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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멤버들이 행동대장 맡은 전두환 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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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멤버들이 행동대장 맡은 전두환 반란군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8> 보안사 지령에 군 지휘계통 마비

하나회 반란군 대통령 숙소를 장악하다

육본 헌병감 김진기가 삼청동 총리공관에 출동하겠다며 수경사령관 장태완에게 병력을 요청한 직후의 경복궁 30경비단.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후에 보안사령관, 대장 예편)이 종합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쿠데타 지휘부가 차려진 30경비단장실에 들어섰다.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인물 중 하나. 그는 장태완의 전임 전성각 수경사령관 아래서 33경비단장을 마쳤다. 지금은 경호실로 옮겨 근위부대 사정에 가장 밝았다. 그를 보자 수도군단장 차규헌 등 몇몇 장성이 숨 가쁘게 지시를 내렸다.

"고 대령, 그러잖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어정거릴 때가 아니다. 전 장군이 가 있는 삼청동 공관을 철저히 지켜야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에 정식 입주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경호실 근위부대가 아닌 계엄사의 육본 헌병대가 총리공관 경비를 맡고 있었다. 30경비단장실의 쿠데타 지휘부는 장태완의 위협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수경사 파견 보안부대원으로부터 헌병감 김진기가 병력을 요청한 사실을 보고받아 자칫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고명승은 경호실로 급히 돌아가 경호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과 청와대 내부를 지키는 55대대장 임재길 중령(육사 22기,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과 상의했다. 정동호는 육사13기 하나회 멤버. 이들은 근위부대 중에서도 핵심부대인 55대대병력 1개 소대를 차출, M60 기관총이 탑재된 지프 4대에 태워 총리공관에 급파했다.

이때부터 육본 정규지휘부 소속 병력과 반란군 지후부의 병력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정동호, 고명승 등 하나회 멤버들의 직접 지휘 아래 최 대통령의 숙소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밤 9시 30분 수경사.
장태완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 동원에 나섰다. 그는 먼저 국방장관실에 연락했다. 노재현 장관은 미8군으로 들어간 뒤여서 자리에 없고 김용휴 차관이 연결됐다.

"차관님, 속히 장관님을 찾아야겠습니다. 제가 배속받아 쓸 수 있는 4개 사단 가운데 우선 26사단 및 수도기계화사단과 서울근교의 9공수여단을 출동시키도록 해주십시오. 3개 공수여단장은 이미 반란군에 가담했습니다."

정규 지휘부는 이렇게 진압군 동원을 위해 규정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절차가 필요 없는 반란군 쪽과 비교해 보면 기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장태완의 활기찬 목소리에 국방차관 김용휴는 고무되는 듯했다.
"알았어. 그놈들 당장에 해치워야지."

그는 파이팅까지 외치면서 장태완을 격려했다. 장태완은 이어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지휘관을 거느린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했다. 이건영도 분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두환이가 작당해서 일을 저질렀는가본데, 장 장군이 잘 해줘야겠어. 내가 이곳 부대들은 모두 준비시켜 놓았으니 그놈들을 소탕합시다."

이건영은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을 때 강영식 6군단장(육사 10기)을 통해 그 예하인 배정도 26사단장(종합 6기)에게 비상대기를 지시해 두었다. 그리고 최영구 5군단장과 그 예하 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종합 29기)에게도 연락했다. 서울에 소요사태 등이 발생할 때 투입하기 위해 훈련된 3군 예하 충정부대들 중 20사단의 박준병 사단장(후에 민자당 사무총장)은 이미 쿠데타군 지휘부에 가 있었다. 박준병은 육사12기의 하나회 핵심 중 한명이며, 박희도(12.12반란군에 가담한 1공수여단장, 후에 육참총장) 박세직(후에 수경사령관, 안기부장)과 함께 쓰리 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 오른쪽부터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을 지휘한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 박 대령의 작전지시를 하달할 실무책임자였던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 반란군 수뇌였던 노태우 소장(가운데)이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반란군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을 수행한 수경사 참모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서울 시가전에서 야포를 쏠 수도 없고 …"

수경사와 통화를 끝낸 3군사령관 이건영은 군 수뇌부와 사태수습을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방부에 전화했으나 노재현이 없어 미8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았다.
"장관님, 빨리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대에 출동준비는 해놓았습니다."

이때 노재현은 위컴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자신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는 전방부대의 군단장, 사단장들이 무단이탈한 데 크게 분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위컴은 10.26 이후 북한이 어떤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방부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거듭 우려했다.

노재현은 이건영에게 신중한 대처를 당부했다.
"무엇보다도 전방경계가 중요하니 병력은 아직 움직이지 말아야겠소. 서울 상황을 좀 더 본 뒤 방침을 정합시다."

이건영은 군단장들에게 병력 장악을 재차 지시했다.
"출동준비는 하되 내 '육성명령'을 듣기 전에 병력을 움직여서는 안 돼요."

그는 이어 최전방을 지키는 1군사령관 김학원 중장(육사 5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전군 중 야전군이라는 1군사령부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건영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김 사령관은 매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서울의 그놈들 짓거리에 할 말이 없소. 병력을 내서 잡으러 갈 수도 없고…. 그러나 이 장군, 우리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큰일이오."

야전군은 서울과 거리도 멀고 정치문제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지만 정국불안 소식에는 가장 민감했다. 이건영은 대구의 2군사령관 진종채 중장에게도 전화했다.
"보안사에서 정 총장을 강제로 잡아갔어요. 총격전까지 벌였다는데, 소식을 알고 있소?"
진 사령관의 반응은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보안사 애들이… 그 안가 관계 때문인가."

혼잣말처럼 10.26 당일 저녁 정승화가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일을 꺼내는 진종채의 반응에서 이건영은 그가 사건의 상당부분을 알고 있음을 느꼈다. 진종채는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그 뒤를 이어 수경사령관을 지내고 보안사령관까지 거친 군부 실력자로 정국 풍향에 밝았다. 진종채도 군 내부에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견이었다.

밤 10시 30분 수경사령부.

장태완은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에게 작전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박동원은 하나회가 극성을 부렸던 14기에서 비하나회로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군내 사조직을 만들면 안된다면서 하나회를 비판해 장성 진급에서 탈락한 야전통이었다.

"수도권 외곽의 모든 검문소에 출입 통제령을 내린다. 그리고 전차대대 소속 병력과 장비를 모두 사령부로 집결시켜라. 야포단의 모든 포는 경복궁 30경비단을 목표로 잡도록 작전참모 지시를 하달하라."

박동원은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과 검문소반, 방공반, 경비반 등의 4개 반장(소령 급)들을 불러 사령관의 명령을 하달했다. 검문소를 비롯한 수도권의 경계상황은 이들이 점검하게 돼 있다.

박동원은 이어 김포 부근의 야포단장 구명회 대령(포간 57기)에게 전화로 작전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구 대령은 밀집지역인 서울시가전에서 포를 사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우리가 월남에서도 베트콩 한 명을 잡기 위해 민가에 포를 겨누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박동원도 구명회의 이 반론에 할 말을 잃었다. 상황은 심각하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일 수도 없고….

"포단으로서는 야간에 상황이 벌어지면 필수적인 조명탄이나 준비하겠습니다. 이 조명탄도 탄피가 인가에 떨어질 경우 피해가 적지 않을 겁니다."

박희도, 1공수여단 이끌고 한강을 건너다

수경사 야포단장 구명회 대령은 장태완 사령관이 연희동 요정에서 사령부로 돌아가는 차속에서 내린 지휘관 집결명령을 저녁 8시가 좀 지나 전달받는다. 그는 부단장 이승남 중령(육사 18기)을 부대에 남게 하고 지프에 올랐다. 그의 차가 김포가도 인공폭포 앞에 이르자 무전연락이 다시 왔다.

"단장은 부대에 돌아가 전 병력과 포를 장악하고 출동 준비할 것. 단장 대신 부단장이 우선 사령부로 들어오라."

구명회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차를 돌려 부대로 돌아가 부단장을 대신 보냈다.
"출동대기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빨리 사령부로 가서 상황을 파악해 알려주시오."

9시 30분경 구명회는 사령부에 간 부단장 이승남으로부터 종합보고를 받았다.

"단장들이 자리를 이탈한 부대는 부단장이, 부단장도 없으면 작전주임이 지휘권을 행사하라는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판단을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명회는 10.26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넉 달 전인 지난 7월 1일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특명으로 야포단이 창설될 때 귀가 아프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근위부대의 기본자세는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이 터지려 하면 그 위에 몸을 덮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경사 예하부대 중 병력 수는 야포단이 15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105mm 1개 포대만 효창동에 나가 있고 공항동의 단본부에 1000명 이상의 병력과 155mm, 105mm 야포 그리고 수송차량 등이 갖추어진 위력 있는 전투부대였다. 구명회는 작전과장 서종표 소령(육사 25기. 후에 3군사령관, 민주당 국회의원)을 불렀다.
"본부 행정병과 경비병만 남기고 모든 병력과 포를 출동할 수 있게 예령을 걸어두게."

서 소령은 눈을 크게 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서 소령, 상황은 알고 있겠지? 사령부에서 출동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사령부에 가 있는 부단장이 다시 상황보고를 해오겠지만 저쪽이 손들고 나오지 않는 한 무력 진압한다는 것이 사령관님 방침이다."

바로 몇 분 전 서종표는 경복궁 측의 전화를 받았다. 장태완이 이성을 잃었으니 사령부에서 병력 동원 지시가 떨어져도 움직이지 말고 수습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그 날 따라 혼자 파견 나와 있는 보안부대 장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안사는 전화도청으로 야포단의 출동준비를 파악한 듯했다. 그러나 하나회가 아닌 서종표는 수경사와 구 단장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사령부에 가 있는 이승남 부단장은 수시로 상황변화를 구명회에게 알려왔다. 장태완은 김기택 참모장과 박동원 작전참모를 통해 계속 가용병력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밤 10시 30분경, 사령부에서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이 출동명령을 하달해왔다. 박동원은 육사 출신이고 구명회는 포병간부후보생 출신이지만 두 사람은 소령 때인 1970년 육군대학 정규과정에서 연수를 함께 받아 잘 아는 사이다.

"여보 구 대령, 신속히 움직여야겠어요. 저쪽에 30경비단과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있기 때문에 주모자들을 빨리 체포해야겠소."

구명회는 작전과장 서종표와 정보과장 박성빈 소령(3사 3기)을 불렀다.
"작전과장은 병력과 야포를 연병장에 이동대형으로 집결시키고 정보과장은 선발척후대와 함께 사령부로 이동할 도로를 골라 부대를 선도하라. 박 소령, 제2한강교 쪽으로 가라."

잠시 후 선발대로 나간 박 소령이 무전보고를 해왔다.
"단장님, 제2한강교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다리 양쪽 검문소에서 통행을 차단해 다리에 꽉 찬 차량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제1한강교로 가서 다시 보고해."

제1한강교도 마찬가지였다. 수경사에서 내린 검문소 통금령으로 한강다리가 모두 막혀 있었다. 택시, 버스 등 차량들을 다리 양쪽에서 가두어 놓고 통행차단 장애물로 삼아 시민들이 아우성이었다.

구명회는 사령부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행주대교로 돌아서 오라. 행주대교는 우리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통금령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내전상태 돌입

행주대교는 수도경비사가 아니라 수도군단 예하 30사단의 관할 아래 있었다. 구명회는 무전으로 정보과장 박성빈을 호출해 행주대교로 보냈다. 그러나 행주대교에 간 박성빈으로부터 날아온 무선보고는 더욱 놀라운 내용이었다.

"행주대교를 지금 1공수여단 병력이 건너고 있습니다. 박희도 장군이 직접 선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명회는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경복궁에 들어가 있다던 박희도 준장이 병력을 인솔해간다면 이미 전투개시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황은 하극상 세력에 대한 체포가 아니다. 이젠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밤 11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구명회는 사령부에 박성빈이 알려온 긴급상황을 보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박희도 준장이 1공수여단 병력을 인솔해 행주대교를 건너고 있습니다. 다리를 1공수가 장악하고 있어 우리는 병력 수송이 불가능합니다."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은 이 사실을 장태완에게 즉각 보고했다. 장태완은 낭패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작전명령을 내렸다.
"야포단은 현 부대위치에서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그러나 야포는 적군과 아군이 완전 격리돼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경복궁을 목표로 표적사격을 하려면 그 전 단계에서 관측사격을 한 뒤 관측사격 지점을 표적에 끌어다 맞추어야 한다. 이 관측사격으로 광화문 일대의 효자동, 삼청동, 부암동 지역이 먼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바로 옆에 청와대와 총리공관도 있지 않은가.

구명회는 조명탄이나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명탄도 부스터(추진장치)가 쏟아져 내리면서 행인 살상은 물론이고 웬만한 가옥의 지붕을 뚫는다. 그는 조명탄을 내놓기만 하고 장착 명령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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