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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파트, 다시 중동땅 밟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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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파트, 다시 중동땅 밟기 어렵다“

김재명의 '중동 현지르포' <13> 아라파트 출국은 일시적 퇴장일까

지난 4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중동의 살아 있는 전설’ 야세르 아라파트(75세)가 병 치료를 위해 10월 29일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병명은 혈액장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정치중심도시인 라말라의 집무실(현지인들은 이를 ‘무카타’라 부른다.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요르단 암만으로 옮겨,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간다. 아라파트가 없는 동안 팔레스타인 총리 아흐메드 쿠레이아(일명 아부 알리)가 자치정부를 이끈다지만, 그의 출국은 4년을 넘긴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봉기)의 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아라파트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키운 병**

필자는 지난 2002년 5월과 올해 6월 라말라에서 아라파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받은 느낌은 그의 얼굴이 주위 사람들에 견주어 몹시 창백하다는 점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연인 아라파트의 몸과 마음의 병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키워왔다. 2001년 말부터 지금껏 거의 3년 동안 아라파트는 집무실인 무카타에 갇혀 감옥 아닌 감옥에서 지내왔다. 어쩌다 라말라 시내의 회교사원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동갑내기인 아라파트를 평생의 라이벌로 여겨온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 군 탱크를 동원, 무카타를 향해 마구잡이 포격을 해대면서 “아라파트가 라말라 집무실(무카타) 밖으로 나오면 생명을 보장 못한다”며 위협했다.

(사진1. 라말라 집무실에서 만난 아라파트 @김재명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오래 전부터 “아라파트 제거!“를 부르짖어 왔다. 그들은 아라파트를 가리켜 ‘팔레스타인 테러의 괴수’ 또는 ‘중동평화의 걸림돌’이라 비난한다. 샤론 내각은 지금껏 여러 차례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낸다는 ‘원칙적인’ 결정을 내렸다. 다만 그 시기와 방식은 나중에 결정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가자지구로 강제로 이송하겠다”는 협박도 나왔다. 일부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아라파트를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마저 펴왔다. <예루살렘 포스트>같은 우파신문들의 논조도 아라파트 제거를 거듭 외친다(마치 한국의 극우 언론이 노무현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거침없이 말하는 상황을 떠올린다).

미 부시행정부도 아라파트의 병을 키워왔다. 지난 4년 동안 샤론 이스라엘 수상은 워싱턴 백악관에 10번 넘게 초대 받았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워싱턴에조차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이는 전임자인 클린턴 대통령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난 1990년대 중동평화협상을 중재했던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비교적 중도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쪽의 견해 차이를 줄이려 애썼다.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의 회담에서 벤야민 네탄야후 전 이스라엘 수상이 야세르 아라파트를 무시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자, 네탄야후를 따로 불러 “그럴 수가 있느냐”며 호되게 질책을 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깡패국가’ 소릴 들으면서도 그나마 국제사회에서 명함이라도 내밀어 온 것은 오로지 미 부시행정부 덕이다. 이스라엘은 흑백차별정책(Apartheid)으로 말미암아 올림픽 경기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버텨온 것은 부시행정부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덕이다. 지난 4년 동안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이스라엘 비난 결의안이 나올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정치인 아라파트의 존재의미**

아라파트를 제거 또는 축출, 그를 ‘역사의 벼랑’ 밑으로 밀어뜨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면서도 샤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해온 것은 후유증을 걱정해서였다. 그 후유증이란 두 가지다. 첫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발과 그에 따른 저항의 불길이 들불처럼 일어날 게 뻔하고, 둘째는 국제사회의 비난이다. 1967년 6일전쟁 이래로 팔레스타인을 불법 점령, 일제 식민지 시절의 헌병(憲兵)통치를 꼭 빼닮은 군사적 강압통치를 펴온 이스라엘은 이미 국제사회로부터 ‘깡패국가’(rogue state)란 악명을 얻었다.

<사진2. 아라파트의 대형 초상화가 내걸린 가자지구 중심가. @김재명

이런 두 가지 이유 탓에 이스라엘 우파들은 아라파트를 강제로 몰아낼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다 하나 더 보탠다면 미국이다. 아프간 침공, 특히 이라크 침공을 통해 이슬람권의 민심이 악화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미 부시행정부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강경파들의 극한행동을 말려왔다.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스라엘 강경파들의 돌출행동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중동 이해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막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치인 아라파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티파다 과정에서 아라파트가 보인 상대적 유약함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경파 하마스(Hmams)에게 희망을 빛을 찾게 됐다. 아라파트 측근들의 부패문제도 어제오늘의 지적이 아니다(필자가 라말라에서 아라파트 지지자들로부터 들은 우회적인 해명에 따르면,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한 무기구입, 알-아크사 순교여단 등 친아라파트 무장조직에 대한 지원 등 말 못할 항목에 큰돈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현단계에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을 이끌어갈 정치적 구심력이다. 그렇기에 샤론 이스라엘 수상은 아라파트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는 것을 두고 아라파트의 정치적 독선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랬을 경우 후계구도를 둘러싼 이스라엘의 정치공작이 더욱 노골적이 됐을 것이다.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아라파트의 출국은 현단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이끌어갈 정치적 구심력의 실종을 뜻한다. 한마디로 그들에겐 재앙이다. 아라파트의 정치적 독선을 비판해온 비판세력들, 이를테면 가자지구를 본거지로 한 팔레스타인 저항조직 하마스조차 지도자 아라파트가 현실적으로 지닌 정치적 비중과 의미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지난 6월 가자지구에서 어렵사리 만났던 하마스 대변인 사미 아부 주흐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점령정책에 아라파트가 때때로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점을 비판해왔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서 아라파트가 지닌 지도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동의 적인 이스라엘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이다. 이스라엘 샤론 정권과 그를 지지하는 미국은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흠집을 내려들고 그를 갈아치우려 들고 있다. 누가 팔레스타인 지도자로 나서는가의 문제는 오로지 팔레스타인 내부문제이고, 따라서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결정할 문제다. 하마스는 외부세력들이 아라파트의 정치 지도력에 대해 간섭하려드는 것을 거부한다"

***인도주의 뒤에 깔린 냉정한 계산**

필자의 중동 취재과정에서 들은 얘기들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 샤론정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아라파트에게 달콤한 유혹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망명을 바란다면, 기꺼이 노후를 편히 살도록 주선해주겠다”는 따위다. 아라파트도 인간이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아라파트는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젊은 부인 수하가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가 골치 아픈 정치를 잊고 싶은 생각도 얼핏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그런 유혹을 떨쳐버려 왔다. 이번에 병이 깊어질 때도 의사들은 병원에 입원하길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그런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약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를 희망으로 여기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아라파트의 건강이 나빠져 프랑스로 가는 바람에 문제가 자연스레 풀려나가는 참이다. 실반 샬롬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날 공영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특정한 조건에서 팔레스타인의 새 지도부와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특정조건’이란 이스라엘이 거부감을 갖지 않는 온건파 정권의 출현이다. 지난 2003년 이스라엘과 미국은 ‘온건파’로 알려진 마흐무드 압바스(일명 아부 마젠) 팔레스타인 수상을 밀다가,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저항에 밀려 아라파트제거를 목표로 한 ‘국제 정치공작’에 실패한 바 있다.

그동안 아라파트를 ‘테러리스트 수괴’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압박해온 미 부시행정부와 이스라엘 샤론 정권이 느닷없이 인도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미 국무부는 ”아라파트 수반이 (프랑스에서) 치료를 잘 받아 건강을 회복하길 바란다“는 성명을 냈고, 이스라엘 정부 대변인도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아라파트의 출국을 허락한다“고 밝혔다. 그들이 말하는 인도주의 뒤에는 냉정한 계산이 숨어있다. 아라파트 없는 팔레스타인은 지도력 부재를 뜻하고, 강경파인 하마스의 득세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선 팔레스타인을 장악해나가기가 더 쉬워진다. 군사력의 압도적인 차이로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요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아라파트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쉽다.

이스라엘 쪽은 말한다. “병 치료 뒤 돌아올 수 있다”고. 그러나 필자의 결론은 아라파트는 파리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파서 제 발로 나간 아라파트가 다시 돌아와 팔레스타인 정치의 중심에 서는 것을 미국과 이스라엘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라파트의 출국이 곧 그의 ‘정치적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우파들로서는, 병이 악화돼 아라파트가 프랑스 파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아라파트가 다시 팔레스타인 땅을 밟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라크 침공으로 고전중인 미국의 대중동정책에서 “아라파트가 아직은 유효한 변수”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런 판단을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받아들였을 경우뿐이다.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라는 잣대로 보면, 존 케리 민주당 후보도 부시와 다를 바 없다. 11월 미 대선 결과에 따라 아라파트의 운명이 달라질 것으로 믿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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