱으로 빨아서 마심).

에바가 아르헨티나를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로 만들 것을 꿈꿨다면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제일의 공업국가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는 정부주도로 원자력기술을 발전시켰고 우주정복을 위해 로켓산업을 추진했는가 하면 항공기와 총기류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한 아르헨 전국을 하나로 묶는 고속도로 건설을 서둘렀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최고를 추구했다.

페론이 평생 동안 추구했던 정치적인 이상은 모든 아르헨티나사람들이 출신이나 인종을 떠나 다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페론이 부정축재자였나 하는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1955년 당시의 각종 보도자료들을 확인해보았다. 그 해 9월 군부 반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어 파라과이로 쫓겨간 페론을 두고 군부는 "7억 달러 이상을 빼돌렸다" 면서 "달러를 비행기로 가득 싣고 떠났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유럽과 중남미에서 인기를 끈 에바 페론의 자서전 '내 삶의 존재이유'. ⓒ페론 재단

그리고 아르헨 현지 보수언론들은 군부의 눈치를 살피며 확인되지 않은 페론 측근들의 이름을 빌어 페론의 부정축재와 국부 유출사례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런 소문이 확대되자 파나마 정부는 페론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파나마 정부가 현지 공항에서 확인한 건 페론과 그 측근들의 수중에는 현금 5만 달러가 전부였다는 사실이었다. 페론이 거의 빈털터리 신세인 것을 확인한 파나마 정부는 페론 추방을 결정했고 페론은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다면 페론은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10년 이상을 스페인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페론 재단의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당시 페론의 유일한 수입은 에비타가 쓴 '내 삶의 존재이유'라는 자서전의 저작권료와 인세수입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에바의 이 자서전은 아르헨 현지와 중남미,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시쳇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페론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수중에 지닌 5만 달러의 현금도 대다수가 이 책의 해외출판계약금과 인세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페론 재단 관계자들은 "지난 1945년 정치적인 위기에서 페론을 구한 에바는 사후에도 페론의 재기를 실질적으로 도운 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페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아르헨으로 돌아온 페론을 지난 1973년 대선유세에서 전면에 내세운 건 에바였다. 페론은 에바의 국민적인 인기에 힘입어 60%가 넘는 지지로 3선에 성공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두 사람의 끈질긴 인연은 그만큼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