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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과 사이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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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과 사이비 목사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25> ‘Leap of Faith’

‘부흥회’를 영어로 ‘revival’이라고 한다. ‘소생시키다’ 또는 ‘회복시키다’라는 뜻인 ‘revive’에서 나온 이 단어는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말로, 그 어원에서 미국의 기독교 역사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대략 1650년도 전후에 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정착한 청교도들 사이에서 생겨난 말로 전해지는 ‘revival’은 그들의 삶은 본래 신앙적인 삶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예전의 신앙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건너온 동기나 그들의 신앙의 순수함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으나, 미국에서 시초부터 기독교라는 종교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사실 미국의 ‘부흥회 역사’는 미합중국의 역사보다도 길다. 영국식민지 때부터 마을에서 마을을 다니며 집회를 소집해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미합중국이 공식 출범하고 영토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방방곡곡으로 퍼져있는 타운들을 돌며 텐트를 쳐놓고 ‘부흥회 쇼(revival show)’를 하는 ‘순회목회단(traveling ministry)’들이 생겨났다. 이런 ‘부흥회 쇼’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마치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대형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부흥회는 요즘에도 (중남부의 ‘Bible Belt’ 지대에서 특히)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미국의 풍경에 속한다. 이런 집회를 흔히 ‘big tent revival’이라고 한다.

‘Tent Revival’의 실제 장면

이 같은 집회는 한 타운에 수일 동안 머물면서 연일 집회를 가지기도 했고, 그 들뜬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다. 이런 집회는 하나의 이벤트였던 만큼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기적’ 내지는 ‘성령의 역사’로 일컬어지는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기가 일쑤였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물질적인 ‘감사의 표시’가 점차 강도 높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면죄부(indulgence), 어떻게 보면 복채(福債)의 성격을 띤 조건부 헌금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든 헌금걷기는 결국 이들 ‘부흥회 쇼’의 필수적인 순서가 됐고, ‘잘될 때’는 돈이 엄청 많이 걷혔다.

미국 같은 상업주의 사회에서, 영적으로 흥분한 신자들이 지갑을 쉽게 연다는 이치를 알게 된 장사꾼들과 협잡꾼들이 이런 ‘목회 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목회라는 사업에 두둑한 금전적 보상이 없다면 사이비 목사들이 생겨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돈벌이가 유일한 목적인 ‘사이비 부흥사’의 흑막을 가장 명쾌하게 파헤친 영화로는 1960년의 ‘Elmer Gantry’와 1992년의 ‘Leap of Faith’를 꼽을 수 있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같은 제목의 소설(1927)을 각색한 ‘Elmer Gantry’는 버트 랜캐스터가 주인공(사이비 목사 엘머 갠트리)의 역을 맡아 1961년 아카데미 최우수배우상을 수상했다. 랜캐스터의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연기가 보여주는 사이비목사 갠트리의 모습은 거짓과 탐욕과 악독과 음탕이 철철 흐르는 모습이지만, 영화는 이 캐릭터를 단순한 ‘유형’으로 취급하는 것을 삼간다. 사악한 기회주의로 무장한 인간도 그렇게 된 과정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며, 종국에는 그를 정죄하는 것을 보류하는 자세를 취했다.

‘엘머 갠트리’의 현대판으로 볼 수 있는 스티브 마틴(Steve Martin) 주연의 ‘Leap of Faith’(한국에선 ‘기적 만들기’로 나왔다)도 극중의 사이비 목사를 정죄하려 들지 않는다. 이 영화는 피곤한 인생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의 ‘표적’ 또는 ‘기적’을 갈구하는 기독교 신자들의 심리를 악용하여 돈벌이를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비 목사의 속임수들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사이비 목사도 나름대로의 철학과 인생관이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다. 재치와 익살의 귀재인 스티브 마틴을 내세워 한바탕 ‘쇼’를 벌이고 끝날 듯한 단순한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믿음’과 ‘기적’의 상관관계를 다소 진지하게 다룬 영화다. 주인공 조나스 나이튼게일(Jonas Nightengale – ‘나이팅게일’을 ‘남부식 발음’으로 변형시켰다)은 전국을 누비며 곳곳에서 ‘전통적 텐트 부흥회(old-fashioned tent revival)’를 열어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이는 협잡꾼이다. 그는 ‘Miracles and Wonders(기적과 불가사의)’라고 적혀 있는 서너 대 버스에 분승한, 성가대를 포함한 ‘순회목회단’ 수십 명을 이끌고 ‘한탕’을 벌일 만한 동네를 찾아 다닌다. 버스에는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텐트와 최신식 무대장비는 물론, ‘기적연출 담당’이자 매니저인 제인 라슨(데브라 윙어 분)과 나이튼게일이 은밀하게 교신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 그리고 기적의 연출에 동원될 휠체어와 목발 수십 개씩이 실려 있다. 버스행렬은 무슨 록그룹의 투어를 연상케 한다.

캔사스주의 러스트워터(Rustwater)라는 작은 타운을 지나던 중 버스 한 대가 고장을 일으키면서 시작되는 영화는 이 자들이 그 자리에서 여장을 풀게 한 뒤, 이곳 주민들의 소박함과 순수한 신앙을 보여줌으로써 사기꾼 목사와 그 일당의 야비함을 부각시킨다. 인구 2만2천, 가구당 중간소득 2만1천 달러(1992년 기준으로 미국 평균의 절반 정도)의 이 타운은 현재 27%의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고, 오래된 가뭄으로 흉작을 면치 못할 위기에 놓여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이비 목사가 나타나 그들의 주머니 돈을 노리는 것이다.

이윽고 가뭄으로 흙먼지가 날리던 황량했던 들판에 거대한 텐트가 순식간에 올라가고, 그 안에는 청중을 현혹시킬 온갖 무대장치가 설치된다. 그 화려함은 웬만한 록콘서트에 버금갈 정도다. 텐트 안에는 목회단의 ‘공작원’들이 깔려있고, 텐트 입구에서는 티셔츠와 성경을 판매한다. 이렇게 선량한 서민들의 돈을 털러 온 나이튼게일은 첫날 밤 무대에 오르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And now, let’s go give some empty lives a little meaning”
자, 이제 가서 공허한 인생들에게 의미를 좀 주세.

그리고 그를 사이비라고 의심한다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Well, maybe I am and maybe not.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f I get the job done?”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가 임무만 달성한다면 무슨 상관이지?

위선마저 초월한 사이비 목사의 숙달된 시니시즘과 자기 합리화가 배어 있는 말들이다. 그럼에도 이 말은 왠지 신선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목사들의 위선과 거짓이 유독 혐오스런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거룩하다는 자기최면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이튼게일의 이같은 말은 그가 최소한 자기 자신만은 기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기 입으로 말하는 ‘임무’란, 수많은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에게 ‘멋진 쇼’를 선사하는 것이다 - “I give them a good show.”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의 숱한 모순을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하는 믿음의 세계를 나는 모른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면서도 이승의 물질적 풍요 속에 파묻혀 사는 목사들의 비결도 난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신(神)과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중간업자는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데 ‘Leap of Faith’는 그 중간업자(그가 사이비든 아니든)는 진정한 믿음이나 기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Leap of faith’라는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맹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풀어서 얘기하면, “믿음을 갖고 (절벽에서) 뛰어내림”을 말한다. 이 영화는 맹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에서 문득문득 감동을 주는 부분은, 그런 ‘맹신’을 가진 주민들이 나이튼게일이 행하는 가짜 기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영화가 그들을 의도적으로 미화하는 감은 있어도, 사이비 목사의 속임수를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전율하며 감격의 눈물을 터뜨리는 그들의 모습은 절대적인 그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말해준다. 그런 와중에, 마침내 진짜 기적이 일어나고 만다. 내내 동정이 가던 불우한 청년이 못쓰던 다리로 걷게 되고, 하늘이 드디어 비를 쏟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적이 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일개 목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분명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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