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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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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2> 서양인의 조선관-허동현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이야기하려 하니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1660 - 1731)가 1719년에 지은 『로빈슨 크루소』(원제 :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 ~ 1745)가 1726년에 쓴 『걸리버여행기』(원제 :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이 두 권의 소설책은 영국인이 자국이 세계제국으로 등장하던 무렵에 썼고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 우월주의가 책갈피마다 짙게 배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로빈슨 크루소의 눈에는 비서구인들은 야만의 상징인 식인종으로, 심지어 서구세계의 일원인 백인종 스페인 선원들마저 악인들로 비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걸리버가 만난 키가 6인치도 안되는 소인국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아시아인들을 빗대어 조롱한 것으로 보는 것도 지나친 억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로빈슨의 표류기를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는 재미있는 사회 풍자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책은 시대의 산물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책에서 "해가 지지 않는" 세계제국 영국의 오만이 물씬 풍겨 나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세기 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졌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선진과 후진, 진리와 미신, 문명과 야만, 합리와 비합리, 강자와 약자, 타자와 자기, 백인과 비백인 그리고 진보와 정체 같은 이항 대립의 눈으로 백인종 우월의식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을 낮추어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일그러진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성,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 곳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평온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했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저, 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살림, 1994, pp. 276-277)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정직한 정부"가 들어선다면 한국인들이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인의 미래에 후한 평점을 주었던 영국인 비숍(I. B. Bishop, 1832~1904)조차 19세기 서양의 식민주의 담론과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은 없다" 이것이 개화기 한국을 둘러본 서구인들 대다수가 품은 한 세기 전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문화론과 민족성론**

물론 제한된 경험과 편견을 가진 관찰자의 머리 속에서 상상되고 재구성된 한 나라에 대한 문화론은 타자에 대한 특수성 찾기일 뿐입니다. 특히 어떤 민족의 집단적 특성, 즉 민족성은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 변해가는 추세이지 불변의 특징은 아니지 않습니까?

1986년 대학원생 시절 처음 일본에 가보았을 때 겪은 제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때 저는 큐슈(九州)대학 조선사학과 학생들과 회식을 마친 후 일본 학생들이 제 몫의 식대를 나누어 내는 소위 더치페이를 목격하고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은 참 쩨쩨하다고 고소를 금치 못했지요. 왜냐하면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신발 끈 짧은 사람이 식대나 술값을 계산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요즘 우리 젊은이들도 더치페이에 익숙하더군요. 사실 저는 자본주의가 이식된 어떤 사회에서건 산업화가 진전되고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와 같은 가치관이 널리 퍼지면 더치페이는 생활의 일부로 굳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요즘에야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미공사 박정양을 비롯한 당시 우리네의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을 질타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과 같은 서양인들도 국민국가의 소산인 위생 관념이 보급되기 전에는 우리네 선조들 못지않게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관습을 지니고 살지 않았던가요? 하이힐이 파리의 뒷골목에 뒤덮인 인분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있고, 향수의 용도가 목욕을 하지 않아 풍기는 퀴퀴한 체취를 감추기 위한 미봉의 수단이었다고도 하더군요. 남성이 길 바깥쪽에서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것이 에티켓인 요즘과 달리 길 안쪽에 남자가 섰던 시절도 있었다지요. 그 이유가 화장실이 없던 시절 늘어선 건물의 창에서 언제 날아들지 모를 오물로부터 여성을 지키겠다는 배려였겠지요. 그렇다면 한 때 명절 때만 목욕하던 한국인들은 요즘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고 있듯이 근대 과학이 발달하고 위생관념이 보급되면 바뀌는 것이 생활습관 아니겠습니까?

비숍이 예언한 대로 시민으로 진화한 오늘의 우리들은 개화기 서양인들이 남긴 우리의 특수성에 관한 관찰기록들을 편견의 산물이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세기전의 관찰자들에 의해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부정적 한국인식이 개화기와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문제를 다룰 때마다 여전히 살아 숨쉬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이러한 인식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서구인의 체험기에 보이는 일본의 부정적 영향**

저는 "한국은 없다"와 "일본은 있다"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한 세기 전 서양인들의 판정이 아누비스(Anubis)가 쓰던 정의의 저울처럼 정확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와 자치능력을 비하하는 서구인들의 체험기가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원적 뿌리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일본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일본이란 프리즘에 의해 일그러진 한국의 이미지가, 카스라ㆍ태프트 밀약이 웅변하듯 미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 이해의 유착관계를 배경으로 미국의 주류 인사들의 뇌리에 깊게 뿌리내렸던 것이지요.

예컨대 1882년이래 일본 외무성에 고용되어 여러 번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이익을 대변한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는, 1904년 한국 외부(外部)의 고문이 된 후 1907년 두 명의 애국지사―전명운(田明雲, 1884 ~ 1947)과 장인환(張仁煥, 1877 ~ 1930)―에게 사살될 때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일본의 보호 아래 한국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일본이 아니었다면 러시아가 한국을 장악했을 것이라는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는―을 전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 초청으로 1905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던 친일 언론인 케난(George Kennan)도 『아웃 룩(The Outlook)』(1905년 10월호)에 한국인을 깎아내리는 글을 실었습니다.

"한국인은 보잘 것 없을 뿐 아니라 서양인은 한국인과 더불어 정신적 동감을 느낄 것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서양인의 관심을 끌거나 동정을 살 만한 점이 없다. 그들은 두고 볼수록 게으르고 더럽고 나쁜 일을 예사로 하고 거짓되면서 엄청나게 무식하며 사람이 자기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는 데서 생기는 자존심도 없다. 저들은 미개한 야만인이요 퇴폐한 동양 문명의 썩은 분비물이다"라고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의 친일 미국인으로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예일(Yale)대학의 래드(George Trumbull Ladd, 1842~1921)교수도 "저들은 안이하기를 좋아한다는 것보다 게으르다. 사람은 희망이나 필요조건에 자극을 받지 아니하면 자연스러이 게으른 동물이지만 담뱃대를 빨면서 땅에 침을 뱉는 노동자와 농민들이나, 일하는 대낮에 드러눕기 일쑤인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인은 성나면 앞뒤를 가릴 줄 모르게 잔인하고 생명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상거래에서 신용을 지키거나, 남의 소유물을 존중히 여기는 것 같은 일은 한인 중에는 찾아 볼 수 없다(In Korea with Marquis Ito, p. 290)"고 혹평하였습니다.

이들 친일 미국인들의 악담이 균형을 잃은 것이었던 것임은 동 시대 미국인들의 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알렌은 윤치호에게 보낸 1905년 11월 30일자 서한에서 "케난이란 자가 한국에 관하여 매우 고약스런 글을 이 나라 한 저명잡지에 기고하였습니다. 내가 만나 본 사람은 다 읽은 듯 합니다. 그는 일본 훈장을 받을 공작으로 그리하였나 봅니다"라고 해 그 동기의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하였으며, 서울 주재 장로회 선교사 밀러(E. H. Miller)도 1908년 12월 9일자로 브라운(Arther J. Brown) 박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래드가 한국 체류중에 한국 실정을 직접적으로 알아보려는 태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그는 통감부 손님의 입장에서 우리들이나 우리의 사업을 보려고 왔던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보이려고 준비한 것만 보았다. 이는 편견이다"라고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일본의 대미 선전공작은 오랫동안 지속된 일본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이해의 유착 때문에 미국 조야에 쉽사리 수용되었습니다. 예컨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에게) 일격도 가하지 못하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중재에 나설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며 조미수호조약에 명시된 거중조정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습니다.

이런 연유로 "내가 이 수도에 와있는 짧은 기간동안 보고 들은 바로써 이 나라의 모든 일이 청국의 간섭만 없다면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 나라가 급속히 번영하고 산업이 일어날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청국 주차관 원세개의 방해로 이 모든 발전이 저지되고 있다"며 한국의 독립과 개화를 지지했던 딘스모아(H. A. Dinsmore, 재임, 1887~1890) 공사와 같은 몇몇 미국인의 긍정적 한국 인식은, 미국 주류사회에 전파되지 못한 채 극소수의 생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들**

한말의 의병을 이야기 할 때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지요.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휘도를 든 대한제국 군복 차림 장교의 지휘 아래 십여명의 의병이 당당히 총을 겨눈 모습의 사진 말입니다. 1907년 가을에 이 사진을 찍은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는 의병들의 전투를 직접 취재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의병의 활동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며, 동시에 의병을 양민에 대해서 노략질하는 비도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 이러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활동은 사실상 더욱더욱 커져 갔다. 한국인들은 무기를 구할 수가 없어 맨주먹으로 싸웠다. 약 2년 후인 1908년 7월, 한 일본인 고관은 서울에서 열린 특별법정에서 베셀(Bethell)씨 심문에 증언하면서, 당시 약 2만명의 일본 병력이 소우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고 있으며, 전국의 약 반이 무장봉기가 일어난 상태이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한국인들은 1915년까지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이 해에 이르러 비로소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다는 일본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산악 주민들, 평지의 젊은이들, 범 사냥꾼들, 그리고 늙은 군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초를 다른 사람은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인에 대해서 기왕에 '비겁하다'느니, '냉담하다'고 던졌던 조롱은 가시기 시작했다."(매켄지 저, 이광린 역,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 일조각, 1969. p. 121)."

캐나다인으로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기자였던 매캔지가 남긴 기록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야기와 너무도 다른 우리네 선조들의 기상을 전해줍니다.

그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와 같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항일언론 활동에 신명을 바친 베셀(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나, 매켄지처럼 이 땅에 와서 살면서 가까이에서 한국인들을 접했던 몇몇 서양인들은 일본의 선전이 왜곡된 것임을 깨닫고 우리의 잠재능력과 미래를 긍정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주류 사회의 대다수 인사들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선전에 넘어가 한국의 경제적 가치와 자치능력을 평가 절하하였지요. 따라서 이들 몇몇 서양인의 긍정적 한국 인식은, 서양 주류사회에 전파되지 못한 채 극소수의 생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호의적으로 대했음에도 서구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되돌아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한 세기 전 부정적 한국 이미지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일과 같다"는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의 조롱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세기 전 서양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한국의 이미지는 오늘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례로 아직도 한국에 파견되는 미국의 관리나 장성들에게 필독서로 한국에 대한 가이드북 역할을 하고 있는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의 『한국 : 소용돌이의 정치(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는 한국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근대사회로부터 1960년대―개정판에서는 1980년대―까지 한국의 정치를 "the Vortex" 즉, "소용돌이" 내지 "회오리바람"의 정치로 파악했지요. 그의 입론은 한국사회는 중간집단의 형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낱낱이 흩어진 개인들이 모두 중앙권력을 향해 직접적으로 달려드는―마치 회오리바람이나 소용돌이 같이 하나의 정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형국을 취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여러 조직들은 조직 자체나 조직원들이 중심축을 향해 상승하는 흐름에 참여하려고 하는 아메바적 성격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 중심축은 가정 이외에 한국문화가 만들어낸 거대한 산물이다. 조직은 유동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위계질서적 상하관계도, 조직원칙도, 지도자를 결정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도 없다. 상의하달식 지도력은 뿌리가 없고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층사회는 지도층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분리된 채 있다. 대표선출 과정에서 개인적 요소 이외의 것은 수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독재라고 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권력고립화의 원인은, 공산주의라든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 때문도, 또는 김일성, 이승만, 박정희라고 하는 인물의 성격 또는 야심 때문도 아니다. 사실 과거 조선이나 현 한국의 정치적 혼전은 이데올로기와 정책 강령, 인격 및 지도력 등을 중앙권력 획득경쟁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한국의 격렬한 정치사에는 중요한 토착적 철학이 전혀 생겨나지 못했으며, 지속적인 강력한 정치지도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도 바깥에 뿌리를 두고 발생하는 사건도 정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중앙의 이익에 관계없는 개발계획은 곧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가치는 중앙권력에 속했다. 권력기반도, 안정성도, 야심을 만족시질 수 있는 대체 수단도 없이 권력을 향한 경쟁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했다. 이 사회는 높이 솟은 원추형 소용돌이라는 특유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와같은 소용돌이 구조는 지금까지는 한국에서만 추적되고 있으며 기록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그레고리 헨더슨 저, 박행웅 등 역,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아카데미, 2000, pp. 514~515)

이 인용문에서 식민주의사관―독자성의 결여를 지적하는 타율성론, 봉건제도의 결여에서 자율적 근대로의 길을 부정하는 정체성론, 모래알과 같은 민족성으로 상징되는 당파성론―의 영향과 제2차대전 후 라이샤워(E. O. Reischauer)나 홀(J. Hall) 같은 일군의 미국학자들이 제기한 "일본근대화론"의 강한 자취를 느낀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요?

라이샤워는 일본은 "목표 지향형의 사회"이고 한국과 중국은 "지위 지향형의 사회"였기 때문에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한국과 중국은 자발적 근대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더군요. 과거제도가 채택된 지위지향형의 사회였던 한국과 중국 사회는 하나의 목표에 대한 집념보다 지위 상승을 위한 공부를 중시하므로 장인정신 같은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신이 나올 수 없었던 반면, 목표지향형의 일본은 주어진 한계 내에서 극한을 추구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기술축적이 가능했고 이 때문에 근대로 갈 수 있었다는 논리입니다. 제가 보기에 헨더슨의 "회오리바람론"은 "지위 지향형 사회론"의 모조품이자, 한 세기 전부터 유포된 부정적 한국인식이 거꾸로 투영되어 선험적으로 유추된 결과론적 해석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러한 한국 폄하론이 우파 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공격해온 미국학계의 대표적 지한파 학자 브루스 커밍스에게서도 한 세기 전 헐버트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와 같이 한국을 타자화해 낮추어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반미(反美)ㆍ반제(反帝)의 비판의식과 약소국 한국민중에 대한 강렬한 연민의 정이 심금을 울리지만, 결국 그 역시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미국인, 즉 "영원한 타자"의 눈으로 한국 "근대성"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오만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는 합리성이 결여된 "한국"과 서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근대성"을 연결시킬 수 없다는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조선후기의 역동성과 개화기의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남한의 현대사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은 예전에는 완전히 종속적이었다. 이 나라는 처음에는 식민지였다가, 그 다음에는 외국군에게 점령당했으며, 그 후 1950년 여름에 미국이 이 나라를 망각의 늪에서 구출했다"(김동노 등 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 창작과 비평사, 2001, p. 419).

그에 의하면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거대한 원조에 의해 종속적으로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보면, 분단과 동족상잔, 개발독재를 뚫고 시민사회를 이룬 오늘의 한국인들의 노력은 부정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구제기(反求諸己)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일까요?

박노자 교수님 지적처럼, 미국은 한 세기 전 우리에게 "정(情)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냉혹함과 모멸"을 안겨준 배반자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만이 아니라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도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독립 요구에 귀를 막았습니다. 심지어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우리의 자치능력을 의심해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20~40년 동안 독립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고,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은 일본의 항복을 며칠 앞두고 38도선을 그어버려 분단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와 신군부의 집권을 방조한 미국의 위정자들도 민주주의적 제 가치가 구현되는 시민사회를 이루려 했던 한국인들의 열망에 눈을 감아버렸었지요.

이처럼 미국과 관계를 갖게 된 이후의 역사를 조감해 볼 때, 미국은 우리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왜곡하는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해방 후 한미관계가 미국의 일방적 전략적ㆍ경제적 이해타산에 좌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잃은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는지요.

저는 이 시기에 옛날 우리 선조가 그토록 열망하던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쌓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중심 세계질서 속에 진출해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났으며, 다원적 시민사회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한 미국과의 유대강화와 이를 통한 우리 국익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두 나라의 관계를 본다면, 미국은 제2차대전 이후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 준 "구원자"이자 우리와 이해를 같이하는 우방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이제 또 다시 우리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외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다시 돌아온 힘이 곧 정의인 시대에 "정"에 호소하다 맛본 좌절과 배신감을 또 다시 맛보지 않기 위해 쓰라린 과거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만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줄 미국 내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 전 일본의 손을 들어준 쪽이 루즈벨트를 비롯한 주류 인사들이었던데 비해, 우리 편을 들어주었던 인사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미국인을 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바로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들은 한국이 그들의 원조와 보호를 일방적으로 구걸하는 수혜자가 아님을, 그리고 "퇴보적인 국가"가 아니라 그들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동반자임을 미국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 다시는 그들이 모멸과 비웃음으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합니다.

한 세기전 우리들은 미국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는데, 그들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그렇게 짝사랑했는데 왜 미국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을까요? "발이부중(發而不中)이면, 반구제기(反求諸己)하라."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나오는 말입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큐피드의 화살을 쏘았음에도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면, 그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기보다는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많은 정을 보냈는데 어쩜 그리도 냉정하냐고 상대를 비난만 한다면, 우리 가슴 속에는 배신감과 증오만 남을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인 것 같습니다.

이승만의 민주독재, 박정희와 신군부의 군사독재를 넘어 다원적 시민사회를 일구어내는 동안 우리들은 시민사회는 남이 만들고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만들고 지킬 때 이루어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에게 왜 우리의 국가를 아니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았느냐고, 왜 우리를 배신했느냐고 책망하기보다 왜 그들이 그러했는가의 원인을 우리 안에서 찾는 것이 보다 나은 자세일 듯합니다.

***더 읽을 만한 책**

김세중. 「G. 헨더슨, 『한국: 회오리바람의 정치』」. 『해외한국학 평론』창간호, 2000.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 이해』. 국학자료원, 2003.
신복룡.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2002.
유영익. 「19세기 말 조․미관계의 전개와 일본의 역할」.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이배용. 「서양인이 본 한국 근대사회」. 『이화사학연구』28, 2001.
조동걸. 「인간의 길을 향한 100년의 전통-20세기 한국사의 전개와 반성-」. 『한국사학사 학보』 1, 2000.
최기영. 「매캔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서양인」. 『한국사 시민강좌』34, 2004.
한철호. 『친미개화파연구』. 국학자료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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