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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자본이 권력이면, 권력은 자본인가?

<서평> 『권력자본론』,위기의 시대와 경제/정치의 긴밀한 연관

현 시기는 대전환기이다. 굳이 월러스틴(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과 같은 예언자적 전망―자본주의의 멸망―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이르러 그 내적 모순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IMF 사태를 겪은 우리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로 강요되었던 미국식 자본주의가 사실은 분식회계(우리의 대우그룹처럼)를 일반적인 관행으로 행하는 '카지노 자본주의'이고, '신경제'라는 '분식'이론으로 치장한 미국경제가 거품경제임을 2000년 주식시장 붕괴가 폭로하였다.

<책 사진> 『권력자본론』(Capital as Power)(심숀 비클러, 조나단 닛잔 지음/홍기빈 옮김, 삼인, 2004)

급기야 위기에 몰린 '헤게모니 국가' 미국은 정보조작과 여론조작으로 이라크를 침략했다.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핑계로 대내적인 파쇼적 억압ㆍ감시체제를 부활시켜 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 민중의 목숨을 건 항전과 전 세계 민중의 반전여론과 반전투쟁으로 제2의 베트남전쟁에 직면하고 있다. 위기의 징후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ㆍ환경 등 곳곳에서 확인된다. 요컨대, 현재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체제적 위기를 잉태하고 있다.

자본주의 모순의 이러한 격화와 그에 따른 자본축적의 위기 및 정치ㆍ군사적 폭력의 대두는 이론적으로 다시 경제와 정치의 연관 문제를 쟁점화시키고 있다. 특히 주류 경제학의 시장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정통좌파의 경제주의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한 이론적 노력들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서구 이론에서 최근 제기된 것으로는 정통좌파를 계승한 데이비드 하비(Harvey)의『신제국주의』(The New Imperialism; 2003)와 제도학파를 계승한 심숀 비클러(Bichler)ㆍ조나단 닛잔(Nitzan)의『권력자본론』(2004)이 주목된다. 두 저작은 전혀 다른 이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정치의 연관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이론적 과제로 설정한 점에서 공통적이고, 또한 아리기(Arrighi)에게서 영감을 얻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그런데『신제국주의』가 정치와 경제의 '모순적 결합'으로서 현대의 '신제국주의'를 규명하고자 시도하는 데 비해,『권력자본론』은 자본이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권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와 정치의 구분 자체를 해소하는 이론화를 시도한다. 두 시도 모두 경제와 정치의 전통적인 이분법의 폐해인 경제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다.

특히『권력자본론』은 경제를 정치로 환원시킴으로써―자본은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권력을 화폐라는 상징으로 체현해 놓은 것'이다―경제/정치, 시장/국가, 생산/권력, 부/권력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 책은 주류 경제학, 즉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해서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한 내재적인 비판을 통렬하게 가함으로써 주류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성과 허구성을 통쾌하게 폭로한다.『권력자본론』의 이론적 성과이다.

***자본은 모두 비생산적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신고전파 경제학의 자본 개념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공격한다. 자본이 물질적인 사물(자본재; '생산된 생산수단')이고 정확히 규정된 물리적 수량을 가지는 것이며, 스스로 생산성을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자본재의 한계생산성만큼 자본소득이 발생한다는 신고전파의 신념이 사실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노동이나 토지와 달리, 자본재들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그 '자연적' 단위로 합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클라크(Clark)의 생산성 분배 이론이 기반하고 있는 자본 개념은 순환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윤의 양은 일정량의 자본이 갖는 한계생산성에 의해 설명된다. 그런데 그 자본의 양이라는 항 자체가 다시 이윤의 함수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고전파 자본이론 체계 자체가 순환논리임은 저 유명한 '켐브릿지 논쟁'에 의해 공식적으로 판명되었다. 당시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표주자였던 폴 사뮤엘슨(Paul Samuelson)은 클라크의 신고전파적 자본 개념이 순환논리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우화'로 받아들이자는 식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신고전파적 자본 개념의 난점을 회피하기 위한 이러저러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 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신고전파 이론의 거대한 체계는 허구적인 자본 개념, 즉 자본이 그 양을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 단위이며 특유한 생산성이 우러나오는 물질적 실체라는 관념을 기본공리로 하여 세워지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신고전파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으로 전락했다.

저자들은 대안적인 자본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토스타인 베블렌(Veblen)과 루이스 멈포드(Mumford) 등의 제도주의 이론틀에 의거한다. 몇 가지 명제를 근거로 '자본은 권력'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첫째, 인간 역사의 원동력은 창조성과 권력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산업과 영리활동이라는 인간활동의 구별로 나타난다.

둘째, 산업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활동으로서 그 생산성은 무엇보다도 협동과 통합에서 나온다. 산업 생산은 '공동체의 지식'에 의존한다. 반면에 영리활동은 이윤을 위한 활동으로서 소유권과 권력의 영역이다. 따라서 영리활동은 소유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 또 사업가들과 일반 민중 사이의 분열을 뜻한다.

셋째, 자본주의에서 산업은 영리활동의 목적에 복속되어 있다. 산업은 물질적 범주로 측량되고 영리활동은 화폐적 범주로 측량된다. 영리활동은 오로지 분배 영역에만 전적으로 국한된 활동일 뿐이다. 따라서 산업 영역의 생산이 원인이 되어 분배가 결정된다기보다는 분배가 원인이 되어 생산이 결정된다.

넷째, 자본재 소유자의 소득의 양은 그 자본재의 생산성 기여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전체 사회의 산업 과정에 입힐 수 있는 총체적 피해에 비례한다. 요컨대, 자본소득인 이윤의 원천은 사회적 생산에 대한 '깽판놓기'(sabotage)에 있다.

다섯째, 따라서 자본은 생산이나 물질이 아니라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권력자본' 개념에 입각해 19세기 말 주식회사 제도의 등장과 독과점 형성 이래의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른바 '부재 소유'(absentee ownership)와 '차등화 축적'(differential accumulation) 이론이 그것이다.

주식회사의 등장에 따른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부재 소유' 및 부재 소유자 집단을 낳고 동시에 독과점이 형성되면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이 출현하게 된다. 즉 부재 소유자들의 투자란 이제 영리상의 거래로 미래의 화폐소득 흐름에 대한 청구권을 얻는 활동으로 되고, 축적이란 더 이상 물질적인 생산수단이 아닌 금융적인 가치를 불리는 것이 되었다. 요컨대, 자본은 수익 창출 능력의 자본화를 의미하게 된다. 생산하는 능력을 자본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유할 수 있는 권력을 자본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소유권을 행사함으로써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이윤의 현재가치이다.

또한 저자들은 독과점시장의 출현과 과잉설비 및 낮은 가동률, 독과점기업간 담합 등에 주목하여 '차등화 축적'을 이론화한다. 저자들은 위와 같은 현상을 자본에 의한 '전략적 제한'의 결과로 본다. 즉 "이윤이 존재하려면 영리기업 활동은 인간의 창조성이 최대로 발휘되어 기본적 생계 물자의 생산이 그 잠재적 최대한까지 도달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제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재 소유자들이 산업을 조종하는 원칙이란 공동체에 대한 물질적 기여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 비해 얻은 차등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산활동을 전략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리적 기업의 이러한 생산활동의 전략적 제한―'깽판놓기'―이야말로 자본주의적 권력이 현실에 나타나는 중심적 형태로 된다. 전략적 제한에는 "약탈적인 가격 책정, 공식적ㆍ비공식적인 공모, 광고, 배타적 계약 체결 등의 직접적인 제한도 있고, 특허권, 저작권 법, 정부의 편파적 산업정책, 차별적인 조세 감면, 합법적 독점체들, 노동입법, 교역 및 투자협정 혹은 장벽 등의 더 포괄적인 '정치적' 수단도 들어간다. 물론 폭력―군사력을 포함한―도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윤이 남는 가격을 정할 기업의 능력이 생산을 결정한다는 것은 곧 그 기업들이 애초부터 일정한 독점적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즉 현대 영리활동에서의 경쟁은 공공연한 기업 담합이 없다고 해도 보통 '불완전' 경쟁상태이며, 따라서 독점과 과점은 예외가 아닌 지배적 상황이다. 일정한 통상적 수익률 아래로는 생산을 않겠다는 심보야말로 산업에 대한 '깽판놓기'의 현실적 표현형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완전 경쟁에 놓여 있는 기업들은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할 힘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의 생산 활동은 '정상적인' 수익률이라는 지상 명령으로 제한되고 있다. 여기서 저자들은 신고전파의 '경쟁시장' 이론을 뒤집고 '권력자본' 이론을 정립한다.

"실로 정상적 수익률은 오로지 사업가들이 거기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 영리 기업 활동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은 '평균을 능가'하려는 욕망이지 그냥 중간쯤 가자는 게 아니다. 기업의 사업 실적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기준으로 표현되는바,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리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남들에 비해서 더 많이 벌고 더 크게 성장하고 더 빨리 팽창하려는 강력한 욕구가 아마도 영리 활동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리라. … 자본축적이 갖는, 이러한 차등화시키려는 본질이야말로 우리의 자본 이론에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자본가들끼리 벌이는 내부의 서열투쟁에 의존한다. 비(非)총계의 수준에서 보면 부재 소유자들간의 이윤의 분배는 대략적으로 그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게 영리상의 손해를 입힐 능력의 균형으로 결정된다. 총계의 수준에서 보자면, 이들 개별 소유자들간의 전쟁에서 생겨나는 산업 전체에 대한 깽판놓기의 정도가 전체 이윤 몫의 크기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서 영리활동에서 중심 목표가 되는 것은 이윤의 분배이며, 그렇게 분배할 이윤이 애초에 생겨나는 것은 다시 그 깽판놓기라는 영리활동의 방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자본은 생산과 형식적인 연관을 갖는 자본까지 포함하여 모두 비생산적이다"고 주장함으로써 신고전파 자본 이론에 결정타를 날린다.

***독점자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

그리고 저자들은 '권력자본'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축적의 본질은 생산과 권력의 상호작용이다, 예상되는 이윤의 흐름에 체계적 영향을 주는 형태의 권력이라면 모두 그 즉시 자본화된다(사회권력의 자본화), 자본은 가장 고도로 발전한 권력형식이다(고대왕국→ 근대 주권국가→ 자본으로 진화), 정치적 제도들이 자산가격의 모습으로 자본화되면서 자본 자체가 점차 국가의 한 형태로 되었다(국가권력의 자본화), 자본과 국가라는 두 개의 권력 제도들이 '하나의 그물에 엮인다', 축적되고 있는 것은 미래의 이윤 흐름에 대한 청구권이므로 축적은 이윤을 전혀 벌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루어진다, 자본가들의 권력은 다른 자본가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측정된다, 화폐단위로의 수량화(자본화 과정)야말로 바로 축적의 질적 측면과 양적 측면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권력의 그물망과 사회적 재생산의 패턴을 함께 재구조화하려는 자본가들 내부의 투쟁이야말로 차등화 축적의 본질이다, '차등화 축적'은 '지배적 자본'의 자본화된 소득이 전체 경제의 평균과 비교하여 팽창해 가는 비율이다, 자본축적의 장기적인 핵심조건은 가장 큰 부재 소유자들의 상대적 권력이 안정적이거나 증가할 것, 자본소득의 몫이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증가할 것 등의 두 가지이다, 차등화 축적은 변화의 과정이며, 반대를 짓밟으면서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역동적인 권력투쟁이다, 등등.

또 저자들은 권력자본 이론에 근거하여 지난 20세기 동안의 차등화 축적의 상호 연관된 세 가지의 역사적 특징을 확산, 통합, 축적양식의 교체 등으로 제시한다.

첫째, 차등화 축적의 원리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주요 동력으로서 점차 공간적으로 확산되었다. 둘째, 따로따로 벌어지던 별개의 차등화 축적 과정들이 점점 통합되었다. 부문ㆍ나라ㆍ산업에 따라 서로 달랐던 이윤율의 벤치마크도 점점 하나로 수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근저에는 영리활동의 원칙이 점점 통합되고 표준화되는 사회적 과정이 있다. 셋째, 순환적이다. 차등화 축적은 '넓이 지향성'과 '깊이 지향성'이라는 두 개의 다른 축적양식의 사이에서 장기적 진자운동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넓이 지향성' 축적 양식은 무산계급의 창출, 경제성장, 기업병합 등으로, 사회 구조 전체가 역동적인 성격을 띠며 보통 사회갈등이 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한편 '깊이 지향성' 축적양식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서, 기존의 제도와 구조가 바뀌지 않고 공고해지는 경향을 보이며, 보통 심한 사회갈등을 낳아 종종 폭력적인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경제를 정치로 환원시켰는데 정치가 사라지고 경제만 남는 역설**

그런데 정치와 경제의 전통적인 이분법을 넘어서겠다고 하는 긍정적인 문제제기와 의욕적인 대안적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얻는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다.『권력자본론』이 의존하고 있는 제도주의 이론틀의 한계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주류 경제학에 대한 성공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 대안적 이론화로 나아가는 데는 내용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자리걸음에 그치고 만다.

주류 경제학의 시장 논리를 권력 논리로 대체하고, 경쟁 논리를 독과점 논리로 대체하기 때문에 '경쟁시장' 논리 대신에 '독점력' 논리―이를 저자들은 '깽판놓기'로 표현한다―를 도입하나, 내용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형태상으로는 경제를 정치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경제가 사라지고 정치만이 남아야 하는데, 내용적으로는 정치가 사라지고 경제만이 남는 역설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저자들의 권력 개념이 시장에 대한 독과점적 지배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권력' 개념 자체가 시장행태를 염두에 둔 규정이다. 즉 권력을 "스스로 행동하거나 혹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각과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들이 쥐고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통상적인 권력 개념, 즉 인간들 사이의 지배ㆍ예속관계―지배/피지배 관계―로서의 권력 개념과 다르다. 저자들의 '권력'은 내용상 시장 지배력이고, 따라서 저자들의 분석의 초점은 독점자본들 간의 경쟁(또는 내부투쟁)에 맞추어진다. 자본/노동의 계급관계 및 계급투쟁이나 정치는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 요인에서 아예 사라지고, 오로지 시장 독점력과 그를 둘러싼 독점자본들 간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권력자본론』은 '독과점 현상학'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래서 저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주의적 편향을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들 자신이 또 다른 경제주의로 귀결됨으로써 경제주의를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자본이 생산적이고 이윤의 원천이 자본의 한계생산성'이라는 신고전파의 주장에 대해 '자본은 모두 비생산적'이라는 비판만 남게 된다. 상론할 지면이 없지만, 저자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의 욕적인 비판은 주로 경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는 적실성이 없다.

경제/정치 이분법의 폐해, 특히 주류 경제학의 '시장지상론'이나 경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정치의 경제로의 환원을 극복하는 것은『권력자본론』처럼 정반대로 경제를 정치로 환원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특유한 경제와 정치의 구별과 분리를 '형식적' 분리(또는 외관상의 분리)로 파악하고 그것의 '내용적' 통일성을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생산사회라는 역사적 특징 때문이다. 경제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경제적 형태'로 존재하고, 그로부터 분리된 정치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와 정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총체를 구성하는 두 계기로서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를 규정하는 모순적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서평자의 이러한 평가 관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서평자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그러나 정통좌파를 포함한 경제주의ㆍ정치주의ㆍ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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