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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길러보려니…"

[저출산고령화의 덫3] 시대변화 못따라가는 직장현실

"임신자 해고는 불법이니 실적 미달에 의한 권고사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하죠.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게 해줄게요."

파견노동자 김다은(28, 가명) 씨는 소속 파견업체 관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그것도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치솟는 화를 겉으로 표현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고, 관리자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자니 한없이 억울했다. '임신한 게 죄인가?'하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관리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비치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없는 직장현실**

금융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 씨는 맡은 일을 잘 해 왔고, 퇴사를 종용받을만한 행위를 한 적도 없다. 김 씨는 7개월 전에 파견업체 A사와 6개월 간의 계약을 맺고 B사로 파견됐다. B사에서는 김 씨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따로 1년 간의 계약을 맺자고 요청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김 씨는 업무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 씨가 임신하자마자 두 업체의 태도가 달라졌다. 두 업체는 서로 책임 미루기에 급급했다. 파견업체 A사는 "다른 회사에서 파견직에게 출산휴가를 준 사례가 있긴 하지만 B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출산휴가 기간 중의 급여 문제와 관련해 B사에서 협조해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출산휴가를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했고, B사는 먼산만 바라보며 모른 체했다.

어쨋든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 지내던 중 김씨는 A사 관리자로부터 "당신이 임신을 하니 불편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김 씨의 남편인 심기현(31, 가명) 씨는 임신을 했다고 온갖 모욕을 당해야 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무척 안타깝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신 나서서 출산휴가를 요구해봐야 듣게 될 대답이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아내로부터 직장에서 당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남편 심 씨는 "나라에서 저출산이 문제니 뭐니 하고 출산휴가의 권리를 옹호해주는 듯한 말도 하지만, 개인이 회사에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아내의 문제를 계기로 출산휴가에 관심을 갖게 되어 주위를 살펴보니, 출산휴가로 회사와 갈등이 생기면 권리를 계속 주장하기보다는 나중을 생각해 그냥 회사의 방침을 순종하며 묵묵히 참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출산 예정일을 두 달 앞두고 있는 김다은 씨는 그러나 '물러설 수 없다'고 결심했다. 김 씨는 한 달 뒤에 출산휴가를 다시 요구해볼 생각이다. 임신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는 불법적인 행위가 번연히 벌어지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주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대신 나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김 씨는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작정하고 노무사와 상담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김 씨의 사례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권고사직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출산휴가를 요구하고 일을 계속 하려고 하는가? 계약직이라면 일자리가 계속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라고.

그러나 김 씨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김 씨는 "내가 당장 벌지 않게 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임신했다고 해서 일을 하기가 힘든 것도 아니고, 비록 계약직이지만 1년의 계약기간 중 일부라도 부당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평등의 전화 "모성보호 관련 상담 급증 추세"**

김 씨의 사례는 한국사회에서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이는 여성노동자회에서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의 상담 추이를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평등의 전화'는 첫 해에 397건의 상담을 하는 데 그쳤지만 지난해에는 무려 3000여 건의 상담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평등의 전화'가 지난 10년 간의 상담 내용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는 '저출산 시대' 여성들의 삶의 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모성보호'와 관련된 상담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대부분의 상담이 '임금체불' 및 '고용불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산전산후 휴가기간을 90일로 늘리는 등의 방향으로 '모성보호 3법(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이 개정된 2002년부터는 모성보호 관련 상담이 크게 늘었다. 전체 상담건수 중 관련 상담건수의 비중이 1995~2001년엔 평균 6~8%였으나 2002년 이후 12~14%로 확대된 것이다.

이런 통계는 일터에서 여성들이 출산과 관련된 갈등을 갈수록 더 많이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산이 갈등의 원인이 될 경우, 직장 여성들은 출산을 포기하거나 무작정 연기하는 일이 많다. 반대로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이라면 아예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도 왕왕 일어난다. 요컨대 어떤 경우든 직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황현숙 평등의 전화 소장은 "사실 1980년대만 해도 '보험아줌마'를 빼고는 결혼하고 나서도 일하는 여성이 별로 없었다. '결혼퇴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있을 정도였고, 아이를 낳은 뒤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갈등이 적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결혼퇴직'이라는 말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반면 '육아퇴직'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런 변화는 지난 10여 년 사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확대돼 온 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여성발전기본법(1995년)과 남녀차별금지법(1999년)이 제정됐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크게 상승했으며, 서비스업이 확대되면서 여성의 고용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직장의 현실은 여성 노동자들의 모성을 보호해주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나마 모성보호와 관련해 회사와 갈등이라도 빚는 일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무직과 전문기술직 등 정규직 쪽의 사정이다. 전체 여성노동자 중 7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모성보호는 더더욱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정규직이라도 100명이 안 되는 사업장에서는 대체로 출산휴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가 어렵다. 휴가급여 지불능력이 더 모자라는 영세사업장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황현숙 소장은 "아직은 공무원, 300인 이상 사업장, 노조가 힘이 있는 사업장 등의 소수 여성노동자들만이 '모성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황 소장은 그러나 "그래도 여성들이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출산은 곧 퇴사'라는 고정관념을 수용하던 여성들이 이제는 노조 등을 통해 나름대로 싸워보고 출산과 직장을 동시에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최근 3~4년동안에 '제가 우리 회사 출산휴가 1호예요'라고 말하는 상담자들이 늘었다"고 전한다.

***'출산퇴직'에서 '육아퇴직'으로 바뀌었을 뿐**

물론 여성노동자가 출산 때문에 일자리 상실의 위협을 받는 경우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평등의 전화의 상담 사례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출산휴가 투쟁'이 아직도 매우 치열하게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출산휴가 투쟁이라는 것이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 노사 간에 감정적 대립의 골까지 만드는 것도 큰 문제다. 이는 고용주들의 의식이 아직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마찰이기도 하다.

사측에서는 여성노동자의 출산휴가가 다른 직원들에게 일의 부담을 늘린다는 점을 공공연히 부각시키기도 하고, 임신한 여성노동자를 엉뚱한 다른 부서로 배치하는 인사조처를 통해 간접적인 퇴사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여성노동자들은 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등 다양한 투쟁방법을 동원한다.

황현숙 소장은 "그런 갈등은 결국 '합의'라는 미명 아래 '자진사직'과 '위로금'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진사직'의 형식이 동원되는 것은 출산휴가를 이유로 한 해고는 불법이기 때문이고, '위로금'은 통상 실업급여의 성격으로 제시된다.

출산휴가 3개월을 쉰다고 해서 오랜 경력으로 일이 손에 익은 여성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손해인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과 관련해 황 소장은 "우선 회사에서는 여성노동자가 임신하면 그 여성노동자의 일상생활이 일이 아닌 가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이 육아의 책임을 다 지는 현실에서는 그런 생각이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직장에서 빈발하는 '출산퇴직' 또는 '육아퇴직'의 문제, 또는 '출산휴가'를 둘러싼 노동현장의 갈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과 제도가 개선될 필요도 있고, 고용과 기업경영의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선진화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 실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실에서 급한대로 당장 추진해볼 수 있는 대책은 없을까?

***영아 보육시설이 기피되는 이유**

한국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현숙 소장은 '태어난 지 90일이 지난 영아를 받아주는 24시간 보육시설'과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교실'을 꼽았다. 특히 보육과 교육의 경계선에 있는 초등학생들은 요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갈 데가 없어서 부모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초등학교 자녀를 학원으로 보내고 있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의 서원경 원장도 '0세 영아반'이라는 말로 황현숙 소장과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여성의 경력단절에 핵심적인 원인이 되는 영아보육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한데, 현재 영유아보육법상 교사 1명이 3명 이상 돌볼 수 없게 돼 있어 대부분의 보육시설에서 영아반 운영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정 영아 보육비 상한이 영아 1인 당 29만9000원이니 3명의 영아를 교사 한 명이 맡는다고 할 때 기껏해야 89만7000원의 수입밖에 거둘 수 없기에 보육교사 인건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아들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 집단시설에 있다 보면 아픈 경우가 종종 있는데, 현재 법적으론 보육시설에서는 '방문진료'를 받을 수 없게 돼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보육시설에 대한 '촉탁의(직접 보육시설을 방문하거나 보육시설에 고용된 의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불법인 것이다.

아울러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시설 확충' 주장은 초등학생들이 보육 단계를 갓 지나 아직 '돌봄'이 필요한 게 현실인데 적절한 제도가 없다면 이 부담이 또 고스란히 '엄마'들에게 전가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부담이 적어야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현실성 있는 대책의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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