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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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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올까요?"

김민웅의 세상읽기 <98>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차마 붙잡지 못하고 이별해야 하는 이의 심정에 깊게 흐르는 눈물이 그만 꽃이 되어, 님 가시는 길에 붉은 색 양탄자처럼 펼쳐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요 <아리랑>은 자기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고 했지만, 김소월에 이르면 그 걸음걸음에 도리어 자신이 즈려밟혀도 괜찮다는 달관의 지경에 도달합니다. 물론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달관이 아니라, 자신이 님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입증하는 치열함의 반어법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꽃길을 깔아주는 이가 있다면, 매정하게 돌아섰던 님의 마음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를 버리고 가는 님에게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따다 줄 만큼의 너그러움은 아무리 찾아봐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님이 돌아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돌아선 것인지 자꾸 헷갈려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는 너 없으면 내 어찌 사누 하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도 부둥켜 안고 입 맞추던 그 '너'가 이젠 그만 역겨워졌는지, 돌아선 지 오래입니다. 서민을 위한 정권, 그래서 특권적 현실을 혁파하는 개혁정치가 그 화두였던 시작은 지금 종적을 찾을 길 없고 회장님 딸과 홍대 앞에서 연애를 하는 건지, 아니면 오랜 지병인 지역주의를 치료하기 위해 영ㆍ호남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에 바빠 그런지 우리를 좀체 만나러 와주지를 않으십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이제 오시나 저제 오시나 했는데, 영영 아니 오시는 모양입니다. 아마 기다린 것이 어리석은 우리의 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부담만 드린 것 같습니다. 아 아 그러나 대체, 이 나라 지도층이라고 하는 특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가시는 걸음걸음이 그야말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저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올까 깊이 고려 중인데, 님이시여, 어찌 생각하시옵는지요?

<한겨레 21> 이번 호에 이런 글이 실렸더군요. 제목은 "이건희 회장님 자진출두?"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시 한 수가 능청스럽게 걸려 있었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원문을 베끼다가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무슨 저의가 꼭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 듯하고, 아무래도 실수를 한 모양인가 봅니다. 아무튼 내용은 이러합니다.

"님은 걸렸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딱 걸렸습니다/싹수 노란 도청 테이프를 차마 떨치지 못하고 걸렸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통신 보안은 한줌의 도청에 날아갔습니다/정치권과 언론은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만날 때에 미리 비리가 생길 것을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폭로는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비리를 염려하는 것과 같이/걸렸을 때 철저한 수사를 해드릴 것을 믿습니다/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대검찰청 포토라인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아아, 님은 걸렸지마는 수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원문에서 많이 이탈되기는 했지만, 요사이 시를 쓰려면 똑 이렇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증시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지만, 현실의 서민들에게는 어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권력을 잡는 일이 도적질 하는 일과 닮아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약탈의 전리품을 동굴에서 서로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나누는 일이 된다면, 마음 애써 다스리며 님을 위해 꽃 꺾어 바치려던 손이 영변으로 가던 길에 기어이 무엇을 집어 들게 될 것인지 누가 과연 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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