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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3대 타깃은 육군본부, 장면 총리, 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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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3대 타깃은 육군본부, 장면 총리, 방송국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16> 전두환도 군권장악 후 정권찬탈

박정희는 군사반란에 일부 불만분자들만이 아니라 군부 전체가 참여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육참총장 장도영을 포섭하는데 공을 들였다. 그것은 무혈 쿠데타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유엔군 모자를 쓰고 있는 주한미군 사령부 측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박정희에게 장도영은 단순히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여러차례 위기에서 구출해준 은인이었다. 장도영 자신은 일본 동양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 학병으로 일군에 들어갔지만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 지식과 역량 면에서 우위에 있으며 뿐만 아니라 나이도 자신보다 다섯 살 이상이나 많았다. 그런 박정희가 6.25 전쟁 전부터 육군본부 정보국장이던 자신의 부하로 근무했으니 호락호락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남로당의 군사프락치인 것이 발각돼 구속되자 장도영은 그의 구명운동에 나선다. 당시 일본군 출신 다수가 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장도영은 정일권 백선엽 등과 함께 박정희를 구출할 수 있었다. 물론 박정희가 풀려난 것은 군내에 있던 남로당 조직을 진술한 '변신'이 결정적 배경이었지만 다른 한편 장도영 등이 요로에 탄원한 것도 실질적 효과를 보았다. 박정희가 풀려나자 장도영은 예편당해 민간인 신분인 박정희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기용한다. 일본군 계열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육본 정보국의 문관 신분이던 박정희를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시켰다.

4.19혁명 후에도 2군사령관이던 장도영은 박정희가 육사8기 정군파 김종필 등의 하극상 사건으로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밀려나 갈 곳이 없을 때 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어차피 박정희는 소장에서 중장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없었으며 그래서 61년 5월말 옷을 벗게 돼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4.19혁명 후 여론에 편승한 육사8기 정군파의 보스 노릇을 했고 장도영은 3.15 부정선거 때 2군사령관으로 그 부정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군운동의 명분 중 하나는 군내 부정선거 책임자 문책이었다. 여기서 장도영은 정군파의 보스 박정희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장도영과 박정희는 상당히 긴밀하게 교유하는 직속 상관과 부하 사이가 된 것이다.

박정희 "협조해 주시든가, 묵인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장도영 "밀고하거나 무력으로 막지는 않겠소."


1961년 4월10일 낮, 육군본부 총장실.
갑자기 찾아와 군사혁명 거사를 말하며 영도자로 모시겠다는 박정희 앞에서 장도영은 당황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이 군사반란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육참총장에게는 정보수사기관으로 육군방첩대와 헌병대가 있다. 언제든 군내에 범죄혐의자가 있으면 체포하고 수사해서 기소하게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를 체포할만한 결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가 행동에 나서지 않도록 설득해 본다.

"이봐요 박 장군, 나는 그런 허무맹랑한 혁명 같은 것에 협조할 수 없어요."
"그럼, 묵인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박정희가 장도영에게 묵인을 요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반란이 벌어져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진압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장도영은 처음에"묵인해 달라"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나는 협조도 묵인도 할 수 없소."
"각하, 이 썩어가는 정치와 도탄에 빠진 민생고 때문에 정의감 있는 장교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그 장교들이 각하를 모시려고 합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끈질긴 요구와 경의 표시에 또 한번 엉거주춤했다. 설마하니 박정희가 나라와 군부를 망가트리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유엔군의 모자를 쓴 주한미군이 5만명이나 있는데다 한국군 전방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유엔군사령관이 쥐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또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군 부대를 동원하려 해도 유엔군사령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사실 군 작전권이 주한 유엔군사령관에 있기 때문에 진압군의 동원이 육참총장의 전권사항은 아니었다. 장도영은 일단 박정희에게 공을 던지기로 했다.

"나는 들은 얘기를 밀고하거나 무력으로 막지는 않겠소. 박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
"그럼 묵인하시고 거사가 성공하면 저희 지도자가 돼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박정희는 그 후 장도영에 대해 집중 관리에 들어갔다. 며칠 후엔 장도영의 측근 장성 중 한명인 논산훈련소장 최홍희를 보내 쿠데타군의 규모가 전군에 퍼져 있음을 귀띔하게 했다. 장도영은 최홍희가 박정희에 포섭된 것을 처음으로 본인에게서 확인하고 내심 놀랐다. 쿠데타 동조세력이 얼마나 될지 정확히 헤아려지지도 않았고 더욱 불안해졌다. 얼마 지나 박정희는 또 사람을 보내 정권장악 후 정부 운영의 방향과 정책들에 대한 설명자료도 전달했다. 일련의 심리전이기도 하고 또한 군사반란의 공범으로 만드는 공작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는 상당한 비밀 누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장도영의 마음을 사로잡느라 무진 애썼다.

채명신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박정희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니까, 위험인물은 아니지."


박정희와 육사8기 하극상 정군파는 군사반란 D 데이를 당초 4.19혁명 1주년 기념일로 정했었다. 이들은 혁명기념일 날 학생들의 제2봉기가 터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될 때 혼란상과 국가안보 위기를 이유로 군사쿠데타를 거사할 흉계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중했고 서울 거리는 조용했다. 숨죽이며 사회혼란상을 기대하던 군사반란 세력은 혀를 차며 학생들을 원망했다.

1차 거사기회를 놓친 군사반란 세력은 다시 5월12일을 D 데이로 정했다. 그런데 쿠데타 작전의 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이 그 날 서울 외곽지역에서 훈련을 하라는 육군본부의 훈령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애가 탔다.

5월11일, 일이 어그러진 상황에서 박정희는 반란군 조직을 점검해야 했다. 그는 서울에서 쿠데타 핵심그룹을 만난 뒤 급거 전방으로 가 5사단장 채명신을 만난다.

"채 장군, 별 일 없지요. 일부 기밀이 새 나가기도 하고 또 공수단이 하필 육본 훈련에 걸리기도 해서 거사 날짜가 차질이 생겼소. 그러나 조속히 날을 다시 잡아서 행동해야 할 것 같소."
"그런데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장도영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반란군 가담자 중 고급 지휘관일수록 육군 총수인 장도영의 의중을 궁금해 했고 박정희에게 그것을 확인하려 했다. 거사 전에 육참총장의 생각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다.

채명신은 만약 육참총장인 장도영이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마음먹을 경우 일이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했다. 게다가 공수단장 박치옥이나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등 육사5기 동기생들과 함께 자신도 장도영과는 가까운 처지였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도영에 대해 심중의 일면을 드러냈다. 그는 장도영의 속마음과 결단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글쎄, 장 총장은 기밀누설에 대해 정보 보고를 들었을 텐데 별 조치가 없어요. 그가 큰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소. 장 총장은 원래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자지. 그래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언제 어떻게 태도가 바뀔지 몰라요. 우리가 그 사람의 변덕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빨리 단안을 내려야 하겠소. 내 신속하게 계획 전반을 검토하고 결정을 알려줄 테니 차질 없이 합시다."

우유부단하고 사람 좋은 장도영과 오랫동안 반란을 꿈꾸며 권력욕으로 다져진 박정희, 5.16 군사반란은 두 사람의 기 싸움에서도 승부가 이미 예정돼 있던 셈이다.
▲1961년 5월16일 오전 군사반란군이 서울 중앙청을 점령했다.

D데이는 1군창설 기념일 행사로 지휘관 공백인 5월16일 0시
제1선봉 공수단, 제2선봉 해병여단, 거사 총병력은 4000


전방에서 서울로 온 박정희는 반란군 핵심들을 만나 세 번째로 거사날짜를 검토했다. 두 번째로 어그러진 5월12일은 금요일이었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가능한 날을 잡아야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용 카렌다에 '1군 창설기념일'이 쓰여 있는 5월15일, 월요일을 응시했다. 그날 야전군 고급지휘관들은 모두 1군사령부 기념식에 참석하느라 부대를 떠난다. 지휘관의 공백 상태에서 하루만에 주요 점령계획을 완료하고 국민에게 전파하기만 하면 거사는 성공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무총리 장면과 국방장관 현석호도 1군사령부 창설기념식에 참석하게 돼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장면은 쿠데타의 주요 행동계획 상 거사 즉시 체포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야 정부가 무력화되고 새로운 '군사혁명위원회'가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 전복이었다. 그런 장면이 1군사령부에 가 있을 때 거사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무총리가 1군사령부에 앉아서 진압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작전으로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

반란군 지도부는 묘수를 짜냈다. 국무총리 장면이 서울로 귀환하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1군사령부에서 칵테일 파티를 가진 후 잠들었을 시각인 5월16일 0시, 그 시각이야말로 최고의 H 아워였다.

반란군의 제1선봉은 박치옥과 오정근, 차지철 등이 중심을 이룬 공수단이었다. 그리고 전 해병대사령관 김동하와 해병여단장 김윤근 등이 지휘하는 해병대가 제2선봉을 맡았다. 이어 6군단의 포병사령관 문재준과 대대장 신윤창이 지휘하는 포병단, 서울의 김재춘이 참모장인 6관구사령부의 예하 병력과 30사단, 경기도의 33사단, 그리고 전방 채명신의 5사단 등이 주축이었다. 병력을 헤아려 보니 도합 4000여명. 공수단과 해병여단은 한강교를 넘어 오게 돼 있고 6군단 포병단 등 전방부대는 의정부와 미아리를 거쳐 올 것이다.

거사의 핵심 3대 타깃은 육군본부와 국무총리 장면의 거처인 반도호텔 808호실, 그리고 남산의 중앙방송국이었다. 이어 중앙청과 서울시청 앞 광장 등 서울의 관가 요소를 점령한다. 반란군의 작전계획은 주도면밀하게 군권 장악과 정부 전복, 그리고 민심 장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먼저 군 지휘부를 점령해 무력을 장악한 뒤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법이다. 박정희의 후예 전두환도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뒤 정권찬탈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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