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적자원부가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후속으로 현행 E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수능강의를 올해 수능시험에 반영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빚고 있다. 학교현장에서는 당장 2일 실시되는 모의고사에 이러한 방침이 얼마나 반영될 것인지를 두고 촉각이 곤두서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현우 인하대 영어교육학과 교수가 프레시안에 이와 관련한 기고 글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교육부의 공언대로 EBS의 수능 방송 내용은 2일 수능 모의고사에 생각보다 많이 반영될 것이 확실하다”며 “이러한 수능 시험에의 연계는 극히 비교육적이고 공교육의 근간을 흔들 소지가 다분하다”고 비판했다. 프레시안은 이 교수가 기고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대안이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돼 글 전문을 싣는다. - 편집자주
***EBS 수능강의 출제는 또다른 정치적 행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의 수능 모의고사가 2일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된다. 이번 모의고사는 2005학년도 수능 시험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점과 수능 시험에 EBS 수능 강의 내용이 얼마나 반영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56만여명의 수험생이 응시한 이번 모의고사는 교육인적자원부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밝힌 바와 같이 EBS의 수능 강의 내용이 일반적인 예상보다도 훨씬 많이 반영된다고 한다. 이러한 수능 방송 내용의 수능 시험 연계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EBS의 수능 방송이 성공해야 하고 EBS의 수능 방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방송 내용이 시험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발로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가 아무리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EBS의 수능 강의 내용을 수능 시험에 억지로 연계하는 것은 전국언론노조 EBS지부가 지난 5월 28일자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공교육을 훼손하고 교육의 원칙을 저버리는 매우 위험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비정상적인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교육인적자원부의 충정은 이해하나 교육인적자원부 스스로 교육의 원칙을 파기하면서까지 문제 출제에 간섭하는 것은 정치 논리가 교육을 망쳐놓는 또 하나의 잘못된 예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EBS의 수능 강의가 이번 모의고사에 반영된 형태는 크게 두 가지이다. EBS의 수능 강의에서 다룬 문제를 (거의) 그대로 재출제하거나 또는 발문이나 문제의 지문을 변형하여 출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수능 방송 내용과 수능 시험과의 연계 방식은 모두 비교육적이거나 비효율적이다.
먼저, EBS 수능 방송에서 다룬 문제를 그대로 재출제하는 것은 결국 시험 전에 문제(교재에 있는 것이든, 아니면 강의 중 언급된 것이든)를 학생들에게 알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중등교육과정에 명시된 학습 목표의 달성 여부와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 정도를 측정한다는 수능 시험의 본래 취지가 제대로 지켜질 수 없다고 본다. 더군다나 수능 시험 문항의 보완을 감독해야 할 위치에 있는 국가 기관이 EBS를 통해 시험 문항을 사전에 유출하는 것은 정당하고, 다른 사람이 다른 방법을 통해 문제를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혹자는 EBS의 수능 강의 내용을 수능 시험에 반영하되, 방송에서 다룬 문제를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다소 문제를 변형하여 출제에 반영하면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수능 방송 교재는 너무 졸속으로 제작되어 내용을 변경해 수능 시험에 출제할 수 있는 문항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설혹 문제를 변형하여 수능 시험에 출제 한다고 해도 소수의 수험생만이 변형된 문제가 수능 방송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능 방송 강의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의 효과가 하찮아질뿐더러 EBS의 수능 문제를 가다듬어 이를 가르치는 학원들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강남의 입시 학원이나 대형 학원에서는 벌써 이렇게 학생을 지도한다고 한다.
***‘준비되지 않은’ 출제 방침은 부작용만 초래**
대학 입시에서 수능 시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줄지 않는 한, 현재의 수능 방송 강의와 수능 시험과의 연계는 제한적인 사교육비 경감의 효과만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무책임하지 않는 한, EBS 방송 내용의 수능 시험에의 반영은 일부 문항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금년 6월 수능 모의고사에서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항이 200개인데, 이 중 50개가 방송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같은 방송 내용의 시험 반영이 본 수능 시험을 대비한 과외 수요를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학생과 학부모가 대학 입시의 성패가 방송 내용과 관계없는 나머지 150개 문항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이들의 사교육 의존은 이전보다 크게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남에서 과외가 거의 줄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현재 방식의 EBS 수능 강의의 수능 시험 반영은 또 다른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과외 수요를 줄인다고 국가 차원에서 문제 풀이를 해주고 문제 풀이를 해준 문항을 수능 시험에서 출제한다면, 똑같은 이유로 학교 차원에서 문제 풀이를 해주고 문제 풀이를 해준 문항을 기말 시험에서 출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이렇게 되다 보면, 결국 학생을 객관적 기준에서 선발하고자 하는 대학은 학생의 내신과 수능 시험 점수 둘 다 신뢰하지 못해, 대학 자체의 본고사 부활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껏 지적했듯이, EBS 수능 강의와 수능 시험의 연계는 선의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준비가 부실해 현재로서는 비교육적인 수단에의 의존과 이에 따른 부작용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수능 방송 강의는 본래의 취지를 올바른 교육적 수단에 의해 살린다면 교육적 순기능과 함께 어느 정도 사교육비 경감의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는 교육인적자원부에 다음과 같이 건의하고자 한다.
***EBS 강의, 철저히 현장교사 중심으로 돌려라**
첫째, 수능 방송 강의의 내실화가 이뤄지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방송 강의와 수능 시험의 연계 방법이 강구되기 전까지는 방송 강의 내용을 가급적 수능 시험에 연계하지 않는다.
둘째, 수능 방송 강의 및 운영을 감독하는 “수능 방송 강의 운영위원회”를 교과별로 설치하고, 교육부 및 평가원 관계자, 대학 교수 및 현장 교사 그리고 방송 관계자를 운영 위원으로 둔다. EBS가 교육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교육보다는 방송이라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육적인 측면은 순전히 외부의 현직 교사나 강사, 대학 교수들에게 그때그때 자문을 받거나 일을 의뢰하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순전히 강사 개인의 능력에 따라 방송이 구성될 수밖에 없어, 그만큼 절대적으로 교육적인 측면이 강화된 제대로 된 교육 방송이 어렵다. “수능 방송 강의 운영위원회”의 설치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줄 것이다.
셋째, 교과별 수능 방송 강의의 교재는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 심의에 준하는 심의 절차를 밟아 공개적으로 공모하고 선택한다. 학생들이 어쩌면 교과서보다도 더욱 열심히 공부할 자료를 소수의 (비)전공자들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다고 본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심의 과정을 통해 양질의 교재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수능 방송 강의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넷째, EBS의 수능 방송 내용을 현재의 문제 풀이 중심의 내용에서 문제 풀이를 포함한 다양한 학습 활동이 이뤄지는 내용으로 전환한다. 또한 수능 시험에 반영하는 방송 강의 내용은 국정교과서 제작 때처럼 교육인적자원부의 책임 아래 제작하고 이를 미리 학생에게 공지한다. 이 방송 내용은 선다형 문제 풀이 방식이 아닌 다른 학습 활동에 의해 제시되도록 한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시험 전에 문제를 알려주고 테스트를 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
다섯째, EBS의 수능 방송 강사진은 철저히 현장 교사로만 구성하고, 가능한 많은 교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해 시·도교육청 또는 교원 단체로부터 유능한 교사를 추천 받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이들을 훈련시키고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현직 교사가 수능 방송 강의의 주체가 됨으로써, 현장 교사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자기 계발의 동기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여섯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으로 하여금 수능 문항 제작 매뉴얼을 만들어 각급 학교에 보급하도록 하고, 교육부 산하에 수능 대비 교수·학습법에 대한 조언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한다.
교육에 왕도가 없듯이, 올바른 교육 체계를 갖추는 일에도 왕도가 없다. 비정상적인 교육 현실을 바로잡는다고 비교육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교육의 원칙에 따라 자원을 활용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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