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7월 5일 오전, 육군방첩대 조사실.
군 수사관이 김식 대위(육사 11기, 후에 민정당 의원)를 상대로 '7.6 쿠데타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육군본부 주변에서도 그랬고 정규육사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명주체 중 부패자들을 체포해버리자는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는데?"
김식은 육본 군수참모부에 근무했다. 7.6음모에 대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조사지시를 받은 방첩대는 먼저 육군본부 소속 김식을 불렀다. 김식은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서울지회 연락책. 핵심주모자들은 모두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에 소속돼 있어 처음부터 이들을 건드리기엔 부담스러웠다. 또 방첩대로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정보보고를 한 것과 공화당 간부들이 수사를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방첩대장은 정승화 준장. 정승화는 5.16 당시 박정희가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의 작전참모였다가 쿠데타 후 육군 방첩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와 처음으로 얽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방첩대는 중정으로부터 정보보고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나섰다.
방첩대 수사관 앞에서 김식은 동기생들 간에 오간 얘기들을 대충 털어놓았다.
"젊은 장교로서 시국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지요.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군사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른바 5.16쿠데타 주체세력의 권력갈등과 부패상은 심각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여론도 들끓었다. 특히 김종필과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정치참여파는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더욱 의혹에 휩싸였다. 사전조직이란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묶어놓은 채 쿠데타세력만 비밀리에 자신들의 정치도구가 될 공화당을 조직한 것을 말한다. 완전한 꼼수로 정치경쟁에서 불공정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 박근혜 의원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인 1977년 겨울, 아버지 박정희와 함께 육사 재학중이던 동생 박지만 생도를 면회했다. 또한 7.6쿠데타음모와 12.12군사반란으로 숙명과 배은으로 엮인 정승화 당시 육사교장(오른쪽 끝)과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왼쪽 세 번째)가 함께 했다. |
주가조작- 빠친코 수입이권- 새나라자동차 수입이권- 워커힐호텔 건설 등 4대의혹사건으로 검은 돈 챙겨
구국혁명 커녕 부정축재와 내부 권력탐욕으로 이전투구
거기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도덕적 이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권력형 부패의 효시가 된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가조작으로 단기차익을 챙긴 결과 금방 증권파동이 일었고 유아기에 불과한 증권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관광호텔 사업자들에게 일본으로부터 도박기계인 빠친코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거기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또 일본의 새나라 자동차를 수입하게 허가해 주고 그 대가도 받았다. 아차산 산등성이에 워커힐 호텔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권을 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만 쓴 것도 아니고 각기 개인적 부정축재도 했다. 누가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가. 대학가에서 4대 의혹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 성토대회가 전국으로 번졌다. 허울 좋은 군사혁명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정부가 무능하고 사회혼란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혼란상을 말하는 것은 억지 트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혁명이란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보듯이 수십년에서 2백년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5.16쿠데타만 해도 수차례의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내부 권력투쟁은 혼란상 그것이었다.
국민들이 처음에 쿠데타 주모자인 줄 알았던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 중장(군사영어학교 출신)도 박정희 중심의 육사8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다. 또 최고회의 의원으로 건설부장관이던 박임항 소장(만군1기, 8기특임),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김동하 해군소장(만군1기), 최고의원 김윤근 해병준장(만군6기·해사), 최고의원 송찬호 준장(육사5기.고사포여단장), 최고의원 박치옥 대령(육사5기, 1공수여단장), 최고의원 문재준 대령(육상5기, 6군단포병사령관) 등이 차례로 반혁명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져 투옥됐다.
이처럼 5.16군사쿠데타는 처음부터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알력과 음모가 격심했다. 구국의 혁명은커녕 사리사욕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이전투구일 뿐이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쿠데타세력의 비리부패상을 고발하고 내부에선 연이은 권력투쟁이 터져 나오는 그야말로 혼란상이었다. 이에 주로 정규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이 의분을 토로하고 쿠데타세력에 대한 혁신작업을 꾸미기에 이른 것이다.
부관 손영길 박정희에 친위대 노릇 직소
"내부 혼란으로 일하시기 어려워보여서…"
수사관은 됐다 싶어 김식에게 음모의 내용을 물었다.
"7월 2일 밤 노태우 집에서 정호용 · 노정기 등과 함께 거세 대상자 명단을 짰다는데 대개 어떤 인물들이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술 마시면서 개탄이나 했지 누구를 제거한다는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김식에게 정보보고서를 내보였다. 우선 주모자들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적혀 있었다. 최고회의의 최성택 · 노정기, 중앙정보부의 전두환 · 권익현 · 김복동 · 박갑룡, 방첩대의 노태우 등이었다. 그리고 '7.6 거사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문이 전파돼 중앙정보부와 공화당간부에게 입수된 경로를 도표로 그렸다.
정보내용을 들여다본 김식은 크게 놀랐다. 공화당 간부인 육사 8기 출신 김동환, 신윤창, 오학진, 김우경 등이 정보입수자로 적혀 있었다. 이들이 군 장교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육사 출신 장교 일부가 의혹사건에 관련됐거나 정치적 분열을 일삼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간부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김식은 이 소문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건 별 것도 아닌데 그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김종필 계 공화당 간부들이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음모를 빌미로 중정부장 김재춘에게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나회의 설익은 야심이 그들과 가까운 김재춘에게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로 동기생인 정승화 방첩대장을 찾아간다.
"이 친구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할 때 내가 경고했지. 그러나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혈기로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혁명주체 중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것을 척결하려는 청년장교들의 의기는 옳다고 보네. 아까운 장교들이고 하니 경고 정도에서 관용하는 것이 좋겠어."
정승화도 그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책임자로서 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측근 두 사람을 불렀다.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과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다. 박종규에게는 경호실 소속 노정기 대위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붙였다. 박종규가 명단을 보니 연루자들이 모두 육사 11기 중 군정기구 참여파가 아닌가. 그는 정승화에게 '기합' 선에서 끝내자고 제안했다. 최고회의 경호실로 돌아온 박종규는 즉각 노정기를 호출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돌아다니나? 그러잖아도 군사정부가 시끄러운데 주제 넘는 짓으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 줄 알지?"
그는 눈을 부라리며 노정기의 복부를 툭 쳤다. 노정기는 잡아뗐다.
"저희끼리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한 일은 있으나 그런 음모란 금시초문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에게도 귀띔해주었다.
"자네는 이 음모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지만 모두가 가까운 동기들 아닌가? 이 일이 외부로 확대되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텐데…."
손영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즉각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에게 직소했다. 바로 하나회가 기대했던 전속부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방첩대에서 조사하는 것을 들으니 지나치게 과장됐습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제 동기생이고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장교들입니다. 혁명주체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워 각하께서 일하시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을 한 것입니다. 저희가 각하께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견교환을 해왔는데 이런 분위기는 보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손영길은 박정희에게 친위대로서 역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때 쿠데타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손영길에게 일렀다.
"알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
이것으로 더 이상의 수사나 처벌은 없었다. 하나회계가 주도한 어설픈 야심과 14기 행동파의 직설적 발언으로 사전에 노출된 7.6음모는 이렇게 해프닝에 그쳤다.
쿠데타주체 8기에 영남 출신 없어 하나회계가 파고들기 시도
12.12 군사반란에서 합수부장 전두환과 육참총장 정승화는 16년 전의 입장이 뒤바뀐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전두환의 배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3년 7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소령과 대위 때 하극상 반란 습성이 이미 노랗게 싹트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들은 5.16 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암투와 부패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여론의 비난을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는 하나회가 완전히 조직화하기 전으로 정규육사 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증권시장 조작과 빠친코 수입 등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치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 등 8기 그룹을 연금하는 일종의 궁정 쿠데타를 논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남출신이 주축인 하나회계는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가 동향인데도 측근세력으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아 불만이었다. 쿠데타의 중심축은 8기생이 틀어쥐었으나 이들 중엔 영남 출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5.16쿠데타에 가담한 8기 그룹의 면면을 보면 하나회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강했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임관한 8기는 1263명이었으며 특과까지 합하면 1345명에 달했다. 장교임관 그룹 중에서 전무후무하게 많은 수였다. 그래선지 8기는 군부와 정계, 그리고 권력기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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