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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회개 많이 해서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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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회개 많이 해서 복 많이 받으세요."

김민웅의 세상읽기 〈167〉정치꽁트

토론은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정치 이야기로 시작되었던 것이 종교로까지 번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격론을 벌이다 못해 오늘 밤에는 기어코 결판을 낼 듯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이윽고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한마디 차갑게 내뱉었다. "도대체 거론의 가치도 없는 자로구만."

이 말에 앉아 있던 상대는 붉어졌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맞받아 쏘아 붙였다. "선배라고 그래도 예우했더니만, 현실감이 영 없으시구만요." 그의 마른 얼굴에 경멸의 냉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서로가 기세가 곤두선 채로 등을 돌리고 헤어졌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회개〉라는 말이었다. 얼마 전 페르시아의 격전지에 다녀온 L은 그 전쟁은 도저히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아니 될 범죄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지금처럼 아메리고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파병은 철회하고 보냈던 병력들은 모두 돌아오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난데없이 후배인 R이 아메리고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면서, 과거에 자신이 전쟁과 파병 반대에 나섰던 것을 회개한다고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L은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그날, 마침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R과 마주쳤다.

왠지 꼴을 보기조차 싫었으나 그래도 꾹 참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R이 그의 손을 잡아 다니더니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L은 별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으나 주변 분위기도 있고 해서 구석진 방으로 들어가 그와 마주 대했다. R이 입을 열었다. "선배, 요즘 우리 조직 돌아가는 꼴이 영 괴롭습니다."

L은 묵묵부답으로 있었다. 속으로 중얼거리기를 "우리 조직이 이렇게 줏대 없게 된 것이 다 너 같은 자들 때문이 아니냐?" R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배,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요. 어떻든 미우나 고우나 우리 조직 전체를 살리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꾸 밖에서 다른 소리 하고 그러시면 안 좋습니다."

L은 황당했다. R은 계속 말했다. "저도 회개 많이 했습니다. 조직의 장이 내린 결정은 전체를 보고 내리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그만 제 생각에만 몰두하고 제 명예만 생각하고 비겁하게 다른 선택을 했던 건데, 특히 그 파병 반대 건 있지 않습니까? 깊이 뉘우쳤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L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아니, 회개할 자가 누군데 그래? 그리고 회개라는 말을 그런 데에 쓰다니 자네 회개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는 알기나 하나? 이 전쟁은 범죄야. 회개는 그 범죄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겠다는 데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R이 대꾸했다. "선배도 회개하세요. 이러시는 거 다 나중을 생각한 인기전술 아닙니까? 저도 제 인기만 생각하면 그렇게 못해서 그러는 줄 아십니까? 다 조직을 생각한 선택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결국 L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했다. "그래 너나 잘하세요. 회개 많이 해서 복 많이 받아라."

밖으로 나오니 거리의 바람이 무척 날카로웠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가 환영처럼 L의 젖은 눈망울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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