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개혁!**
이번 총선으로 고이즈미는 2차대전 때의 대정익찬회 이후로는 전례가 없는 의회 장악력을 갖게 됐다. 총선 참패 후 민주당의 새 지도자로 선출된 마에하라 세이지는 43세의 전직 변호사이자 이른바 안보전문가로, 위기에 빠진 당에 보다 인간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을 덧씌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컨대 그는 안보와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자민당 쪽 입장으로 기울고 있는 반면 조직노동세력과의 연계는 끊었다. 현재의 추세대로만 본다면 일본 의회는 앞으로 '고이즈미정권익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이즈미 승리의 역설은, 그 승리가 진정한 정치사회개혁에 대한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하락, 절망에 가까운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이즈미는 단호한 지도자, 구원자의 이미지로써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문제의 해결사라기보다는 문제 그 자체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에 대한 지지는 무직 또는 반(半)실직 상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젊은이들의 황량하고 쓸쓸한 세계에서 고이즈미는 '정말로 쌈빡한' 인물로 비쳐지고 있다. 그의 "개혁! 개혁!" 외침에 도취된 이들은 바로 그가 위기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개혁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고이즈미가 요술지팡이를 휘둘러 70년대의 그 안정적인 세계를 되돌려줄 것을 열망하고 있다. 고이즈미가 파괴해버리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바로 그 세계와 그 세계의 확실함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고이즈미의 연극무대는 다층적인 환영(幻影)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가 공천한 후보 중 30%가 2대, 3대째 세습정치인이고(고이즈미 자신이 3대째 세습정치인이다), 6명 중 1명은 전직 관료이며, 종교정당의 도움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개혁적이고 능동적이며 우상파괴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새로운' 정치세력임을 자임하면서 자신들이 뿌리 깊은 '보수세력' 및 관료세력에 맞서 힘차게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연출하고 있다. 한 비평가는 고이즈미의 '개혁'을 1930년대 관료와 정치가, 군부지도자들이 추구했던 '혁신'에 비유하면서, 당시 그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약속했으나 그 결과는 파시즘과 전쟁이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는 자신의 야스쿠니 참배가 이웃나라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일본 국익에 해가 될 것이 분명해지자 참배를 중단했다. 반면 고이즈미는 이같은 나카소네의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명확히 "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100명 이상의 의원들이 낙선이라는 정치적 희생을 무릅쓰고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지지했다. 새 의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고이즈미가 참신함과 매력을 발휘한 것은 그가 여성 정치인을 중시한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 이전 일본 의회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은 7%에 불과했으며 이는 세계 101위 수준이다. 자민당 정치인들은 망언을 밥 먹듯이 하는데, 예컨대 집단강간은 남성의 정력이 좋아서 일어난다거나 "정상에 가까운 행위"라고 두둔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을 고이즈미가 문제 삼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자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야당인 민주당보다도 훨씬 적은 여성 후보를 냈으며(346명 중 26명), 여성 지위향상에 대한 아무런 정책도 없고, 오히려 양성 평등을 규정한 헌법 24조의 개정을 다짐하고 있다. 이번 총선을 통해 의회에 진출한 여성자객("립스틱을 바른 닌자")들이 이같은 자민당의 남성지배적 구조를 변화시킬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이슈들은 이번 총선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생태 위기, 외교적 고립, 만성적 부채, 인구 감소 및 노령화, '일본적' 고용시스템의 포기, 늘어나는 소년 범죄, 늘어나는 자살, 심각한 사회적 비관주의가 그것들이다. 고이즈미의 '개혁' 처방은 민영화, 탈규제, 미국에의 의존 심화(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등), 애국심 및 국가적 자존심의 강조, 헌법 개정, 교육기본법 제정, 케인즈주의적인 토건국가와 소득재분배적이며 평등지향적인 사회 대신 하이예크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미국적 사회의 도입을 꿈꾼다.
한때 폭 넓은 합의기반을 가졌던 자민당은 이제 고이즈미 지도 하에 탈규제와 합리화, 구조조정의 도그마에 빠진, 일체의 이견이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도당으로 변질됐다. 고이즈미는 부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고 (복지, 교육 등)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를 삭감했지만,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국가재정의 위기 상황을 감안하면 그가 총리직을 내놓는 순간 (일반 서민들의) 소비세가 상당히 늘어날 것은 불가피하다.
고이즈미는 새로움과 개혁을 얘기하면서 자민당을 당내의 반동적 극우파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지경으로까지 몰고 왔다. "당내 파벌을 없애겠다"든가 "자민당을 깨버리겠다"는 고이즈미의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파벌들을 제거하겠다는 것, 자민당의 정치기제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망령을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조쿠(族)', 즉 특정 산업(예컨대 농업, 통신, 건설 등)과 유착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제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성과라는 것도 자민당 전체를 일본 재계의 사상 유례 없는 영향력 아래 굴복시키는 희생을 치르고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 재계는 한 목소리로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아젠다를 지지하고 있다. 과거의 자민당 지도자들이 의회정치의 현실, 또는 당내 파벌 간의 세력균형 때문에 감히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고이즈미는 아무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고이즈미야말로 가장 '자민당적인' 총리인지도 모른다.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적 열정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있는 동안 자민당 내의 '배신자들', <이코노미스트>가 총선 직전 "당내의 막가파식 반(反)개혁파"에 속하는 "이단자들"이라고 지칭했던 정치인들은 사회 및 정치에 대한 '감상적인' 견해를 고집하고 있으며, "복지국가 건설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도록" 노력하겠다는 1955년 자민당 창당 강령을 아직도 신봉하고 있다. 사실 1973년 노인에 대한 무료건강보험과 은퇴자에 대한 60% 연금 지급(이 비율은 2004년의 '연금혁명'에 의해 처음 50%로 삭감됐다)을 도입한 것은 다나카였다. 가메이 시즈카 전 자민당 정조회장 등 이른바 '이단자들'은 정치란 약자를 돌보는 것이며, 부의 창조 못지않게 재분배도 중요하고, 고이즈미의 "무자비한(그 자신의 표현이다)" 근대화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 '이단자들'은 또한 평화와 안보 문제와 관련해 기존 평화헌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고이즈미의 자위대 이라크 파병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자신에게 보내진 자객 후보, 인터넷 백만장자인 호리에 다카후미를 물리친 후 가메이는 고이즈미의 승리는 거품에 불과하며 이번 선거로 일본은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선거에서의 고이즈미에 대한 찬반은 일본의 대미 예속, 그리고 일본 내 소외계층의 방치에 대한 찬반투표였다고 지적했다. 이번 총선에서 고이즈미의 선거운동은 가메이와 같은 우정공사 민영화 반대론자들을 썩어빠진 이익단체들을 두둔하는 반동적 정치인, 사실상의 배신자로 낙인찍는 데 기가 막힐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냉전기간 내내 미국의 지원과 사주에 의해 일본의 시민사회, 즉 노동조합, 시민운동, 학생운동 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력화된 것도 고이즈미의 성공을 도왔다. 언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쇄매체가 고이즈미에 대해 회의적 내지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 반면 방송 등 전자매체는 고이즈미의 연극에 철저히 놀아났다.
아마도 고이즈미의 정치적 입장 중 그의 민족주의적 자세와 워싱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처럼 모순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일본을 '극동의 영국'으로 만들기를 열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신자유주의의 전범으로 재창조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열성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후자의 사명은 2차대전 직후 일본을 평화애호적 민주국가로 재창조하려는 맥아더 장군의 야망만큼이나 원대한 것이다.
예전에 미국 관리들이 뻔질나게 도쿄를 들락거리면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강요했을 때는 관료, 나아가 일부 야당 정치인들까지 민족주의적 이유로 이에 저항했지만,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이라크 파병과 개헌, 우정공사 민영화와 미국 쇠고기 수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국익을 아는' 사람들로 대접받고 있다.
고이즈미 자신은 이러한 친미적 행동에 대해 대가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만나보라고 권고한 것과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미국의 도움을 요청한 것 등 2차례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전자의 경우 고이즈미는 부시의 '싸늘한 침묵'에 부딪혔고, 후자의 경우에는 미국 쇠고기에 대한 수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겨운 강의를 들어야 했다.
최근 일본의 정치에서 '개혁'이 좌절되고, 조작되고, 거부되면 될수록 '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리크루트 사건을 비롯한 자민당의 잇단 스캔들에 의해 유권자들에게 분노와 역겨움만을 안겨주었으며, 1994년의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개혁'은 이제 부패는 전혀 없애지 못하면서, 사회민주당 및 공산당 등 야당 진영을 소외시키고, 마치 단일한 보수 정당의 양대 파벌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양당 시스템의 환영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아가 두 파벌(또는 정당) 모두 미국의 안보협력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개헌을 통해 자위대를 정규군화 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데 완벽한 의견 일치를 봄으로써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월 14일 일본 참의원은 지난 8월 8일 125 대 108으로 부결시켰던 우정공사민영화법안을 134대 100으로 통과시켰다. 8월 당시 법안에 반대했던 의원들 중, 목숨을 걸고 반대하겠다고 다짐했던 일부 의원들을 포함하여, 단 한 의원을 빼놓고는 모두가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들은 이제 당 지도부 앞에 자신의 목을 내밀고 그저 관대한 처분만을,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의 복권을 간청하고 있다. 이처럼 참의원이 유순해지면서 이제 고이즈미의 개혁드라이브에 대한 참의원의 저항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앞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재계 엘리트와 미국 정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요구해 왔던 대규모의 제도적 '개혁'이 거침없이 시도될 것이다.
'고이즈미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3기 고이즈미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던 날, 자민당의 원로 정치인 고토다 마사하루가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70-80년대 일본 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고토다는 그 뒤 원로 정치인으로 추앙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이즈미와는 거리를 두어 왔으며,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이나 개헌, 우정공사 민영화 등에 반대했다. 1994년 그는 일본을 미국의 '속국(vassal state)'이라고 지칭했으며 죽기 수 개월 전에는 일본이 '지옥'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다음에야 일본 국민들의 눈이 뜨여질 것이라는 슬픈 예언을 한 것이다.
<번역: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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