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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혹은 "마취제 판매 시장"에 대한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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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혹은 "마취제 판매 시장"에 대한 단상들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13〉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다름이 아닌 무속 신앙을 한국 민중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우월주의의 입장에 선 그들의 시각으로는, 조선인의 무속은 조선인의 "열등성", "주술에 의존하려는 의타적 성격"의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영국의 비숍 여사(1831-1904)는, "무속의 정신이 (…) 몽매한 대중들 – 특히 여성들 –을 완전히 구속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전 우주가 무수한 마귀(즉, 귀신 – 인용자의 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조선인이 늘 무한한 공포에 둘러 쌓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들이 조선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기에 마귀와 통하는 무속인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Korea and Her Neighbours〉, 1898).

조선인뿐이랴? 오만에 가득찬 그 당시의 유럽인들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모든 비(非)서구인들을 늘 겁에 떨리면서 귀신에게 빌기나 하는 불쌍한 존재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무속 신앙이 정말 공포에 의한 열등한 기복에 불과했던 것이었을까요? 물론 무속에서 그러한 요소가 충분히 있지만 그것이 과연 무속만의 특징인가, 그리고 그것만이 무속의 전체를 대표하는가 라는 것이 제가 의심하는 바입니다.

종교의 기원 그 자체를 자연에 대한 원시적인 인간의 공포와, 사회적인 소외에 대한 환상적 내지 공상적 "극복"의 시도들에게 찾으려 했던 마르크스나 레닌의 설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보편적인 "종교적 심성"에 공포를 벗어나려는 심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은 조금 심한 축에 속하지만 사실 어느 나라에 가서 어느 종교의 의식(儀式)을 구경해도 인간의 공포 심리를 잠재우려는 기복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종교란 없을 것입니다.

무속에서는 아마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기대들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마음 속 깊이 요동치고 있는 계급 사회 구성원의 영원한 불안을 마취시켜주고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만한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야말로 종교입니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억압 받는 존재의 신음 소리, 심장(心臟)이 없는 세계의 마음, 무(無)정신적 상황의 정신, 민중의 아편" ("Die Religion ist der Seufzer der bedrängten Kreatur, das Gemüt einer herzlosen Welt, wie sie der Geist geistloser Zustände ist. Sie ist das Opium des Volkes" – 1844, "헤겔의 법철학 비판 입문")으로서의 종교가 과연 한국에서 가장 흔한 종교들인 불교나 기독교의 원래 본연의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비록 초기의 불교는 계급 사회를 벗어나 일종의 "무소유 공산 사회"를 승가(僧伽)라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보겠다는 고대 인도 일부 중산층-상류층의 몸부림이었고, 초기의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도심적 중산계층 하층의 천년왕국적인 저항적 신앙이었다 해도, 한국에 들어간 시점의 불교나 기독교는 이미 계급사회에 전적으로 편입된 채 "마취제"로서의 역할을 똑똑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비록 무속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이념 체계를 갖추고 훨씬 덜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기복성을 표현했지만 본질적으로 공포를 잠재우는 노릇에 있어서는 무속과 무슨 대차(大差)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순복음교회와 같은 곳에 들려 "안수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아하, 굿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 교단을 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굿"이라고 하면 비하하는 것도 아니지만), 종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약간의 여담이지만, 제가 "마취제"라는 용어를 쓴다 해도, 무속이든 기독교나 불교든 현실 속의 종교를 어떠한 본질적인 "악"으로 보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도권 종교가 보통 기존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한 특정 국가에서 혁명적인 상황이 조성되기만 한다면 민심에 예민한 종교계가 거기에다가 편승하여 보다 혁신적 쪽으로 갈 수 있는 확률도 있기에 저는 종교를 어떠한 "타고난 반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가톨릭 교회 상층부와 급진좌파인 차베스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쳐 충돌을 했어도 거의 전부가 가톨릭 신도인 베네수엘라 빈민들이 차베스의 초상화를 예수님의 성상 옆에 걸어놓는 것이고, 상당수의 하급 성직자들이 차베스의 노선을 부분적으로 내지 전체적으로 지지합니다. 즉, 제도권 종교란 기존 체제의 버팀목이라 해도 이 체제의 변혁이 불가피하다는 확신이 선다면 "사수(死守)"보다 "적응" 쪽을 택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억울한 빈민이 그 억울함의 기본적 원인을 파악하여 혁명적 행동에 나서는 것이야 최선의 시나리오지만, 그렇게 못할 경우 평생 쌓여 가는 울화(鬱火) 를 가정 폭력이나 술 주정, 마약 복용으로 "푸는" 것보다 차라리 예배나 굿판에 가서 "푸는" 것이 좀 낫지 않겠습니까?

종교적 "마취제"는 현실적으로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마취제 장사" 하시는 분들께서 자신들의 노릇 파악만 조금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엉터리 장사"를 하지 말고 기본적인 상도덕(商道德)을 지켰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입니다.

"노릇 파악"을 뭘 의미하는가 하면, 예컨대 "우리 종교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든가 "종교들 사이의 상호 이해 증진이 세계 평화의 관건"이라든가 같은 무의미한 주문들을 "마취제 판매 전문 업체" 쪽에서 외운다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가 존속되는 이상 세계에 무슨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살육에 내모는 것이 이 체제의 본질이고, 체제에 순치된 종교들이 그것을 제대로 막으려 한 적도 없고 성공적으로 막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찰에서 예수님의 상을 세우고 교회에서 부처님의 상을 세우고 이슬람 사원에서 기독교의 내용에 대해 강의를 해도 (물론 그렇게 하면 나쁠 것이 하나도 없고 좋기만 하지만) 자본가들이 부추기는 종교, 종족간의 각종의 갈등과 충돌들이 전세계에 계속 터질 것입니다.

"상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종교 단체에서의 성직 세습 관행이나, 하급 성직자와 고용인(예컨대 교회에서의 부목사 이하의 전도사, 사무원, 운전사 등)에 대한 악질적인 착취 관행, 타 종교에 대한 편견과 증오를 은근히 조장하는 일부 종교 단체의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는 사찰이나 교회의 "성공" 여부를 오로지 헌금의 규모와 건물 크기로 재단하는 인식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상도덕의 엄수"는 "마취제 판매업자" 자신들에게도 크게 필요할 부분입니다. 지금 종교 단체의 위세에 눌린 언론들의 자기 검열 관행 때문에 그렇지, 만약 매체를 통해 한국 종교계의 실제 그대로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면, 아마도 기존 업자들의 매상고가 대폭 축소되는 등 우리의 "마취제 시장"에서는 지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의 자기 검열이 영원치도 않으니 "관련 업계"로서는 일찍부터 "준비"해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동현 교수님, 여담이 너무 길어서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종교 업자"들을 보기만 하면 왠지 다단계 판매 업체와 같은, 뭔가가 속아 돈을 잃기만 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기에 이렇게 장황한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아니, 편법을 쓰지 않고서는 치부(致富)할 수 없는 자본주의 세상이기에 "종교 시장" 쪽만의 편법판매를 편향적으로 문제 삼자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저들이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듯한 모양으로 거드름 빼는 광경만은 참기가 힘듭니다…

계급 사회의 다른 종교들과 기본적인 차이가 없는 무속 신앙의 기복성이나 주술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무속 의례들이 공동체의 안정과 합심, 갈등의 완화 등에 기여한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굿판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속에서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불신과 미움이 극복되지 않습니까? 진오귀굿(영혼천도굿) 같은 경우에는, 망자의 편안한 저승길을 기도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인류의 영원한 과제인 "죽음과의 관계 설정"을 나름대로 풀어보지 않습니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무속의 세계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확보가 가능한 몇 안되는 영역이기도 했지요. 에로티시즘과 풍자, 신비적인 개인 체험이 깃든 무속 의례들이 엄숙한 유교적인 의례들과 좋은 대조가 돼 조선의 문화적 일상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출산, 산육(産育)을 관장해온 삼신할머니라는 하나의 주요 무신 (巫神)의 기원을 이야기해주는 "제석풀이"를 생각해보시지요. 지역마다 차이가 나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한 처녀와 "땡땡이중"의 성교(性交)로 아들 셋이 태어나는데, 그 아들은 제석신이 되고 그 아들을 잉태하자 집에서 쫓겨난 여성이 삼신할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무가 (巫歌)에서 "중"으로 표현되는 존재는 원래 무교(巫敎)의 독립적인 신격이었을 것이고 이 신화는 신들 사이의 성교와 그로 인한 새로운 신의 탄생을 그리는 것이었을 터인데, 엄숙한 신화에서 풍자성과 인간미가 넘치는 전설로 이미 변화된 "제석풀이"에서는 중과 처녀의 만남의 장면은 그야말로 걸작입니다.

"오날 해로 어찌 지울꼬", 즉 오늘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의 자루를 찢어 쌀을 땅에 떨어뜨렸다가 나중에 해가 질 때까지 젓가락으로 줍게 한, 처녀의 집에 공양을 빙자하여 온 중의 음욕(淫慾)을 그리는 부분은, 신들간의 장난스러운 성(性)을 그렇게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 신화를 꼭 생각하게 합니다. 사대부들에게 일부다처제 사회에서의 성적 욕망 충족의 무한하다 싶은 기회를 주면서도 성적 표현에 대한 위선적인 억제를 특징으로 삼았던 성리학 체제 하에서 이와 같은 순박하면서도 진실된 성(性) 이야기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오로지 대중의 신앙에 기반한 무교 (巫敎) 덕분이 아닌가요?

사실, 무속의 에로티시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김기영 감독의 영화 〈이어도〉(異魚島, 1977) 말씀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 영화 끝 부분에서 주인공인 주막 여성이 무당집 무신(巫神)의 조각 밑에서 생전에 제대로 사랑을 나누어보지 못했던 애인의 시체를 놓고 열정적인 "한마당"을 벌이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1977년 개봉 당시에 물론 삭제됐지만 요즘 DVD판에서 다행히 복원된 그 장면을 보고, 무속이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영원한 생명력의 종교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불교 쪽으로 본다면 중생의 선근 (善根)이 익어 업장(業障)이 풀면 더 이상 음욕(淫慾)이 일어나지 않을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데, 아직 번식 본능이 작동되는 중생이라면 꼭 전래의 무속 그대로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생명력의 종교"가 남을 듯한 감입니다.

무속이 민중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조선조의 유교적 관료들은, "음사(淫祀)" 탄압의 명분을 내걸기는 했지만, 실제로 "아랫것"들의 신앙을 그냥 묵인하거나 적절히 이용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실학자 이익(李瀷)의 말대로 "궁궐부터 고을들까지 모두 주무(主巫)들이 마음대로 출입하는" (〈星湖僿說〉, 권 1下, 鬼神門附) 곳, 국립 서민 병원 격인 활인서 (活人署)에서 무당들이 소속돼 활동했던 곳, 다산 정약용 같은 대학자도 지혜로운 생활의 한 방편으로 각종의 점법(占法)을 제시했던 (〈山林經濟〉) 곳은 바로 무당 5천 여명이 굿판들을 벌였던 후기의 조선이었습니다.

물론 민씨 족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고종 치하에서 진령군(眞靈君) 이씨와 같은 민비 계통의 무녀들이 수회(收賄)에 연관돼 관민의 원성을 샀지만, 왕정의 별기은(別祈恩)과 같은 무속 의례는 궁중과 민중 사이의 문화적인 간극을 좁히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비록 한반도에서 명실상부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는 이미 고대의 삼국이 국가의 근본적인 기틀을 잡기 이전에 끝나고 말았지만 최고 국가 권력자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답니다.

임금이 명하여 가뭄이 심한 지방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전염병이 도는 지방에서는 여제(厲祭)를 각각 지내게 하는 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고, 가뭄이 심할 적에 왕이 북교(北郊)에서, 또는 사단(社檀)에서 친제(親祭)하는 것도 거의 몇 년에 한 번씩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왕실에서 행하는 유교적 국가의 공식적인 기복(祈福)과 무당들의 기복은 그 절차, 의례상 서로 아주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왕실도 역시 기복을 했다는 것은 "무교적 사고(思考)"가 전근대 사회에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무당들은 관료들의 무세(巫稅) 갈취에 노출되고 유교적 관료들에게 통제와 간헐적인 탄압을 받았다 해도, 조선 사회의 유기적인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성리학적인 배타성으로 유명한 조선조의 사대부들도 어느 정도 공인해준 무속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그 "근절"에 나선 것은, 바로 서구의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과학 숭배에 흠뻑 젖은 개화기의 근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일상 생활의 근대적인 균질화와 저축, 소비를 위한 "생산적인" 생활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들은, 국가적 통제와 과학적 이해, 일률적인 통합이 불가능한 조선의 다양하고 복잡한 무속을 마땅히 없애야 할 재산 낭비와 "미신"으로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전래의 무속들을 "신도(神道)"라이름 하에 국가화시켜 내셔날리즘적 상징물로 만든 메이지 일본의 근대주의자와 달리, 개화기의 조선 계몽주의자들이 무속에 친화적이지 않은 기독교나 개신(改新) 유교와 같은 종교, 이념적 배경을 가졌기에 무속을 조선 민족의 상징으로 볼 생각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남산의 국사당의 "잡동사니 화상"을 불에 태워버린 개신교도들을 "애국자"로 칭찬하고 (〈독립신문〉, 1897년 7월27일), 무속이나 점술을 조선인의 발목을 잡은 "악습"으로 지목했습니다 (박은식, "舊習改良論", 〈서우〉 제2호, 1907년1월). 시대는 훨씬 늦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김동리 (1913-1995)의 단편소설 〈무녀도〉 (巫女圖: 1936 최초 발표)도 사실 무속에 대한 이와 같은 종류의 의식을 그 근저에 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는 기독교 쪽에서 무당에 대한 압박 내지 폭력적 배제의 경우가 훨씬 많았음에도, 〈무녀도〉에서 기독교인이 된 무녀의 아들이 어머니의 칼에 찔려 죽는 것이고 그 무녀는 신령에만 의지하고 사는, 무지하면서도 광신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입니다. 〈무녀도〉가 오랫동안 인기 작품이자 학교의 필독 작품으로 "문화적 권력"의 위치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우리 일반인들도 무속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멸시의 세례를 어쩔 수 없이 받아온 것이 아닙니까?

일제 시기에 "미신 타파"라는 표어는 일제 당국과 우파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좌파가 각자 나름대로 내걸고 있었습니다. 물론 종교 활동의 규제를 통해서 조선인의 일상을 보다 잘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길흉화복을 함부러 말하는 자"를 처벌하겠다고 (〈경찰범 처벌 규칙〉, 1912년3월) 나선 일제와, "백성으로 하여금 재산을 탕진케 하는 미신"들을 "타파"함으로써 일상의 자본주의화를 지향했던 우파 민족주의자, 그리고 "정신으로 만병을 치료하겠다"는 목사들을 "큰 무당"이라고 불러 조롱했던 좌파("경성의 迷信窟", - 〈개벽〉, 제48호, 1924년 6월)의 목적들이 각자 서로 달랐겠지요. 그러나, 근대 우월주의적 시각에서 무당이나 판수들을 쓸데 없는 인간으로 파악한 것은, 식민지 당국도 "민족 진영"의 좌,우파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일제가 1920년대부터 한국 무속을 "조선 신도의 유풍 (遺風)"으로 파악하여 한국 무속과 일본 신도의 흡사성이 "일선동조 (日鮮同祖)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등 한국의 무속까지도 "황민화" 정책에 이용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근대주의적 멸시의 태도에 그렇다고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은 듯합니다.

40만명의 무속인과 역술인들이 활동하고 주요 무속 의례 기능의 보유자들이 "인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오늘의 대한미국이 아닙니까? 무속의 공동체 신앙적, 예술적, 미적(美的) 가치까지 다 훼손시켜버리는 극단적인 상품화, 무속을 가장한 금품 갈취와 사기 등의 문제가 많지만, 지옥과 같은 무한 경쟁의 상황에서 무속이 많은 이들에게 스트레스와 불안을 제거해주는 역할도 하지요.

위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 스트레스와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인 자본주의를 우리가 제거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차라리 예배당이나 굿당이 술이나 마약보다 건강에 덜 해롭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속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무속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오늘날의 무속에 대한 일반적 태도는, 우리가 근대 초기의 "미신 타파"의 광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요?

100년 전의 개화파들이 비숍여사와 같은 서구인들의 무속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절대적 진리쯤으로 알았지만, 우리는 그 당시의 서구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되고 왜곡됐는지를 드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눈에 덮인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되는 책**

마르크스, "헤겔의 법철학 비판 입문":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intro.htm (영문)

김인회 외, 〈한국 무속의 종합적 고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이두현, 장주근, 이광규, 〈한국 민속학 개설〉, 일조각, 1991.

최석영,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 권력〉, 서경문화사, 1999.

황선명, 〈조선조 종교사회사 연구〉, 일지사, 1992.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조선의 귀신〉, 조선총독부, 1929 (한국어 번역 – 민음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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