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작자를, 그것도 차승재처럼 돈 단위가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제작자와 친해지는 것은 5년 전만 해도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다. 그가 약간 `힘주어' 만든 영화 한 편 제작비면 너무 책을 많이 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결국 악명 높은 내 저서 숫자 모두를 출판하고도 남는다. 이제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돈은 약 1500 억 원. 그리고, 최근 그는 SK 텔레콤한테 자신의 영화사 싸이더스 지분 반을 주는 대신 280억을 투자 받았다. 영화 말고도, 그의 현재 재산이 최소 280억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빚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어구 무시라….한 번 실패하면 내 글쟁이 인생 전부가 망쪼 든다는 얘긴데, 그런 부담을, 단지 썰일 망정, 기꺼이 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나 혼자 좋아 환장하는 딴따라 후배들이 너무 많아, 여생이 모자랄 정도다. 그리고 그는 딱히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하니, 어떻게 내가 (감히)차승재와, 그것도 내가 선배고 그가 후배인 사이로, 몇 년 사이 친해졌는가를 밝히는 게 좋겠다. 참으로 가기가 뭐했지만 참으로 갈 밖에 없었던 베트남여행 일행 중 그가 끼어 있었다. 천운영과 김현영과 방현석(이상 소설가), 김지영과 신준봉(이상 당시 문학담당 기자), 그리고 강태형(문학동네 사장) 부부와 황석영(소설가) 부부 등과 함께였다. 부부와 합방은 물론 안되고, 처녀 작가 혹은 기자와 합방은 더더욱 안되지만, 그들을 빼고도 남자들이 꽤 되건만, `주최측`이 차승재와 나를 여행 내내 룸메이트로 정해버린 것은 아마도 체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꽤 살이 찌고 배가 볼록 나온 편이고, 그는 나를 1.5X1.5배로 확대한 형용 그대로다. 물론, 얼굴은 나보다 훨씬 미남인데다 더 믿음직스럽고, 풍채는 더 듬직하고, 나와 달리 `아름다운 권위`를 전체적으로 풍기기 때문에, 비만형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장 걸음 거구` 분위기가 그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나는(이란 말을 너무 써서 죄송. 이번 글에서는 계속 그럴 것 같아 미리 또 죄송.) 여행을 아주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야 여행이 해방이지만, 여행이 구속으로, 아니 감옥보다 더 깝깝한 구류로 느껴지므로, 런닝과 팬티 한 장과 책 한 권만 여행가방에 챙기고 호텔방에 들면 그날 빨아 그날 말리고, 그 동안 내내 발가벗고 지낸다. 그런데, 내가 빠니(?) 그도 빨고(그가 다른 여행 때도 그랬을 리는 없다), 내가 훌러덩 벗은 채 누우니 그도 훌러덩 벗은 채 눕고(그가 다른 여행 때도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황석영 표현대로 오소리와 곰 한 마리가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잎사귀(타월) 한 장으로 가운데만 가린 채 퍼져있는데, 그가 `형님.`하고 아주 무지근한 조폭 스타일로, 하지만 `아우야.`보다 더 근사하고 무지근한 발음으로 나를 호칭하더니, 그후로는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담배를 물면 라이타를 갖다 대는 것은 물론이고, 휴지를 뽑을라 치면 어찌 알고는 나보다 먼저 뽑아 나에게 내민다.
아, 이 사람, 정말 밑바닥부터 꼼꼼하게 기어서 올라왔구나….그도 나의 궂은 일 전공(사무국장 출신)을 눈치챘을까? 하지만 그날 밤 아차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또다른 면모에 놀라게 된다. 술을 조금 늦게까지 마시고, 그러니까 그보다 조금 늦게 방에 도착했는데, 방문은 당연히 잠겨있고, 아무리 두들겨도 그가 도무지 깨지를 않는다. 방 밖에 한참을 있다가 너무 지쳐 옆 방문을 두들겼더니, 천운영과 김현영이가, `여기서 주무시죠` 말은 그렇게 하는데, 그 어감이 마치 엄마가 어란애한테 `얘야 이리 온` 그러는 투라,(어구 무시라) 다시 나와 한참을 또 기다리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방에 몸져 누운 다음 날 빼고는 여행 내내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방문이 또 잠기면 정말 낭패 아닌가), 차승재 덕분에, 아니 때문에, 손 하나 까딱 않고 돌아다닐 수 있었고, 그게 전혀 낯설지 않을 즈음, 그러니까 단 며칠 만에 `후배`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 참….뭔가에 얽혀 들었는데, 아주 기분 좋게 얽혀 들었고, 얽혀듦이 내내 기분 좋을 거라는, 정말 기분 좋은 예감…..
그리고 차승재를 만날 때마다, 아니 생각할 때 마다, 나는 옛날에 영화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빠삐용>을, 진지하게는 아니고, 작은 윈도우를 따로 내서 `리핏`으로 나오게 하고 나는 내 글을 쓰며 곁눈질로 보는데, 그렇게 수 십 번을 보니 영화만, 배우와 풍경만 보이는 게 아니라, 화면 뒤에서 레일 따라 촬영기를 굴리고 돌리는 기사들, 확성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감독, 그리고 컷 사인을 주는 스텝 등 온갖 `뒷패`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차승재도 그렇다. 촬영은 물론 제작 과정에 대해서도 말하는 적이 거의 없지만, 둘이 만나면, 간간히 굵직한 목소리로 형님, 형님, 하며 안부를 묻고, 내색 않는 걱정을 풍기며 술을 권하고,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받고 그러지만, 그렇게 각자 장르보다 술이 위주지만(자랑인지 쪽 팔리는 얘긴지 모르지만, 그는 심심하면 내 이름으로 양주를 사놓고 간다. 그것 참….)`차승재`란 이름은 내게 늘 `기획으로서 제작` 뿐 아니라 ``중노동으로서 영화`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수 십 억 혹은 수 백 억을 주므르고 휘두르면서도 밑바닥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한 경지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도 그렇다. <살인의 추억>은 여러 면에서 뛰어나지만, 내게 특히 인상적인 것은 거의 첫 부분인 `범행 현장 조사 장면`, 특히 송강호가 설치는 장면을 마치 영화 스텝들이 촬영 준비하느라 설치는 장면처럼 구성하면서,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베르크 <바이올린협주곡>은 자신이 사랑했던 스승 부인의,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이지만,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나와 연주를 시작하기 전 각 단원들이 각 악기를 조율하는, 그 불협화 대목 자체를 서두부로 삼으면서, 순식간에 시간을 장악한다. 어쨌거나, 그러므로, 차승재에게 자본과 미학의 전쟁터를 맡기면서(왜냐면 그는, 본인 표현대로, 예술가라기 보다는 자본과 미학의 관계를 최적화하는, 디아길레프를 닮은, 물주 기획자고, 자본 없는 영화는 불가능하며, 자본만 아는 영화제작자는 이 글의 대상이 아니다), 이수명의 시 <케잌>을 읽어주어도 되겠다. 이수명의 시는 논리가 논리를 뒤엎는, 혹은 배반하는 과정 자체를 시화하지만, <케이크>는 더 나아가 전쟁의 파괴성을 뒤엎는 과정을 시화하고, 시화의 경로 혹은 `자본과 미학의 전쟁`을 드러내는 상상력의 방식이 영화(제작)적이므로 현실적이다. 전문이다.
커다란 케익을 놓고
우리 모두 빙 둘러 앉았다
누군가 폭탄으로 된 초를 꽂았다.
케익이 폭발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뿌연 먼지 기둥으로 피어 오르는 폭발물을
잘라서 먹었다
차승재 전사(前史)는 온통 조숙한 책읽기다. 영화계에 입문할 생각은 영화 입문 전까지 전혀 없었다. 전혀 없었다는 것 말고는 별 것이 없다. 산동네 살며 만화가게에서 한글을 깨쳤고, 엄마를 팔아 3-4개월 동안 주전부리까지 섞어 외상을 하다가 엄마 한테 방비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읽은 만화도 믿기지 않을 만큼 조숙한 내용이었지만, 3, 4학년 때 어린이도서관 책을 거의 다 뗐고 국민학교 5, 6학년 때 친구 큰 형한테 을유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을 빌려 보카치오 <데카메론>부터 (그레엄)그린 소설까지 읽었고, 사춘기가 빨리 왔고, 중학교 들어가면서 `폼나는 책`을 선호, 김수영, 강은교 시집 등을 끼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 이청준 소설을 보고, 공부는 안하고, 술과 담배를 했으며 고등학교 후반부터는 연극에 미쳤다.. 창작의 재주는 없었다…얼핏 들으면 어린 나이부터 독서를 하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는가 하는 경험담 같지만, `이야기`를 쫓아 다닌 이력이 그의 인생을 영화로 이끌었고 그는 서사구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영화제작자로 컸다(문학, 특히 소설에 젖줄을 대고 있는 게 영화지만, 소설의 서사 구조가 다소 연대기적인 반면 영화는 대략 1막 25%, 2막 50%, 3막 25%의 3막 구조며, 1막이 꼭 연대기 풍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저런 제작자가 있으니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영화예술가 최민은 차승재를 그렇게 평했다.. <돈을 갖고 튀어라>로 영화제작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비트>(는 내가 좋아하는 후배 심산이 시나리오를 썼다. 대견.), <8월의 크리스마스> 등 출세작, <봄날은 간다>, <화산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 <살인의 추억>, <싱글즈>, <말죽거리 잔혹사> 등 흥행작, <모텔 선인장>, <플란다스의 개>, <정글쥬스> <지구를 지켜라>, <슈퍼스타 김사용>, <범죄의 재구성> 등 화제작, <태양은 없다>(이것도 심산 작품이다. 흐뭇.), <행복한 장의사>, <킬리만자로>,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썸머타임>, <인디언 썸머>,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 징검다리 혹은 살림밑천작, <무사>(이것도 심산이 썼다구? 이건 재미 못 본 작품 아닌가? 저런…뭐, 자세히 물으니 국내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해외수출로 10억 벌었단다. 심산도, 시인이자 소설가인 것은 잘 알려져 잇지 않지만, <시나리오 작법>이 베스트셀러라니, 다행이다), <역도산>, <남극일기> 등 대작에서 최근의 제목부터 꽤나 상큼한 맛을 풍기는 <연애의 목적>과 꽤나 엉뚱한 <천군>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라피는 다양하고 화려하지만 흥행실패작이 있을 뿐 작품 실패작은 없고, 걸작 혹은 자본주의 예술작이 있을 뿐 순수예술작은 없다. 그런데, 그의 영화 입문 직전 및 직후 이력을 보면, 모든 것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대 프랑스어교육과를 나오고 어학 연수도 다녀와 불어 실력이 어지간했던 탓에 금호상사(현재 금호타이어) 무역 직원으로 취직이 되었으나 입사 전인데, 그 회사 과장이던 외대 영어과 출신 선배가 마포 뒤 돼지갈비집으로 부르더니 돼지갈비를 구으며 하는 소리가 이랬다. 난 부장을 못 달 것 같아. 부장까지는 달아야 하는데….쇼크를 먹었다. 월급을 얼마나 주느냐 물었더니 38만 8천원. 당시 삼성 초봉이 42만원 정도였으니 적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 정도 월급을 한 10년 받다가 부장도 못하고 그만두는 게 직장이라니. 차라리 젊어 고생하고 젊어 헤딩해보자…어머니한테 `장가 가면 전세 얻을 돈` 2천 만원을 미리 받고 일수 2천 만원을 따로 내어 방배동에 까페를 차렸는데 대박이 니서 26살 나이에 한 달 4백-8백을 1년 반 동안 벌면서 도박에도 빠지고 물장사 주제에 비싼 룸쌀롱도 들락거렸다. 대학교 때 학과도 다르고 학번도 위지만 진하게 술 먹다 친해진 김태균(<화산고>와 <박봉곤 가출 사건> 감독)이 같은 영화아카데미 학생 이현승(감독), 김형구(카메라멘) 등과 함께 외상술을 마시며 까페에서 개기고 노는 지라, 영화한다는 애들이 신기해서 `들여다` 보곤 했다. 그런데, 사귀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려니까 여자 쪽 집에서 `물장사한테는 딸 못 준다` 그러는 거라, 당장 때려 치우고 옷장사로 나섰다. 4년 반 동안, 30살까지 한 옷장사도 잘 되어, 쓰고 놀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서도 가게를 처분하니 2억 2천 만원이 남았다. 옷 원가를 잘 알기 때문에 지금도 비싼 옷은 안 입고, 복장이 늘 불량하지만….
그가 잘 나가던 옷장사를 그만 둔 것은 `영화한다는 애들`을 객꾼으로 들여다 보는 게 지겨워 모처럼 직접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는 운좋게 자본주의를 어르고 뺨치고 농탈질한 후 영화계에 입문한 것일까? 천만에. 자본주의가 그리 허술할 리 없고, 그랬다면, `영화제작자` 차승재가 나올 수 없다. 복수인지 은혜를 베푼 건지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뺨을 느닷없이, 난데없이, 호되게 친다. 20억짜리 땅 10%를 2억에 샀는데, 실제 시세가 형편없는 땅이었던 것. 천 평에 이르는 그 땅의 현재 시가는 4천 만 원. 그가 원형 탈모증을 앓을 정도로 골치를 썩였던 그 땅을 그가 아직도 팔지 않은 것은 경계를 삼기 위해서다. 그렇다. 그는 자영업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누리고 겪고 배웠다. 그리고, `준비된` 그를 알아 보듯, 아니 그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영화가 왔다. 충격을 벗지 못한 채 방 세 칸 짜리 집에서 영화 하는 애들 8명과 함께 살며 밥이나 해주고 있는데(그의 음식 솜씨는 까페 경력 이상이다), 친구들이 그런다. 야, 너도 들은 풍월 3-4년인데, 영화를 해보지….돈도 없는데 무슨 영화를?....돈 갖고 하라는 게 아니라 우선 제작보로 시작을 하면….오랜 친구 김태균이 역시 그를 챙긴다. 너 서당개 3년인데 라면 하나 못 끓이겠나? 제작보 말고 아예 제작부장부터 시작해봐….이때 그는 세상의 직업을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꼴등, 제일 나쁜 직업은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 거, 삼등,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이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 것, 일등은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그의 자본주의 직업 분류는 얼핏 1)냉장고를 연다 2)코끼리를 집어 넣는다 3)냉장고문을 닫는다 식 비슷하지만, 그는 이등을 택했다. 일단 영화 쪽에 친구들이 많고, 삼겹살 사주고, 시나리오 지망생 여관비 대주고, 겨울 촬영장에 싸구려 보세 오리털 파카라도 와장창 나눠주고, 인덕을 쌓은 동네는 그곳 뿐이었다. 단신 월남한 아버님이 92년도 돌아가셨을 때 온 위문객 400명 중 3백 몇 십 명이 영화판 사람들인데다 영화평론가 박평식 형은 사흘 밤낮을 한 잠도 안 주무시고 빈소를 지키시더라 서른 두 세 살 내 삶의 뿌리가 거기 있었다. 그것이 좋아서라도 영화를 해야겠다….그리고, 그의 분류법은 무엇보다 그에게, 적확했고, 그가 일등이 되는데 결정적이었다. 높은 목표를 잡으면 너무 힘들다. 힘들면 고민하고, 고민되면 같이 고민하는 놈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그러면 고민만 심화하고 혼돈이 온다. 고민할 동안 책 한 줄이라도 더 보고, 왔다 갔다 걸어 다니는 게 몸에도 좋다. 열반에서 일등하고 우반 꼴등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몸이라. 그가 처음 맡은 제작부장은 그의 표현대로, `최소 3명, 많게는 10명까지 상대할 수 있는` 충무로 깡패들이 맡았던 직업이다. 91년 <걸어서 하늘까지>로 제작부장 일을 시작했는데, 선배 제작부장들이 우루루 구경을 나왔다. 어떤 미친 놈이 대학 나와 제작부장을 한다냐…
하지만, 이번에는 자본주의가, `육체적` 이유로 그를 돕는다. 비디오플레이어와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는 삼성, 현대, 대우, 선경 등 대기업들이 비디오 보급용 콘텐츠를 찾다가 나이 든 충무로제작자들에게 많이 당하고는 서울대 출신 젊은 영화인 신철과 유인택을 선택, 자본을 대주며 영화제작을 의뢰하여 영화제작회사 `신씨네`와 `기획시대`가 출범케 되는데 이 두 사람이 완성된 영화의 홍보는 잘 알지만 제작 현장을 몰라 대학출신 경험자를 찾으니 그 밖에 없고, 그는 곧 `신씨네`로 스카우트되어 <미스터 맘마> 제작일을 하다가 `프로듀서`라는 게 있다는 것을 신철에게 배우고는 친구를 통해 받은 일본 히트드라마 <백 한 번 째 프로포즈>를 기획-프로듀싱했으나 자기 친구를 신인감독으로 데뷔시키겠다고 고집, 벌이가 예상보다 크지 않자 쫓겨난다. 그 후 그는 안동주의 `영화세상`에서 양귀자 원작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기획한 후 유인택의 부름을 받는다. `통장에 백 오십 만원 있는데, 프로듀서가 필요하다`는 유인택이 만들려는 영화는 장정일 원작 <너에게 나를 보낸다>였고 `책이 괜찮은데. 너무 야해서. 너무 야하면 관객들이 쪽 팔려 하니까, 먹물 감독(장선우)과 먹물 배우(문성근)를 쓰면, 그리고 섹스 코드에 정치 코드를 입히면 평단 반응도 좋을 거고, 관객들도 쪽 팔린다 생각하지 않고 많이 들거고` 운운의 그의 기획안은 영화 <너에게…>를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랭킹에 올렸고, `돈 없으면 니 차 팔아서 쓰`라고 뻗댔던 유인택은 수입 4억 중 5천 만원을 떼어 그에게 주었고(당시 프로듀서 수당은 약 2천 만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유인택이 연극 밖에 모르는데 차승재라는 똘망똘망한 놈이 기획을 잘 했더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냈다.(물론 그가 낸 것은 아니다)그리고, 독립할 기회가 왔다. 영화사업에서 대우전자에 밀린 삼성이 `이미 대성할 싹을 보였던` 심재명(`명필름` 대표)과 `충무로 제작부장 출신` 차승재였던 것. 싸이더스 전신 우노필름이 그렇게 세워졌는데, 유인택이 준 돈으로 사무실을 차리고 남은 돈으로 시나리오를 청탁, 처음 제작한 영화가 <돈을 갖고 튀어라>였다. 유인택, 그리고 당시 최고 배우였으나 흔쾌히 첫 작품에 출연해준 배우 박중훈이 오늘날 싸이더스의 두 기둥 뿌리다. ….
자신의 복잡하고 화려한, 그리고 대체로 성공적인 필모그라피에 대해 차승재는 덤덤하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DVD가 집에 하나도 없고 회사에는 그가 만든 영화 포스터 한 장 없다) 정선경이 나미 노래 `슬픈 이별`을 객석 텅 빈 무대 위에서 부르는 대목이 감동적이건만(이 감동은 영화 <가문의 영광>과 TV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반복된다), 그가 보기에 `전체적으로 그 구조가 되게 산만한 영화`고(이 영화는 흥행이 잘 나가다가 삼성이 500 만 불에 수입한 영화 <컷 슬로트 아일랜드>한테 극장을 내주어 `컷 슬로트한테 컷 당했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플란다스의 개>는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차승재가 싸이더스 연출부로 데려와 특별 관리를 하던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이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시나리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 관객 정서에 안 맞는 `먹물 코메디'라 틀림없이 망한다고 했으나 봉준호가 하도 우기므로 `망하나 안 망하나 보자`며 제작, 망한다는 걸 증명해주었고(전국 관객 5만 2천 명),, 평론가들 평가는 좋았고, 봉준호의 만화적 상상력은 기발하지만 극장 가면 또 깨질 것 같아 몇 차례 말렸고, 봉준호는 디테일이 좋은데(그래서 봉준호 별명이 봉테일이다), 관객은 디테일을 너무 깊이 파고 들면 안 좋아하잖니, 좀 굵은 이야기감을 가져와보라 하니까 봉준호가 가져온 것이 연극 `날 보러 와요` 대본이었고, 대본 판권을 지닌 김광림(연극연출가)에게 `흥행이 잘 되면 관객 백 만 명 당 천 난 원`을 주기로 하고 만든 것이 <살인의 추억>이고, 김광림한테 7천 만 원 정도가 갔으니 `어쨌든 모두 해피한` 영화였고, 흥행 실패 소문이 왁짜했던 <남극일기>는 원래 차승재가 기획한 것이 아닌데 송강호와 유지태라는 최고급 배우들을 캐스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획사에서 퇴짜를 맞고 감독 임필성이 봉준호 바로 밑 후배라 봉준호 압력에 시달리다 맡았고, 주제는 상당히 맘에 드는 영화고, 제작을 맡았단들 출연자 여섯 명에 자연 배경이 아무 것도 없고 텐트와 통나무집만 나오는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 고쳐보려 했고, 예산도 40억 정도 잡고, 15억에 일본 판권을 주었으니, 국내에서 25억만 카바하자고 한 건데, 해외 로케를 간 뉴질랜드에 역사상 제일 적은 눈이 내려 숙박비로만 20억이 더 들게 된 것이고, 신인감독이라 실수도 있었고, 하지만 임필성 감독을 길게 보고 싶고, <살인의 추억> 못지 않은 작품을 만들 친구라 생각하고, <천군>도 우리 회사 기획은 아니고, 뭐 그런 식이다. 하긴. 그런 덤덤한 배짱 없이 어떻게 몇 십 몇 백 억 짜리 승부를 자본주의와 아름다움의 전쟁에 걸겠는가. 그는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하므로, 성공과 실패에 대해 담담할 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말할 때 그처럼, 거의 여성적일 정도로 영화 순정적인 사람도 없다. 최근 <씨네21>에서 독자들한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베스트 5`를 물었는데 1등 <봄날은 간다>, 3등 <결혼은 미친 짓이다>, 그리고 5등 <처년들의 저녁 식사>등 싸이더스 작품이 세 개나 들었고, 요즘 개봉 중인, 흥행이 꽤 괜찮은 <연애의 목적>도 앞으로 들게 될 것이라면서, 차승재가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제작한 영화 중 허준호 감독 영화 <봄날은 간다>를 제일 좋아한다. 특히 이영애가 연기하는 은수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유지태가 연기하는 상호보다 훨씬 살아 있고, 은수 역을 보면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다시 반추하게 된다. 가끔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이만교 원작의 유하 감독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도 상당히 좋아한다. 기성의 결혼제도에 대해 발칙한, 발칙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적이지만 가슴 속에만 있을 뿐 저지르질 못하는 그런 생각들을 영화로 펼쳐 놓은 것이다. 사회와 접점이 있는, 인간 삶과 접점이 있는 그런 영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명랑 소설 <삼오식당>을 굉장히 좋게 봤고, 그런 분위기로 영화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본 적이 없다. 먼 훗날 사람들이 들쳐볼 자신의 영화가 여전히 은은한 감동을 주기를 바랄 뿐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당대 시인` 유하가 영화감독으로 전업(?)한 후 만든 첫 작품 반응이 신통찮아 하릴없게 되자 친구 차승재가 살림에도 보탤 겸 시나리오 작업을 맡겼다가 작업을 마친 유하가 `나 이제 감독 하기는 틀린 것 같지?`라고 자못 침통한 어조로 묻자 눈 딱 감고 감독까지 맡긴 작품인데, 꽤 잘 만들었고, 이 작품으로 완전 재기한 유하는 곧 <말죽거리잔혹사>로 차승재한테 떼돈을 벌어주게 된다. 내게 형님, 형님, 하지만, 그 말투에 묻어 나는 `아름다운 권위`는 아무래도 그가 친구들, 무엇보다 영화하는 후배들에게 베푸는 인덕에서 비롯된 것 같다. 물론이다. 그러므로, 차승재와 나 사이를 무턱대고 끼어 들다가 차승재에게 한 소리 들은, 훗날 수작 <범죄의 재구성>을 연출하게되는 최동훈 감독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민망한 사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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