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시민의 눈으로 불교 역사 들여다보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시민의 눈으로 불교 역사 들여다보기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16〉

박노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하듯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허나 우리의 불교사 인식은 항상 자랑스럽고 밝은 면만을 말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어두운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참회나 반성 없이 건강한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 불교의 어제를 부끄러운 역사로 보아 맹성(猛省)을 촉구하는 박 선생님의 글 감명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박 선생님은 과거의 치사(恥史)를 반성하지 않는 오늘 우리 불교도 부처님 정신을 실천할 수 없는 똑 같이 부끄러운 상태이며, 우리 불교의 미래는 계급투쟁(class war)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저의 추론은 박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근거로 했습니다.

"불교는 전근대적인 관습대로 폭력 단체인 신자유주의적 국가를 그대로 인정하여 전력 협력하는 채 원자화된 군중들에게 기복 신앙으로 일시적이며 기만적인 위안을 주는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는 상황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불교가 부처님 정신, 즉 무소유와 반폭력, 계급철폐와 약자를 위한 사회적인 재분배 등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일단 '전통'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그 당시의 계급사회를 벗어나서 숲 속에서 무계급의 공산주의적 공동체인 승가를 만드셨지만 이미 계급의 철폐가 가능하고 역사적으로 합법칙적인 이 시대에 무계급사회를 만들려고 숲에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오늘날의 현실에 맞춘 불교적 수행이라는 것은 저의 굳은 믿음입니다."

박 선생님께서 서구의 좌파들이 이미 포기한 민중혁명 필연론을 아직 가슴에 품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 생각으로는 박 선생님은 탈(脫)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불국사나 석굴암을 자랑스러운 민족문화 유산으로 예찬하거나 개화기 승려들의 일본불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대일협력을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탈근대주의의 입장에서 호국불교의 가면을 쓴 살생에의 동참이나, 국가나 왕실에 빌붙는 정불(政佛)유착과 재물에 대한 탐욕이 빚은 민중 착취를 통박하는 것 같습니다.

***성찰과 자긍의 두 날개를 펼쳐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는 국가·민족·인종·성차(젠더)를 넘어 생각과 지향과 이해를 달리 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꿈꾼다면,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 동원을 위한 거대담론의 수사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민족과 민중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저항주체로 깨어 있지 못해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한 전통시대나 식민지 시대의 민중과 달리 오늘의 시민들은 자신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연대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우리의 시민을 자본이나 국가의 "착취나 억압의 대상"에 머문 우민이거나 현세와 내세의 복락을 비는 기복에만 눈먼 우중으로 보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민중혁명 필연론에 회의를 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남녀차별과 환경파괴, 그리고 대량살육이 자행된 근대와 그 원인을 제공한 철 지난 민족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합니다. 허나 탈근대와 탈민족이 유행인 서구와 달리 공동번영과 평화를 꿈꾸는 공동체의 싹을 돋아나게 하기엔 너무도 척박한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을 고려하면 아직은 민족주의 폐기를 말할 때가 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강대국이 민족주의를 먼저 폐기하지 않는 한 약자가 갑옷을 먼저 벗는 '민족주의 넘어서기'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 안의 타자를 차별하는 민족주의의 역기능은 줄이고, 민족주의 사이의 전압을 낮춰 국가 사이의 충돌은 막는 열린 민족주의가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차선책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세계관의 차이를 바탕으로 우리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박 선생님과 다른 불교 역사 들여다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저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져 보렵니다. 우리 불교가 1600여년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던 이유는 불교계의 타락과 현실순응을 경계하고 개혁하려는 작지만 큰 목소리와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불교의 역사 중에는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전통이나 자취는 찾을 수 없을까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이 웅변하듯 진정한 자긍은 성찰이 수반될 때 빛을 발합니다.

허나 정당한 자긍마저 배제한 성찰과잉도 균형을 잃은 역사 이해입니다. '자긍 과잉'이나 '성찰 결여' 모두 건강한 역사인식의 적입니다. 성찰과 자긍이라는 두 날개가 함께 펼쳐질 때 미래를 위한 바른 거울로서의 역사가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불교 역사 속에서 오늘 이어받을 만한 전통이나 자취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의 코드를 넘어서**

먼저 민족의 코드로 본 불교 역사 읽기의 문제점을 이야기 해 볼까요? "반만년에 빛나는 우리 역사"라는 근거 박약한 민족 띄우기와 석굴암과 불국사에 대한 예찬을 통한 민족 긍지 만들기는 궤를 같이합니다. 민족을 신화화하는 것은 열린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독재정권의 우민화정책은 시민들을 우물 안에 가두어 우매한 민중으로 남아 있게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요. 세계를 향한 여행의 문이 활짝 열린 지금 앙코르와트와 같은 세계적 불교문화 유산과 우리의 그것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우리 것만을 배타적으로 높일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허나 우리의 문화 토양에서 나온 문화유산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주체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불국사와 석굴암 두 절의 조영을 민족적 긍지의 표상으로 보기보다는 불교사학자 김상현 선생님의 지적처럼 "험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고 이상세계 불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김상현, 『한국불교사 산책』, 71쪽). 이럴 때야말로 종교와 예술의 조화가 가져다주는 감동을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으로 박 선생님은 호국불교를 국가권력과 결탁해 살생금지라는 불교 계율을 어긴 좋지 않은 행위로 보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부처의 뜻에 따라 조선을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라는 깃발을 펄럭이며 쳐들어 왔다더군요. 사실 호국불교는 우리만의 특징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며, 호국신앙의 정도는 일본이 가장 강했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호국불교를 한국 불교만의 부끄러운 전통으로 기억하기보다는 동북아불교의 공통된 특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이화 선생님의 지적처럼 "무도한 외적을 물리쳐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호국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의 핵심인 살생을 범하는 결과를 빚는 불교 이념의 현실 영합적 왜곡현상"일 것입니다. 허나 저는 다음과 같은 개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김상현 선생님의 말씀에 더 귀가 기우는군요. (김상현, 위의 책, 256, 258쪽)

"호국이란 어떤 왕실이나 국가를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된다. 중생들이 의지하고 있는 터전, 그 울타리를 수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호국이란 사제(四諦 :네 가지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곧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이것은 곧 호국이 진리를 지키는 울타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원칙적인 이해일 뿐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에서는 가끔 호국의 본래적 의미보다는 왕실의 호위나 권력의 시녀가 곧 호국인 양 착각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 수많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참회할 줄 모르는 국토, 진리와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 국토는 언제 무너지고 무슨 재앙의 바람이 불어올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사회와 이 국토를 지켜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 각자의 옷자락 속에 감추어진 선근의 씨앗을 키워야 한다."

***개화기의 불교는 비자주적 종속발전만을 꿈꾸었나?**

개화기의 불교계와 민족문제를 보는 제 입장은 박 선생님과 많이 다릅니다. 개화승 이동인의 일본 밀항(1879)이나 한용운의 일본 유학(1908)은 일본 불교계의 도움으로 가능했으며, 갑신정변(1884)과 갑오경장(1894~1895)도 일본정부의 무력과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일어난 것이기에 이들은 일본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불교유신론(朝蘚拂敎維新論)」(1910)이 웅변하듯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근대화를 도모한 한용운의 노력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김옥균의 의지, 그리고 800만 원의 차관을 기반으로 3년 안에 자립경제를 이룸으로써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 어윤중의 갑오경장 청사진을 보면, 한 세기 전 불교계나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에 의존한 "종속 발전"만을 꿈꾸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들의 행동과 사상 속에는 외세의존성과 자주 독립성이 아울러 보이기에 그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분석이라 할 수 없을 터. 일본의 침략성과 개화파나 불교계 인사들의 몰주체성만을 규탄하거나, 아니면 주체적 노력을 애써 높이는 것만으로는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민족"과 "국가"를 들먹이며 개인의 인권을 억압해 온 시절을 돌아볼 때 이를 구실로 단죄하는 것도 시의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구촌 시대를 말하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틀을 넘어 우리의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근대 불교계의 "민족의식 결여"에 대해 무턱대고 눈감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발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한 뒤로부터 점차 중국·조선을 향해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중국·조선에 대한 포교를 계획하였다(『朝鮮開校五十年誌』, 1922)."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승려를 "정부의 노예(『文明論之槪略』, 1875)"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 세기전 일본의 불교란 국가에 종속되어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쓰인 국수주의적 종교였을 뿐이기에, 그 침략을 받은 우리 불교가 아직도 "국가주의적·군사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책임을 일본에 돌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화파들이 국내에 지지기반이 없는 왕조에 기생하던 관료집단이자, 스스로의 꿈을 실현시킬 만한 독자적 경제·군사 기반을 갖지 못한 비혁명적 정치세력이었기에 근대국가 만들기에 실패하였다고 보는 것이 실패의 역사에 대한 우리 몫의 책임 찾기에 합당한 자세라면 불교계가 주체적인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도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정부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면서 불교와 엄연히 다르다는 명분(神佛判然)을 내세워 신사에 남아 있는 불교적 요소를 없애려 한 적(廢佛毁釋)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탄압을 거치면서도 일본 불교계는 "사원불교에서 가두불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은둔불교에서 참여불교로, 나아가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거듭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화기 특히 1880년대초 "선진 문물 수용"에 있어 이동인과 탁정식(卓挺埴) 같은 승려들과 유홍기·김옥균·서광범과 같은 불교도들의 활약이 눈부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어느 누구도 일본 불교를 모델로 한 불교의 대중화나 근대화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동인은 일본 활동 중 "항상 국제간의 정세를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朝鮮開敎五十年誌』)"고 하며, 김옥균도 일본 망명 중인 1886년에 "외국의 종교(개신교)를 끌어들여 교화에 도움이 되도록"하라고 국왕에게 상소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불교를 세간으로 끌어내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한용운 등 극소수의 승려들에 의해서 나라가 망한 이후에야 시도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불교 근대화에 뒤쳐진 주된 이유가 아닐는지요.

"불교는 구세(救世)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衆生濟度)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조선불교유신론」, 1910)."

"불교가 민중과 더불어 동화하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 그 교리를 민중화함이며, 그 경전을 민중화함이다. 둘째 그 제도를 민중화함이며, 그 재산을 민중화함이다(「불교유신회」, 1922).

"아우여 형이여, 들리지 않는가. 이는 파리 소리가 아니라 닭의 울음임을!" 불교의 개혁을 바라는 한용운의 외침이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국민국가 세우기를 꿈꾼 3·1운동에 한용운은 불교계를 대표해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습니다. 자주적 국민국가 수립에 나선 한용운의 다음과 같은 생각은 식민지 시대에도 불교계가 일제와 타협 속에서 종속적 발전만을 꿈꾸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아가 오직 군함과 총포의 수가 적은 이유 하나 때문에 남의 유린을 받아 역사가 단절됨에 이르렀으니, 누가 이를 참으며 누가 이를 잊겠는가. 나라를 잃은 뒤 때때로 근심 띄운 구름,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도 조국의 통곡을 보고, 한 밤중 고요한 새벽에 천지신명의 질책을 듣거니와, (…) 합방 후로부터 조선 민족은 부끄러움을 안고 수치를 참는 동시에 분노를 터뜨리며 뜻을 길러 정신을 쇄신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한편 어제의 잘못을 고쳐 새로운 길을 찾아 왔다."(『한용운전집』1, 349, 351쪽)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찰령은 모든 사원과 승려를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묶어두는 결과를 낳았고 1920년대 한용운 등이 사찰령 폐지운동을 벌였지만 그 성과가 미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한용운의 다음과 같은 일갈(一喝)이 아직도 한국 불교계의 자성(自省)과 자정(自淨)을 기대하는 모든 이의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겠지요.

"재래의 불교는 권력자와 합하여 망하였으며 부호와 합하여 망하였도다. (…) 이제 불교가 실로 진흥하고자 할진대 권력 계급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민중의 신앙에 세워야 할지며, 진실로 그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고자 할진대 재산을 탐하지 말고 이 재산으로써 민중을 위하여 법을 넓히고 도를 전하는 실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뿌리 깊은 전통시대 민중불교의 전통**

다음으로 민중과 불교의 관계를 살펴볼까요? 김상현 선생님에 의하면, 극히 소수지만 한국 불교의 역사에 권력에 유착한 승려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군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왕경(王京)을 꾸미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자, 태백산의 의상은 "왕이 정치를 잘한다면 땅에 금을 그어 놓고 성(城)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않지만, 정치가 잘못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지키기가 어렵다"는 편지를 보내 공사를 중지시켰다고 하더군요.

고려 충숙왕 때 천태종의 무기(無寄)도 권력과 부와 사치에 눈이 먼 당시의 불교계에 "급하고 급하다. 위태롭고 위태롭다"고 불교의 타락을 경계하였지만 배부른 승려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승려에 대한 국가의 탄압과 일반의 냉대가 극심했던 조선시대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을 교화하는 데 몸과 마음을 바친―자비승(慈悲僧)이나 선심승(善心僧)으로 불리던― 이름 모를 승려들이 있었기에 부끄러운 역사로 가득 찬 한국 불교가 160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겠지요.

또한 근심 많고 고통 많은 사바세계, 욕심으로 물든 더러운 예토(穢土)를 벗어나 근심과 고통이 없고 맑고 깨끗한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할 것을 권하는 부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수많은 몸으로 나타나십니다. 세계는 끝이 없고 중생도 다함이 없기에 석가모니불이 미쳐 못 다한 구세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미래불인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희망의 신앙은 이 땅에 뿌리 깊은 민중불교 전통 중 하나입니다.

삼국시대에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반가사유상이 웅변하듯 당시 미륵신앙은 매우 번성하였지요. 미륵불 행세를 한 후삼국 시대의 궁예나, 고려 우왕 때의 이금(伊金)의 존재는 당시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미륵신앙이 얼마나 크게 퍼져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잘 말해줍니다. 특히 고려나 조선시대에 민중들이 만든 미륵불상은 세련되지 못한 외모와 몸체와 머리가 균형이 맞지 않는 투박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잔잔한 미소는 수탈과 고통이 없는 이상세계를 향한 민중의 소박한 꿈을 잘 표현합니다.

조선 후기에 미륵신앙은 정감록과 같은 감결사상과 결합하여 양반지배체제의 질곡을 뚫고 세상을 바꿀 것을 꿈꾸는 체제변혁사상이자 민중들의 희망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기독교의 메시아사상과 유사한 미륵신앙에 보이는 초월자의 힘에 기댄 변혁의 꿈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예나 지금이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깨어나지 못한 우중으로서 전통시대의 민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박 선생님께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현대의 보살"로 보고, 계급투쟁과 민중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천을 일종의 "보살행"으로 보시더군요. 허나 제 생각에는 미륵불을 자칭하며 살육을 일삼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레닌―적어도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이는― 겉으로 내건 이상사회의 건설의 기치와는 달리 폭력과 살육을 자행한 현대판 미륵불 사칭자로 보입니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교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성찰의 잣대는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행해진 악행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대담론으로서 민족이나 민중의 신화에서 놓여나 주체로서 개인들이 거듭나는 것이 다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앞당기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제 생각합니다.

글을 마치면서도 달은 못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림자만 쳐다보는 우를 범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봄이 다가오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김상현. 『한국불교사 산책』. 우리출판사, 1995.
김광식. 『한국근대불교사연구』 민족사, 1996.
만해사상연구회 편. 『한용운사상연구』. 민족사, 1980.
이광린. 「개화승 이동인」.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3.
정광호. 『근대한일불교관계사 연구』. 인하대출판부, 1994.
-----. 『일본침략시기의 한일불교관계사』. 아름다운세상, 2001.
조동걸. 「오촌(奧村)의 "조선국포교일지"」. 『한국학논총』7, 1985.
허동현. 「어윤중의 개화사상 연구: 온건개화파 내지 친청사대파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상사학』17, 2001.
V.Tikhonov(박노자). "The first stages of Lee Tongin`s career (1878-1880): the forerunner of dependent development." 『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2-1, 2002.
村上重良·吉田久一. 「明治期の宗敎」. 『宗敎史: 体系日本史叢書 18』. 山川出版社, 1964.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