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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페론을 구한 에비타의 활약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65> 페론 주치의의 충격고백 (4)

'페론과 에비타의 운명적인 만남'

부인을 잃은 후 방황하고 있던 페론을 안타깝게 여긴 아르헨 군 수뇌부는 페론을 이탈리아와 독일 대사관에 무관으로 발령을 내 시름을 잊도록 조치하기에 이른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집중된 아르헨의 외교, 정치,교역 등의 활동이 지지부진해지자 당시 유럽대륙 최강국으로 급부상한 독일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페론을 현지로 파견한 것이기도 했다.

유럽으로 간 페론은 나치의 패망을 일찌감치 예견했고 기술과 자본, 풍부한 물자를 앞세운 미국의 제국주의 의도를 간파했다. 페론이 유럽에서 귀국한 후 아르헨 군 수뇌부에 독일이나 영·미 연합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립국가로 남는 게 아르헨 국익과 장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임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미국과 페론과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이 된 것이다.

1939년 이탈리아와 독일로 급파된 페론은 유럽 장교들과 사귀면서 독일의 나치장교들과도 가깝게 어울렸다.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영어에 능통했던 페론은 유럽장교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끈 것으로 알려졌다.
▲ 페론의 두 번째 연인이 된 지오바나 델 피오리. 에바와 자매처럼 빼어 닮았다. ⓒ김영길

유럽생활에서 활력을 되찾은 페론은 부인을 잃은 시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 미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페론은 로마에서 지오바나 델 피오리라는 발랄하고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 2년 동안 달콤하고 보람찬 유럽생활을 보낸 페론은 1941년 귀국, 피오리와의 결혼을 계획하고 이 여성을 아르헨티나로 불러 함께 지내기도 했다. 주변정리와 혼인신고 서류 등의 준비를 위해 다시 로마로 돌아간 피오리는 이탈리아정국이 급변하면서 페론과의 결혼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다.

1942년 중반 대령으로 진급한 페론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연인이었던 피오리의 아르헨티나 입국을 재촉했으나 유럽 전역이 전쟁분위기에 휩쓸려 어수선한 가운데 피오리와의 연락이 갑자기 두절됐다.

연인으로부터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페론은 이 여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친구를 이탈리아로 보내봤지만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이탈리아에서 피오리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바르셀로나로 날아간 페론의 친구는 천신만고 끝에 로마에 있던 피오리와 연락이 돼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게 된다. 그러나 여행도중 길이 끊겨 이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 친구는 피오리가 페론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만을 전해 듣고 귀국했다. 페론은 두 번째 여인과의 로맨스도 비극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페론과 연락이 두절됐던 이탈리아 여성 피오리는 유럽전쟁 와중에 페론의 딸을 낳게 되고 이 아이를 페론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을 하게 된다. 페론이 지난 1960년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페론은 1943년 평소 자신이 군 수뇌부에 끈질기게 요청했던 노동·복지부 장관자리에 앉게 된다. 이때부터 페론은 원주민 교육과 보호법 제정을 추진하고 원주민 거주지의 소유권인정 법안을 입안하면서 본격적으로 힘없는 소외계층 챙기기에 나섰다.

노동자들의 권익과 원주민보호 관련사업에 동분서주하던 페론은 1944년 1월 22일 루나파크라는 유명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 자선모임 행사장에서 에바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자신을 따르던 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되는 페론 대령.ⓒ김영길

페론이 루나파크 행사장에 갔던 건 복지부장관으로서 당시 아르헨 북부 산후안이라는 도시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70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2000여 명의 부상자와 수십만의 이재민들이 발생, 이들을 돕기 위해 모인 상류층들을 격려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페론은 이 모임에서 상류층 귀부인들과 사업가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면서 순식간에 거금의 후원금을 모은 에바 두아르떼라는 성우 겸 아나운서의 뛰어난 활약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페론이 에바에게 첫눈에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에비타 편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루나파크에서 에바와의 만남 이후 페론은 대중과 상류층을 휘어잡는 호소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에바를 정치적인 반려자로 선택했다. 에바로서도 자신의 자선사업을 후원해줄 든든한 배경으로 페론을 필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페론 대령이 노동·복지부 장관이어서 평소 에바가 연예인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빈민구제 사업은 날개를 달게 된다. 한마디로 이들은 '천생연분'이었던 것이다.

'페론의 정치적인 재기는 에바 때문'
페론을향해'자식이아니다'라고부인한페론의생모후아나소사여사. ⓒ김영길

에바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 페론은 정계에서도 승승장구 1945년 부통령과 국방, 노동·복지 장관을 겸임하는 명실공히 아르헨 정계의 최고실력자로 부상했다. 당시 대령 신분이었던 페론으로서는 파격적인 출세였다.

그래서였을까.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페론의 출신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아르헨 군사법원은 페론의 육사 입학 당시의 서류를 문제 삼아 페론의 본 이름을 밝혀내고 추붓주에 살고 있던 페론의 생모까지 찾아내어 증언대에 세웠다.

페론의 생모였던 후아나 소사 여사는 위기에 처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호적상 페론이 1895년생인 것과 출생지가 로보스시인 것을 들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군부는 페론의 초등학교 학적부와 이사경위 등을 들어 후안시또 소사가 페론과 동일인임을 밝혀 내고 공문서위조와 출신을 문제 삼아 모든 공직을 사퇴시키고 감옥에 수감시켰다.

일견 페론의 정치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때 페론은 에바를 향해 "내가 석방된다면 당신과 결혼해서 조용히 살겠다"고 정치포기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 페론을 구하고 정치적으로 대성시킨 건 에바였다. 당시 3개 라디오 방송에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성우와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리던 에바는 방송을 통해 페론 수감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노동자들과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소외계층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때부터 수만의 노동자들과 극빈층들은 아르헨 대통령궁 앞 5월의 광장에 모여 '페론 석방'을 외친다. 페론의 구명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5월의 광장에 모여 드는 군중들의 수가 날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시위는 점점 과격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는 시위군중들에게 굴복, 페론의 석방과 사면복권을 약속하게 된다.

1945년 10월17일 감옥에 수감된 지 8일만에 30만 여명의 환영군중들 앞에 에바와 함께 나온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일류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화려하게 정계로 복귀했다.
필자가정부로부터증정받은페론장군의대통령취임기념메달. ,뒤. ⓒ김영길

현지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3류 인생이었던 에바의 일생이 페론을 만난 후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에바는 페론을 만나기 전부터 유명인사였고 그녀의 대중적인 인기가 페론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1946년 장군이 된 페론이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에바의 전국적인 지지와 인기 때문이었다는 데는 현지 학자들간에도 이견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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