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단 한번도 없다. 그러나 계속 전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광복 60주년 8.15 기념식에서 건국훈장을 추서받을 예정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산(1905-38,본명 장지락)은 엄혹했던 1970~80년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준 장본인이었다. 1941년 간행돼 그를 세상에 알린 소설 '아리랑(Song of Ariran)' 역시 김산이라는 존재가 당시 중국혁명의 한 가운데서 현장을 지켰던 당찬 미국의 여성 작가 님 웨일스의 가슴을 뛰게 만들지 않았다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1937년 당시 내로라하는 25명의 중국혁명가의 자서전을 쓴 님 웨일스는 김산과의 첫 대면에서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요구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 중 하나"라는 그의 말에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자살을 택하려는 민족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다"는 쌀쌀맞은 반응을 보인다.
***"미국이나 영국 지식인 중에 김산같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이에 "잘못 보셨다. 조선 사람은 결코 체념하거나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때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유순하지만 지독히 오랫동안 신음해 왔던 참을성 많은 사람이 터뜨리는 분노보다 더 큰 분노는 없다"고 단언하며 김산이 펼쳐 보이는 광대한 체험과 깊은 성찰에 곧바로 매료된다.
웨일스를 끌어당긴 건 나라 없이 유랑하는 조선인 혁명가였기에 견뎌야 했던 고통과 이로 인해 가능했던 혁명과 운동에 대한 '국외자'의 정직한 시선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의 지식인 중에 김산처럼 철학적 객관성을 갖고 자기의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자문했던 웨일스는 서구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조선인 혁명가의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뒤, 연안(延安)에 머물렀던 두 달간 그를 20여차례 만나 집중적인 대화를 나눈다.
"당신의 개략적인 경력과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 젊은 시절이요? 저는 이제 겨우 서른두 살밖에 안 됐지만 나는 내 젊음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답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웨일스는 그의 대답엔 어딘가 익살스런 구석이 있었다고 회고했지만, 당시 일본,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해야 했던 조선인 혁명가들의 삶은 비참했다. 광동, 상해, 북경, 연안 등 중국 각지의 격동하는 현장에서 수천 명의 조선 젊은이들이 "중국 혁명의 성공이 조국의 해방을 앞당기는 일"이라며 이름 없이 스러져갔다. 그러나 이들은 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다.
***'천국행 기차표' 품고 살아간 김산, 그러나 천국에도 '조국'은 없었다**
"내게 젊은 시절이 없었던 건 아마 조선이란 나라가 자기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쓸쓸히 읊조렸던 김산은 님 웨일스와 헤어진 이듬해인 1938년 결국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 혹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처형된다.
1983년 1월 중국공산당은 김산을 복권시키지만 정작 '천국'에서도 그에겐 여전히 조국이 없었다. 남쪽은 공산주의자라고, 북쪽은 연안파라고, 중국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에서 우연히 '아리랑'을 발견한 리영희 선생에 의해 반공이 제1국시였던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지식인들 사이에 조용히 돌려 읽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1984년 동녘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이 책은 그 후 20만부가 팔리며 꾸준히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일대기는 곧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김석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함께 3년째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 정지영 영화감독은 "우리의 역사는 패배했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 패배하진 않겠다는 그의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적어도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이라고 말한다.
***"조선사람은 극동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였다"**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5살 때 3.1운동의 실패를 목도하며 정치의식에 눈을 뜬 김산은 일본에 갔다가 이회영 등 민족주의자들이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다. 바로 상해로 건너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으며 테러와 무정부주의에 심취한 김산은 1922~24년도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김산이 "당시 테러리즘은 조선인의 항일투쟁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말한 대목은 이슬람 테러가 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상황에 비추어서도 경청해볼만하다.
"테러리즘은 대중활동을 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상존하는 억압, 좌절, 허무에 대한 강한 반발이다. 노예화된 민족만이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점잖은 조선사람들은 이같은 대담하고 희생적인 정신 때문에 극동 전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왜놈에 대한 테러행위가 필요하면 중국인은 대개 조선인중에서 지원자를 물색한다."
만주, 상해, 북경, 광동, 연안 등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국 혁명에 투신한 그가 30년과 33년 중국과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고문을 견디며 무혐의로 풀려나자 바로 동지들에게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일제 특무' 혐의를 받는 것은 김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는 자신을 험담하고 있는 동포 혁명가를 '죽이겠다'며 찾아갈 정도로 분노하지만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칼을 두고 방을 나온다. "내 분노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지독한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고 읊조리며.
***"수많은 '김산들'을 기억해야"**
이러한 고난과 시련은 그를 좀더 성숙한 혁명가로 만들었다. 그는 "살인, 자살, 절망의 시대는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주었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용을 가져다주었다"고 단언한다. 이제 모든 환상을 잃어버리고 학생도, 혁명적 낭만주의자도, 당의 관료도 아니었던 그는 지적으로도 훨씬 성숙해졌으며 "이제 어떤 것도 나의 신념을 흔들리게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지난달 30일 김산의 삶을 조명한 <KBS 스페셜>에 출연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당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김산과 같은 길을 걸어갔다"며 "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이름없이 역사 속에 묻혀간 수많은 '김산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10일은 김산의 탄생 100주년 되는 날이었다. 1939년 '아리랑'을 탈고하며 당시 님 웨일스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는 사람들의 정신이 시험받고 있는 시대다. 우리는 백년을 단 하룻만에 파악해야 하고 역사는 뇌세포의 진동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혼란과 공포로 현기증이 일 때면 나는 이따금씩 연안의 그 옹색한 방안에서 꾸밈없이 조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던 김산을 생각한다. 그는 환상도 없었지만 냉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패배주의라는 질병을 이겨낸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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