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한류(韓流)에 제일 열광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 아닐까. 미국과 일본이 석권한 세계 문화시장 한켠에서 연달은 히트작으로 화려한 입점신고식을 치른 한국. 우쭐해졌지만 팔 컨텐츠가 너무 빨리 동나는 것은 아닌지…. 한류를 향한 한국인들의 자축에 왠지 미심쩍고 불안한 것이 기자만의 기우일까 자문하며 26일 도착한 곳은 베트남 호치민시.
한때 피로 물들었던 사이공강 옆에 위치한 레전드 호텔에서는 2박3일 동안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를 위해 뛰어온 사람들의 구슬땀이 작은 결실을 맺고 있었다.
베트남 호치민 시의 사회과학인문대학(USSH, University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과 호주의 한-호 아시아 연구소(KAREC, Korea-Australasia Research Centre) 주최의 국제심포지엄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한국학 : 연구와 교육에서의 전략적 협력과 발전'이 그것이었다. 여기엔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7개 나라의 한국학 연구자들과 각 대학의 부총장, 문화산업 관련 정부 관계자 등 60여명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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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대학들은 왜 한국학을 하려고 하나**
이번 심포지엄은 두 가지 촛점을 갖고 있었다. '문화산업·교류를 둘러싼 전략회의'가 첫번째 촛점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난 2001년 한국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발족한 한-호 아시아 연구소와 동남아-오세아니아 지역 8개 대학(베트남의 하노이대 및 호치민대, 태국의 출라롱콘대 및 부라파대, 말레이시아의 말라야대,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국립대, 한국의 서울대,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대)이 참여하는 '동남아시아 한국학회'의 창립회의다.
이 두가지 주제에 따라 각국의 문화산업 현황과 한류를 바라보는 동남아인들의 생각, 그리고 각국의 한국학 발전상황과 관련된 문제, 향후 과제들이 터져나왔다. 특히 말레이시아 말라야 대학의 하미드 하디 부총장은 "지난해에는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지만 동남아시아의 한국학은 아직 일본학·중국학의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동남아시아에서 한국학이 왜 필요한지, 한국학 연구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동남아 대학에서 한류를 타고 한국어 코스들이 속속 개설돼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과 이해를 도모할 한국학의 기반은 거의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에서는 현재 한국어 강좌가 개설된 8개 대학 중 정식으로 한국학과가 설치된 곳은 국립 하노이대와 호치민대, 2곳 뿐이다. 태국도 한국어 코스는 17개 대학에 있지만, 그 가운데 2곳만이 한국학 학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대에서 한국 관련 강좌는 86년부터 생겼지만 한국학과의 개설은 2006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호치민대에서 10년간 한국어를 가르쳐 온 조명숙 교수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건 역시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며 "이들은 한국과의 교류를 늘려 앞선 기술도 도입하고,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동아시아 학부를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전했다.
결국 동남아에서 한국학이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동력을 갖고 발전해 나가려면 ▲한국 정부의 지원 ▲현지 한국학 졸업생들의 취업기회 확대 ▲한국학 졸업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력 관리 ▲한국 대학과의 연계를 통한 연구진·학생 교환 ▲현지인의 한국유학 확대를 통한 교사, 연구진 확충 등이 시급하고도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동남아 학생들의 한국 공부, 대부분 한국기업 취직이 목적"**
동남아의 경우 대체적으로 교사가 되는 것보다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3~4배 가량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길이다. 이렇다 보니 개척단계인 한국학의 연구와 강의를 위해 헌신할 인력을 찾기 힘들고, 그러다 보니 연구실적은 쌓이지 않고 강의의 질도 정체돼 답보상태라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한국에 대한 문화적 욕구는 점점 높아져 가는데, 대학들이 자체 지원여력이 없다보니 이들 대학은 지금 목빼고 한국 정부의 지원만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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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은 매년 동남아시아의 한국학 지원에 20억 원 가량을 쓰고 있다. 함승훈 국제교류재단 과장은 "예산이 부족한 편이지만 지난 10년간 96명의 동남아시아 학생들이 한국연수 등의 혜택을 받았다"며 "이번 10월에는 효과적인 한국학 지원과 문화교류를 위한 사무실을 호치민 시에 오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문화교류센터 역시 한국인 강사 파견, 한국학·한국어 프로그램 지원을 맡고 있다. 국립국어원과 서울대 국어교육연구소, 베트남 호치민 사회과학대는 오랜 협력 끝에 지난 8월 베트남의 새로운 한국어 교과서인 <고급 한국어 회화>, <한국어의 이해 고급과정>을 선보이기도 했다.
뉴웨일스대의 신기현 교수는 "동남아에서 한국학이 발전하려면 한국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관심이 늘어야 한다"며 "한국사람들이 세계화돼야 한국학도 세계화된다. 가장 좋은 것은 중-고등학교 단계에서 한국과의 교환학생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류를 늘리는 것인데, 이런 면에서는 지나치게 서구-금발 편향인 한국부터 준비가 안 돼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우리부터 동남아시아의 자부심에 적절한 존중과 이해를 보내지 않을 경우 서로의 관계 발전은 요원할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도 동남아 현지에 대한 이해 높여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시장점유율과 자본을 놓고 경쟁을 하는 가운데 상품을 통해 유통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문화는 결국 '좋아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문화는 조용히 흐르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느끼는 공감과 기쁨의 지속 없이는 문화란 결코 계속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는 '한류 상품'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얘기다. 동남아 현지인들을 결코 한류의 수동적 소비자로만 바라보아선 안된다. '한류'의 원산지인 한국이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제 얼굴에 도취할 뿐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한류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인도네시아 광역멀티미디어연합회장인 조나단 파파락씨는 "언어장벽 때문인지 인도네시아에서 한류는 현재 교포사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즐기는 수준"이라며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에 대해 매우 근면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세련된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나라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특히 앞선 한국의 정보통신기술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매년 600여 개의 한국기업이 100억 달러씩 인도네시아에 투자하고 있고 관광, 한류 등으로 나날이 교류가 늘어가는 만큼 한국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그러나 문화는 쌍방향적인 것인만큼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늘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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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동남아시아의 '작은 형'이 돼버린 한국**
태국 부라파대의 타산니 탄타와닛 교수는 "2002년부터 태국에서는 드라마와 영화로 방영됐던 '겨울동화', '동감', '엽기적인 그녀', '늑대의 유혹', '옥탑방 고양이', '태극기' 같은 한국의 소설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며 "현재 이 붐은 주로 10대 소녀들이 이끌어가고 있지만 한국 드라마는 리얼리티와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조명으로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인기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안 두이 쿵 베트남 통상산업회의소 부소장은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800여 개가 넘는 한국기업은 3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며 "이러한 경제적 관계 외에도 드라마, 음악의 대중적 인기, 가족관계를 소중히 하고 제사를 꼭 지내는 같은 유교권 문화에서 오는 친근감 등으로 현재 한국은 베트남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언제나 서구의 '형'들만 뒤쫓던 한국은 어느새 동남아시아에서는 따라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작은 형'이 되어 있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위상만큼의 책임과 품위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그와 더불어 우리의 문화적 역량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한류'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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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아시아연구소(KAREC) 서중석 소장 인터뷰**
***"우리가 '문화 제국주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다"**
첫 창립회의를 치뤄낸 동남아시아 한국학회(KSASA, 회장 베트남 호치민사회과학인문대 응고 반 리 교수) 결성의 산파 역할을 해낸 한호아시아연구소(KAREC) 서중석 소장을 만났다.
그는 "한류는 그동안 세계인들의 인식 속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 고립됐던 한국에게 소중한 기회"라며 "이제는 한국에 대한 이같은 관심을 어떻게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정착시킬지 고민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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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연구소 창립 이래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에서 한국학 발전을 위해 뛰어온 지 5년이 됐다. 한국학 발전의 키포인트가 있다면.
"그동안 한국에서는 한국학, 한국어, 한류의 세계화 현상을 '주는 입장'에서만 바라봤다. '받는 사람'들의 입장은 어떻고 한국학이 어떻게 현지화(Localizaion)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현지화돼야 국제화된다. 현지화됐을 때도 가만히 두면 고립되니 지역 학자들의 연계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직 한국학의 기반이 안 잡혔기 때문에 개별 학자가 고립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고 대학 당국의 관심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개별 학자들보다는 대학의 정책 결정권자 간의 협력과 큰 틀 형성에 초점을 뒀다."
-말씀하신대로 한국학 전공자와 부총장 등 대학관계자뿐 아니라 동남아 각국의 문화사업 관련 정부 관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우리가 여기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문화제국주의를 하자고 모인 것도 아니고, 한국학 하면서도 늘 다른 학문과 연계되어야 하고 각 나라의 연구발전이 이뤄져야 한국학의 저변도 넓어지기 때문에 현지에서 한국학의 기반이 견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안목으로 봐야 한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세계화를 추구하며 동시에 현지 국가의 기업풍토에 적응하는 경영방식을 가리키는 표현. 소니 회장인 모리타 아키오가 1992년 만들어낸 신조어)이 한국학 발전의 핵심이라고 지적하셨다. 그에 따른 어려운 점은 없었나?
"사실 한국학은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학과 중국학 사이에 끼어서 고립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 대학의 관계자를 만나 왜 한국학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설명하며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해나가기 위한 신뢰를 얻어내는 게 지난 5년간 가장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회의에 각 대학 부총장들이 모여서 한국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학회도 결성되고 '돌아서서 나는 관심없다'라고 할 수 없는 틀이 만들어진 만큼 2단계 목표는 차곡차곡 그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대학들은 한국학 자체보다 그를 통한 지원에 더 관심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점에서 갈등은 없나?
"여기도 나라 사이에 갈등이 없진 않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신뢰와 애정을 쌓아 왔기 때문에 설사 갈등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번 회의 유치만 해도 말레이시아의 말라야 대학, 태국의 부라파 대학, 호치민 사회과학대가 경합을 벌였는데, 서로 경쟁하면서도 호치민이 강하게 나서자, 말라야 대학은 100주년 기념행사였음에도 양보했다. 이런 신뢰가 깨지지 않도록 계속 공을 들여야 한다.
일본의 경우는 지원해주고도 마음을 못 얻는 경우가 많았다. 건물 하나를 지어줘도 향후 유지비가 엄청 비싼 일본제품으로만 채워넣어야 하는 등의 방식이다 보니, 처음엔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가져가는 것이더라는 말들이 많다. 그러니 우리는 줄 때는 과감하게 주면서 보이지 않는 재산을 쌓아가야 한다. 사실 리더십과 존경은 희생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
-현지인 한국학 연구자-한국어 강사가 많이 부족하다고 하던데….
"한 사람의 한국학자가 만들어지기기까진 10년이 걸린다. 한국의 재정지원하는 분들이 동남아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인내심을 갖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으면 한다."
-동남아에서 한국학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경제력에 걸맞게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고 본다. 투자할 건 하고 공헌할 건 충분히 하면서 그에 걸맞는 대접도 받아야 한다. 일본은 꼭 하나를 주면 하나 이상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동남아에서 존경을 못 받는다.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과 중국에 대한 정치적 견제로 양국을 경계하는 동남아인들에게 한국은 '미들파워'로서 안심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관계를 구축할 여지는 크다."
-한국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태도에서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실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훨씬 잘 살았고, 6.25 때는 태국인들이 와서 싸워주기도 했다. 이제 우리가 좀 잘 산다고 해서 그들을 멸시하면 안된다. 이들은 문화적 전통이 상당히 깊은 나라들이다. 이들도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 인권 문제'가 종종 이슈가 된다는 걸 알고 있고 베트남만 해도 현지의 한국 기업들이 노동자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상황이 잘 알고 때문에 동남아시아를 하대하는 한국의 분위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갖고 그들을 알아야 우리도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학을 국제화하자면 한국인도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로 국제화돼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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