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강경단체인 하마스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국과 뚜렷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이는 또하나의 친미 국가인 이집트로 하여금 중동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조를 거부하도록 요청해달라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말이 거부된 직후 나온 것이어서, 하마스 처리를 둘러싼 중동과 미국-이스라엘의 갈등이 이 지역에 쌓아놓은 미국의 교두보마저 흔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원조는 인도주의적 요구와만 연계돼야"**
팔레스타인에 대한 최대 원조국 중 하나인 사우디는 하마스가 정부를 구성해 어떤 정책을 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우디의 외무장관인 사우드 알-파이잘 왕자는 이날 중동을 순방중인 라이스 장관과의 회담을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모든 원조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우디의 이같은 입장은 인도주의적 원조는 계속하겠지만 테러집단이 주도하는 정부에 대한 원조는 끊겠다는 미국의 방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유럽연합(EU) 등은 지난 1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압승한 이후 원조 중단을 공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근 새 팔레스타인 의회 출범 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신해 거둬 온 월 5000만 달러 상당의 세수이체를 중단키로 했다.
알-파이잘 왕자는 "우리 왕국은 (하마스의 향후 정책에 대한) 예단을 피할 것"이라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국제 원조는 (정부 정책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요구와만 연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중단을 원하고 있는 하수도 시설에 대한 원조가 끊긴다면 인도주의적 도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집트 "하마스에 시간 줘야 한다"**
이에 앞서 라이스 장관은 이집트에서도 원조 중단 요청에 대한 반대에 부딪혔었다.
라이스 장관은 21일 카이로에서 아흐메드 아불 가이트 이집트 외무장관과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하마스는 "테러"와 "정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테러 진영에 한 발을 두고 다른 한 발을 정치에 들여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투쟁을 포기할 것을 하마스에 촉구했다.
그는 또 국제사회는 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평화를 지지하고 이스라엘과 맺은 종전 협정을 준수하는 등 통치권 행사에 필요한 요건을 갖출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하마스를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아불 가이트 이집트 외무 장관은 이스라엘의 세수이체 중단을 비난하면서 하마스가 국제사회의 요구에 반응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과는 다른 시각을 드러냈다.
아불 가이트 장관은 "하마스에 시간을 줘야 한다"며 "하마스는 점진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하마스가 향후 취할 입장과 관련해 예단해선 안 된다면서 하마스를 몰아붙이고 있는 미국을 간접 비판한 뒤, 하마스도 이스라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공존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패러독스'의 모습**
라이스 장관은 이번 중동 순방에서 친미 국가들이 하마스에 대한 압력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이들 국가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방침을 내부적으로 굳혔다.
미국은 그간 이집트, 사우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친미 국가들의 독재 정권을 용인하는 대신 이 나라들에서의 이권을 챙기면서도, 중대한 정책에서 차이가 있을 경우 민주주의 조치를 요구하며 이 나라들을 길들여 왔다.
그러나 그같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취해진 민주주의 조치는 이 나라 정부들이 반미적인 이 지역 민심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했고, 따라서 미국의 뜻과 더욱 어긋나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하마스 처리를 둘러싼 최근의 갈등은 그같은 '패러독스'의 대표적인 예다.
〈로이터〉 통신은 라이스 장관이 23일 UAE에서 이 지역 외무장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이집트, 사우디와 같은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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