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파는 국무총리를 만나 담판하기로 했다. 당시 총리는 장면으로 내각책임제 헌법 아래서 국정최고책임자다. 그러나 면담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성사될 리 없었다. 총리 비서실은 그만큼 벽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집권한 지 얼마 안 된 장면 정부가 군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무리였다.
영관장교들 장면 총리에 '국방장관 임명에 고려사항'
5.16은 전형적인 군사반란…민간정부 간섭하다 전복시켜
면담을 관철시키지 못한 정군파는 장면 총리실에 '국방부장관 임명에 있어서 고려사항'이라는 건의서를 보낸다. 영관 장교들이 국정 최고책임자에게 국방장관의 임명 조건을 요구한 것이다. 장면 총리는 민주당내 신파와 구파의 협상에 따라 신파인 현석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정군파의 요구를 반영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정군파는 또 국방장관실에 '육군참모총장의 임명 기준에 관한 의견서'를 전달했다. 이는 군 장교들이 이미 정치에 깊이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군내에 암적인 정치장교 그룹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했다.
정치장교 집단이 아직 직접 정부를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압박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정치학적으로 집정관적 조정형 군(praetorian moderators)이라 일컬어지는 일종의 군사반란 초기단계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 군은 민간 정부에 각료의 해임이나 주요 정책의 수정 등을 요구한다.
정치장교 집단은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으면 2단계로 돌입, 민간인 정부를 타도하고 직접 정부를 통제하거나 아예 정권 찬탈에 나선다. 이것이 집정관적 지배형 군(praetorian rulers)이며 후진국의 군사쿠데타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반란군은 부정부패 일소와 사회질서 확립, 또는 정치사회적 변화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게 통례다. 5.16은 정군운동파 정치장교들이 두 가지 단계를 차례로 거치는 전형적인 군사반란이었다.
장면 정부는 곧 군부 인사에 착수하여 최영희를 합참의장으로 전보하고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 중장을 임명했다. 최경록은 충북 음성 태생으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 해방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헌병사령관과 육사교장을 거쳐 미 참모대학에 유학했다.
울분의 박정희, 장면 정부아래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발탁돼
4.19혁명 열기 속에 최경록 육참총장은 군내 정화운동 지지
최경록은 육참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군내 부정부패자는 제거돼야 하며 정군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그는 1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해 울분을 삭히고 있던 박정희를 육군본부 핵심요직인 작전참모부장으로 기용한다. 박정희의 상습적 쿠데타 발언을 감안하면 군 병력의 훈련동원과 배치를 담당임무로 하는 작전참모부장 자리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정군파는 당연히 사기가 충천했다. 4.19혁명의 덕을 본 셈이었다.
한편 합참의장에 취임한 최영희는 미 국방부 군원국장 파머 대장을 초청한다. 최영희와 접촉하고 한국을 떠나면서 파머는 김포공항에서 최영희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젊은 장교들의 정군운동에 결단코 반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자 정군파의 중심부 격이 된 육군본부가 크게 반발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 최경록이 파머 대장에게 내정간섭이라고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와 육사8기 정군파는 최경록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머와 함께 매그루더 주한미국 대사까지 가세해 최경록에 대한 반박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한미 양국의 고위당국자 간에 성명전이 벌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군 안팎과 국민감정은 미국을 성명전에 끌어들인 최영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육사7,8,9기 중령 16인 합참의장에 집단 하극상 행동
정군파 김종필 석정선과 합참의장도 예편, 육참총장 좌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군파는 최영희를 공격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8기 정군파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를 중심으로 육사 7,8,9기 출신 영관장교 16명의 대표단을 구성했다. 16명의 중령들은 합참의장 최영희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각하, 파마 대장과 공동성명을 내어 군내 정화운동에 반대한 경위를 밝혀 주십시오."
"미국 장성의 내정간섭을 자초한 일에 책임지셔야 합니다. 합참의장직을 사퇴하십시오."
16인 정군파는 격하게 항의했다. 이에 최영희도 강경 대응했다.
"뭐라고? 너희들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이건 분명 하극상이야. 어이 부관! 헌병 불러."
결국 헌병대가 출동했고 이들은 모두 군 영창에 구속된 채 징계위원회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과 석정선이 옷을 벗어야 했다. 나중에 김종필은 5.16 군사반란이 성공한 뒤 대령으로 군에 복귀했다가 준장으로 장군이 되어 예편한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그때까지 정군운동을 지지했던 육참총장 최경록도 돌연 반대로 돌아섰다. 정치장교 집단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점점 더 격화돼 가는 정군운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극상으로 치달은 정군파 장교들에 대한 처벌로 군 수뇌가 무탈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4.19혁명 정국인지라 역시 여론이 중요했으며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한 당사자가 된 합참의장 최영희는 옷을 벗었고 또한 정군파의 배후인물인 박정희도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박정희가 옷을 벗어야 할 상황에 2군사령관 장도영은 최경록에게 공석인 2군 부사령관으로 박정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박정희에게 장도영은 또 한번의 은덕을 베푼 셈이었다. 다른 한편 3.15부정선거 때 2군사령관인 장도영으로서는 부대 내의 부정투표에 대해 책임추궁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심적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도 부인들끼리 대학 선후배로 긴밀한 사이였다. 장도영은 4.19 혁명 후 자진해서 사표를 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반려됐다. 장도영으로서는 그런 전후사정 때문에 군내서 4.19혁명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는 정군파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전에도 자신이 은덕을 베푼 적이 있는 정군파의 보스 박정희를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2군사령부에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1기 선배며 절친한 동지인 이주일이 참모장으로 부대를 장악하고 있어서 좋은 여건이 됐다.
8기생 9명 첫 군사반란 시동 '충무장 결의'
종전의 호소 방식 버리고 정권찬탈로 방향전환
16인 하극상 사건은 사법처리로 외관상 일단락된 듯 했지만 사실은 암적 정치장교들의 불만요인이 더욱 강렬하게 내연하고 있었다. 1960년 9월10일 육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근무하는 8기생 정군파 9명이 서울 퇴계로의 충무장이란 일식집에서 다시 회동했다. 이들은 정군운동의 방법을 논의하고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종전처럼 건의문이나 호소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기로 결의한다. 이것이 '충무장 결의'로 5.16 군사반란의 첫 결의였다.
이들은 군사반란을 결행하기 위해 업무분담까지 마무리했다.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정문순 ⧍인사: 오치성 ⧍경제: 김동환 ⧍사법: 길재호 ⧍작전: 옥창호 신윤창
이들은 충무장 결의 후 두 달이 지난 11월6일 서울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에서 2차 모임을 갖는다. 이때부터 다음해 5.16 군사반란이 행동에 옮겨지기까지 이들은 전군에서 은밀하게 동지규합에 나선다. 장성급은 박정희가 맡았고 영관급을 8기 그룹이 친소관계에 따라 포섭해 나갔다.
장성급을 대상으로 한 박정희의 포섭 계획은 몇 개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째,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선후배 인맥으로 선배인 1기 출신 박임항 군단장과 김동하 전 해병대사령관, 그리고 2군사령부 참모장 이주일이 동참을 약속했다. 박임항은 함남 홍원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육사에 편입했으며 해방후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육군 대좌까지 올랐으나 6.25전쟁 때 월남했다. 사단장과 육본 인사국장, 국방대학 총장, 군단장을 지낸 군 고위인사였다.
후배인 3기 출신 김윤근 해병여단장도 가담했다. 특히 해병대는 4.19혁명 후 육군과 별도로 자체 정화운동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향력 있는 수뇌부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여서 5.16 모의에 포섭되고 만다.
둘째, 박정희가 육본 작전참모부장 재직 때 부하였던 작전처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 논산훈련소장 최홍희 준장이 합류했다.
박정희 육사 제1중대장으로 지도한 5기출신 다수 포섭
채명신은 '개선장군' 이미지 때문에 실세들이 견제
▲ 5.16 주체세력 중 육사8기 출신과 권력투쟁을 벌인 육사5기의 중심인물인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1963년 봄 박정희와 걸으면서 정세 보고를 하고 있다. 김재춘은 63년2월부터 7월까지 불과 6개월간 중정부장에 재직했으며 그 후임은 8기 친김종필계인 김형욱이 임명돼 69년 10월까지 무려 6년2개월의 최장수 중정부장을 지냈다. |
셋째, 박정희가 육사 생도대 1중대장 재직 때 생도였던 5기 출신 다수가 포섭됐다. 5사단장 채명신 준장(육사5기)과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후에 중앙정보부장), 공수특전단장 박치옥 대령,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이 그들이다. 6관구사령부는 서울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의 지휘본부로 안성마춤이었으며 그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을 육사8기 동기생들이 포섭했다.
6군단에는 또 8기 출신 홍종철이 작전참모로, 충무장 결의 때 작전 담당인 신윤창과 새로이 가담한 구자춘 중령이 포병단 대대장으로 각각 보임돼 있었고 이들이 포병단장 문재준과 의기투합했다. 1군사령부에서도 8기 출신인 작전처 소속 중령들인 조창대, 엄병길, 심이섭이 가담했다.
육사5기 출신은 나중에 박정희와 주로 육본 정보국과 작전처에서 근무인연을 맺은 8기그룹과 권력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중 특히 채명신은 평양사범 출신으로 육사5기와 미 보병학교를 졸업한 후 5.16 당시 5사단장으로 1개연대 병력을 동원했다. 그는 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서 4대의혹 사건을 조사하면서 김종필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65년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하다가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이 됐으나 일종의 '개선장군'이미지로 국민적 인기가 높아지자 박정희와 김종필의 견제를 받는다. 채명신은 후방 2군사령관을 끝으로 중장에서 대장 진급도 못한 채 옷을 벗었다. 그는 예편한 후에도 국내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스웨덴, 스위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국으로 나돌아야 했다.
5.16 군사반란 세력은 민간인 후원자도 많이 모았다. 주요 민간인 협력자로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후에 한일은행장)이 자택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고, 역시 김종필의 먼 친척인 김용태(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원내총무)가 후원자로 나섰으며 인쇄소를 경영하던 이학수(후에 고려원양 회장)가 이주일과 동향이어서 홍보전단 등의 비밀 인쇄를 맡았다.
박정희는 군수기지사령관 재직 때 알게 된 부산 기업인 김지태에게도 거사 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지태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것이 악연이 돼서 5.16 후 그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고 만다. 김지태는 구속된 상태에서 지금의 정수장학재단으로 둔갑한 부일장학재단과 재산에 대한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재산 포기각서를 쓴 후에야 그는 석방된다. 이렇게 군사반란에 협력한 민간인들은 정계와 재계에서 약진한 반면 자금제공 등을 거부한 경우 재산을 강탈당하는 화를 겪어야 했다.
군사반란의 모의에서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은 육참총장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평북 용천 태생으로 일본 동양대학 재학 중 1944년 학병으로 입대했다. 45년 남경 일군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해방을 맞아 미군정 아래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창군에 참여했다. 1949년 육본 정보국장 재직 때 박정희가 그 부하로 인연을 맺었다. 사단장, 군단장, 2군사령관을 거쳐 장면 정부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여순반란사건으로 박정희가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장도영은 육본 정보국장으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다. 장도영은 정일권 백선엽 등 일본군 출신들과 함께 박정희 구명운동을 벌였고 박정희가 석방되자 문관 신분인 그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취직시킨 은인이었다.
4.19혁명 후 민주당 정부 아래서 육군참모총장에 기용돼 한창 절정기인 장도영이 모험적인 거사에 동참해 줄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군사정부의 최고지도자 자리라도 제의한다면 응할지, 그가 위험한 일에 몸 던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박정희는 5.16 한 달 여 전인 4월 초 장도영을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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