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이는 경찰폭력이 원인이 된 농민들의 잇단 사망에 대한 노 대통령과 정부의 '불성실한 태도'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각계로 확산되는 분위기에서 확인된다.
20일에는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소속 목사들과 '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 고 홍덕표 농민 살해 규탄 범국민대회' 소속 농민대표들이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있는 서울경찰청 앞에서 잇달아 기자회견을 열고 농민 사망사건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질타했다.
지난달 15일 농민대회 때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부상당한 뒤 최근 사망한 고 홍덕표 씨 사건에 대해 정부는 19일 이해찬 국무총리 명의의 사과 담화문을 발표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매우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날 서울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개신교 목사들과 농민대표들은 "그 정도로는 안 된다"며 노무현 대통령의 정식 사과와 허준영 경찰청장의 파면을 거듭 요구했다.
먼저 오전 10시 반 서울경찰청 앞에 모인 목사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홍덕표 농민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고 하지만 고 전용철 농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고 지적한 뒤 "시위문화에 문제가 있다고 전제한 가운데 표명된 '유감'에 대해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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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이 오죽하면 거리로 나왔겠느냐"면서 기자회견을 시작한 목사들은 "어떻게 한 집회에서 경찰이 사람 두 명을 때려 죽였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 지는 사람이 없느냐. 정부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우린 농민 때려죽이라고 노무현 뽑은 거 아니다"**
목사들의 기자화견 도중에 고 전용철 씨의 형인 전용식 씨가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그는 "이 정부가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여 놓고도 방관했다. 용철이는 언급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너무 억울하고 참담했다"며 "우리는 잘 살게 해달라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았지, 농민 때려 죽이라고 뽑아준 게 아니다. 그래 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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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의 차흥도 목사는 "목회자로서 농민들이 정든 삶터에서 쫓겨나고 귀한 생명이 죽임 당하는 현실에서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며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경찰청장은 마땅히 파면돼야 하고, 대통령의 사과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목회활동을 한다는 한경호 목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농촌과 농민이 어렵다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는 거 같다"며 "1960년대부터 40년 간 저곡가 정책으로 이 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면서도 희생만 당해 온 농민들은 이제 홍콩까지 날아가 시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지경이다. 농업이 무너졌을 때 피해는 농민만 보게 될 것 같느냐"고 말했다.
***"극렬시위 계속하게 만드는 무능한 정권 퇴진해야"**
그는 "과거 전두환 정권 이후 지난달 15일 농민대회 때처럼 경찰이 거칠고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하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거리 곳곳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농민을 또 짓밟고 후려치는 걸 보면서 경악했고 슬펐다"며 "내일 모레면 칠순인 할아버지까지 무참하게 짓밟은 전경들은 지시대로 했을 것이다. 지휘의 최고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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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1시에 열린 농민단체를 비롯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에서는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사무총장이 나서서 "소위 민주개혁 정권이 두 번이나 들어섰는데도 계속 노동자와 농민들이 이렇게 극렬하게 시위를 해야 하냐"며 "그 무능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라도 이 정권은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사무총장은 "죽음 이후 처리과정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고,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이 나라 정치권과 언론은 학생이나 지식인이 죽을 땐 그 난리를 쳤는데 농민이 맞아 죽은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기자회견 자리에는 고 박종철 씨의 아버지인 박정기 씨와 이한열 씨의 모친인 배은심 씨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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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씨는 과거에 경찰청 앞에서 자신이 보름 간 농성을 했던 기억을 이야기한 뒤 "그동안 참고 또 참은 말이 있다. '너희들도 한번 네 자식이, 네 가족이 억울하게 한번 죽어봐라'라는 것"이라며 "인간의 탈을 썼으면 경찰청장이 물러나야 한다. 아니 물러나는 것 가지고 되겠나. 죽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경찰청장은 살인마다. 사람을 죽였다"라며 울먹였다.
기자회견에서 범국민대책위는 "오늘(20일)을 '경찰폭력 추방의 날'로 정한다"며 "저녁 때는 전국의 시도 경찰청 앞에서 일제히 항의 촛불집회를 열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목사들과 농민들, 그 외 시민단체들이 표출한 '분노'는 정권의 최고 책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섣부른 '유감' 표명이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효과'를 가져 왔음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갈등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환만 계속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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