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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붙여야 하는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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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붙여야 하는 단서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11> ‘Shawshank Redemption’

Hope springs eternal.

“희망의 샘물은 끊임없이 솟는다.”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에 부제 격으로 붙어 있는 문구이다.

1974년에 ‘왕따’ 스토리의 원조 ‘캐리(Carrie)’로 데뷔한 후 ‘Salem's Lot’, ‘The Shining’, ‘The Dead Zone’ 등 등골 서늘한 작품들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일약 호러 소설 장르의 대부로 등극한 킹은 1982년에 ‘Different Seasons’라는 제목의, 자신이 그때까지 ‘틈틈이’ 써 놓았던 비(非)호러 장르의 중편소설 4편을 묶어놓은 일종의 컨셉트 소설집을 내놓았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이 소설집은 각 중편마다 사계(四季)중 하나에 해당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사실 서로 별 연관성이 없는 소설들을 엮어놓은, 다소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라 하겠다. 이 책에 수록된 ‘Shawshank’, ‘Apt Pupil’(부제 ‘Summer of Corruption’), ‘The Body’(‘Fall from Innocence’), ‘The Breathing Method’(‘A Winter's Tale’) 등 4편 가운데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가 영화화됐다.

어쨌든 사계로 나뉘어지는 이 소설집에서 ‘Shawshank’는 봄 계절의 의미를 부여 받은 중편인데, 임자를 참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쇼생크 탈출’의 시나리오까지 직접 쓴 이 영화의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는 다산작가의 산문 속에서 근래 시네마에서 보기 드문 시를 일궈냈다. 킹의 스토리에는 물론 그의 특유의 설정과 반전과 기발함이 화끈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쩌면 다산작가가 양산해낼 수밖에 없는) 겉절이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들이 적지 않은데, 다라본트는 100페이지가 채 못 되는 분량의 이 중편소설에서 2시간20분간 지속되는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이다.

킹의 소설을 시나리오화 하면서 살릴 부분은 살리고 재구성해야 할 부분은 과감하게 재구성한 다라본트의 선택은 모두 적중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캐릭터들과 요소들 가운데, 원작에서는 두세 차례 바뀌는 교도소장을 사악한 복음주의자 사무엘 노튼으로 ‘단일화’시키고, 잠깐 언급되다가 마는 브룩스 영감의 캐릭터를 핵심적 인물로 부각시켰으며, 소설에서는 입을 막기 위해 단순히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는 토미 윌리엄스를 영화에서는 살해되도록 함으로써 극적 긴장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그리고 공예용 망치의 보관함이 되었던, 속안이 망치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도려내진 성경책도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대목이다. (앤디가 두고 간 성경책을 노튼이 열어봤을 때 펼쳐지는 페이지는 다름 아닌 ‘Exodus(출애굽기)’다.)

다라본트 감독이 살려둔 것 중의 하나가 제목의 ‘redemption’이라는 단어다. 소설은 부제가 직설적으로 선언하듯이 ‘희망’에 대한 스토리이지만, 그 희망에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 전제는 영화와 책의 원제에 모두 나오는 ‘redemption’이다. ‘Redemption’이라는 단어는 구원·속죄·보상·명예회복 등 여러 심장한 뜻을 불러내는데, 이 영화에서 이 단어가 빠진다면 그 주제의 큰 부분이 빠지는 것이 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탈출’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쇼생크’는 자의든, 타의든 죄수가 되어버린 인생, 울타리 안에 갇혀 살지만 그 안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함으로써 끝내 자신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는 스토리이다. 희망은 그러한 ‘보상’이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얘기하자면, 끝에 가서 보상이나 속죄가 없는 고뇌와 시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라본트 감독이 킹의 소설에 깃들여 있는 이러한 ‘보상’ 내지는 ‘속죄’의 의미를 간과한 채 영화를 만들었다면 ‘쇼생크’는 자칫 가벼운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국에서 ‘redemption’의 개념은 기독교적 의미의 구원, 즉 ‘대속(代贖)’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다. ‘Redeem’이라는 말은 명예 따위를 ‘회복하다’, 또는 ‘만회하다’ 에서부터 쿠폰을 상품으로 바꾼다는 뜻도 된다. 심지어 ‘Redemption Premium’(공사채와 관련된 일종의 액면 초과금)같은 금융용어에도 등장한다. 가장 기초적인 뜻은 ‘대가를 지불하고 되사다’라는 뜻이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보상’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고, ‘속죄’는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쇼생크’에서 앤디(팀 로빈스 분)와 레드(모건 프리만 분)는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러한 보상을 받는다.

희망이란 흔해빠진 말이다. 사람들은 밥 먹듯이 희망을 가지라고 얘기하고, 희망 없인 살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포자기하지 않아야 하며, 고뇌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보상이나 속죄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희망’에 반드시 붙어야 하는 단서이다. 앤디는 보상과 속죄가 있을 것을 믿었기에 희망을 가졌던 것이고, 레드는 앤디의 희망에 서서히 감염되어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와 하늘이 상징하는 그 ‘보상’을 얻기 위해 앤디는 20년, 레드는 40년을 각각 지불했다.

레드는 내레이션에서 “감옥은 동화적 세계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쇼생크’는 동화처럼 만들어진 영화다. 사실적인 듯한 교도소 생활의 묘사 속에서도 카메라의 시선은 항상 따뜻하게 느껴지고, 절망적 상황도 희망이 지배하고, 시적(詩的) 정의(poetic justice)가 너무도 완벽하게 구현되는, 깔끔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리얼리즘에는 동화적 보호막이 씌워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 정신을 차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많은 의문이 뇌리를 스친다. 앤디는 어떻게 20년 동안 방도 옮기지 않고 독방을 썼을까. 키가 한참 작은 교도소장의 옷과 신발이 앤디에게 어쩌면 저렇게 잘 맞을까.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왜 쇼생크 교도소에서는 아무도 늙지 않았을까. 태평양 바닷가에서 갑판을 손질하고 있는 앤디의 모습은 왜 30대 청년의 모습일까.

그러나 논리는 짧고 희망은 긴가 보다. 여느 작품 같았으면 불신의 중지(suspension of disbelief)에 찬물을 끼얹었을 그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속의 가장 깊은 감정들이 동요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스토리에 녹아있는 보편적 상징성, 숨쉬고 있다면 모두가 갖고 있을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갈망의 상징들이 우리의 가슴 속을 파고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징은 브룩스의 까마귀이고, 황홀한 모짜르트의 아리아이며, 언젠가 탈출구로 쓰여질 통로를 가리고 있는 가슴 풍만한 여자의 포스터이다.

이 영화의 이러한 상징성은 우리 모두를 쇼생크 교도소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들인다. 살인해보지 않았어도 살인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살아보지 않았어도 우리는 쇼섕크의 그 울타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크게 또는 작게 나를 속박하는 형식들, 나에 대한 남들의 오해, 타고난 껍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이런 것들이 우리들을 가두어 두고 있기에, 앤디 듀프레인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이고, 그의 탈출은 우리의 탈출이다. 적어도 상징적 차원에서 멕시코 해안의 지후아타네오(Zihuataneo)는 우리 모두가 여생을 보내고 싶을 마지막 동네이다.

우리는 번뇌와 아픔과 억울함과 상실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살면서, 막연하게나마 앞으로 우리에게 내려질 보상과 속죄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Redemption’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그런 기대가 없다면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은 아니더라도 심심찮게 억울함이 느껴지는 인생, 사회의 박해를 받는 그런 인생에서 헤어나고픈 사람들, 얼마든지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가 수인(囚人)이며, 지금 자신을 죄이고 있는 삶에서 탈출할 궁리를 하고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앤디와 레드의 주식을 갖고 있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 간달프가 그랬던가. 희망은 애초부터 없었고, 어리석은 자의 희망이었을 뿐이라고. (“There never really was much hope. Only a fool's hope.”)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뇌와 시련을 뚫고 나가면 거기 또 고뇌와 시련이 있고, 그것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결국 끝에 가서는 승리도, 속죄도, 보상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희망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긴긴 겨울에 이 마음 지쳐 있어도, 오늘도 따스한 지방을 꿈꾸고, 포옹하는 두 친구를 에워싸는 끝이 안 보이는 백사장을 자꾸만 떠올리는 것을.

I hope I can make it across the border.
I hope to see my friend and shake his hand.
I hope the Pacific is as blue as it has been in my dreams.
I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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