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역사상 최초로 여성대통령에 당선된 미첼레 바첼렛이 칠레의 최대산업인 구리산업의 국유화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칠레와 FTA를 맺은 한국은 칠레산 수입상품 가운데 구리제품이 전체수입물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구리가격 상승과 달러환율의 대폭 하락, 구리자원의 국유화 혹은 자원개발 로열티의 대폭인상 등 칠레 현지의 상황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피해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칠레 최대의 수출품이자 '붉은 황금'으로 평가받고 있는 구리산업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칠레 국립구리조합(CODELCO)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내국인 업자들은 국제 구리 값의 대폭적인 상승에도 불구하고 달러환율의 대폭적인 하락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는 반면 칠레 동광과 구리제품 산업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기업들은 사상최대의 흑자를 기록,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어 구리산업의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칠레 중앙은행은 최근 "지난 2003년에는 46억 달러이던 외국기업들의 영업흑자 본국송금액이 2004년에는 82억 달러에 이르렀고 2005년에는 110억 달러로 급등했으며 금년에는 160억 달러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불과 4년 만에 300% 이상의 순익 증가를 기록 중이라는 얘기다.
비또리오 코르보 중앙은행장은 "물론 이는 구리원자재 가격의 급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이들 외국기업들이 칠레정부에 지급하는 로열티가 그야말로 떡값 수준인 1억 달러에서 1억5000만 달러에 불과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이런 불공정한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구리산업의 국유화는 필연적이라는 목소리가 칠레 내각과 좌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힘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 좌파 정치인들은 "이것은 외국기업들의 명백한 자원 착취이자 국부의 강탈"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칠레 구리산업을 장악한 외국기업들이 1년간의 순 수익금만으로 100년치 이상의 로열티를 지불하고도 남는다는 것은 말이 되느냐"면서 구리산업의 국유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또 "지난 70년대 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시도했던 것처럼 칠레 자원의 전면적인 국유화만이 현재로선 국부유출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바첼렛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더욱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저소득층과 사회극빈자 지원을 위해 교육, 의료 프로그램 등을 추진해야 하는 바첼렛 정부로서는 달러의 약세로 94억 달러에 달하는 재원마련이 어려운 처지인 데 반해 외국기업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어 국정운영의 재원 마련차원에서라도 구리자금을 활용해야 한다는 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국유화냐, 로열티 인상이냐 놓고 고심 중
칠레의 구리산업 국유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바첼렛 대통령이 쿠바의 교육시스템과 의료기술에 관심을 보이자 쿠바정부가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을 약속하고 정치적인 관계 재정립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쿠바와 칠레의 관계는 바첼렛 대통령의 정치적인 우상이자 아버지인 알베르또 바첼렛과 가까웠던 살바로드 아옌데 전 대통령 당시에는 상호 혈맹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아옌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쿠바의 카스트로는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 것으로 알려질 만큼 서로가 혁명동지임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현지 전문가들은 바첼렛 정부가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사용할 마땅한 카드가 국가 전체예산의 절반 수준인 구리산업 수익금 외에는 별로 없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바첼렛 정부가 구리산업의 전면적인 국유화는 아니더라도 로열티의 대폭인상 등 대선공약이행 자금 마련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겠냐는 전망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칠레 재무부 안드레스 벨라스코 장관은 "구리가격 상승은 칠레경제에 활력소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국회 차원에서 외국기업들의 구리자원의 과잉 수입소득에 대한 특별법을 입안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경우에 따라서 칠레의 구리시장이 요동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칠레의 구리산업에 정부개입을 부추기는 또 다른 이유는 구리 수출대금의 대량유입 으로 칠레 외환시장에 과부하가 걸린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1달러당 518.30뻬소에서 보합세를 보이던 환율이 구리제품 수출결제가 대량으로 이루어진 이번 주 500뻬소로 하락하면서 지속적인 약세를 보여 최악의 경우 400뻬소까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아직은 군부·서방기업 입김 거세
현재로선 바첼렛 정부가 구리산업의 국유화냐 로열티의 대폭 인상이냐를 놓고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직은 이런 논의가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바첼렛 대통령이 서방 다국적기업들의 반발을 무마할 만한 지도력과 자신감이 충분치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방 다국적기업들에 호의적인 군부의 태도도 변수다. 최근 바첼렛 대통령이 브라질 방문 시 군부의 인권유린과 과거사에 대한 청산의지를 천명하자 칠레 군부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제동을 걸기도 했다. 아직은 바첼렛 대통령이 칠레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갈 만큼 정치적인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과 군부의 힘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첼렛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방문, 남미식 국정운영방식을 직접 확인해보고 외국기업들의 자원착취 현황과 국부유출 상황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예전의 피노체트나 라고스 식의 자원관리와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