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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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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2>

논쟁을 재개하며 <하>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프레시안: 이제 시선을 현재로 옮겨보죠. 한국은 지난 50년동안 나름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작년 대선에서는 반미 레토릭을 구사하는, 즉 자주적 입장을 표방하는 인물을 대통령을 뽑기도 했습니다. 취임 후 언행이나 정책을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어쨌든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사진 6>

***우리의 지향점은 반미가 아닌 반외세가 돼야**

허동현: 1970년대에는 반정부 시위보다 반미 시위를 더 문제시했던 적도 있었지요. 촛불시위가 상징하듯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른 자긍심이 커진 데서 반미 의식의 확산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 시민사회가 미국에 대한 동등의식을 갖고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사회가 진정한 주체의식과 자긍심을 가지려면 미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의 우리 시민들에게 대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잣대로 재어서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우리 시민사회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상상하는 국민 또는 민족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 시민에게 가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듯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북 동포들에 대한 인권 유린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고 이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우리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한 세기 전 불행한 역사의 산물로 우리를 둘러싼 열강―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네 나라에 모두 수십만에 달하는 교포사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시민사회가 재미ㆍ재일 동포사회에 비해 재중ㆍ재러 동포사회에 보이는 관심과 대우는 실로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국가와 시민사회가 진정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면, 불행한 과거사의 산물인 재외동포들과 북한주민들에게 우리 시민들과 동일한 관심을 보이고 대우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재중ㆍ재러 동포들에 대한 국적 부여문제나 탈북 동포들에 대한 처우를 놓고 볼 때 우리 시민사회가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지금 고구려라는 기억속의 영토를 놓고 중국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자존의식을 갖고 있다면 재중 동포나 탈북자나 똑같은 국민으로 취급해야지 왜 내칩니까. 우리 시민사회나 시민단체들이 그들에게 보이는 상대적 무관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촛불시위에서 보이는 미국에 대한 자존의식과 재중ㆍ재러ㆍ탈북 동포에 대한 시민사회의 무관심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아직 우리 시민사회가 미성숙했음을 절감합니다. 박노자 선생님이 최근에 낸 책제목처럼 우리는 ‘하얀 가면의 제국’ 사람들로 허위의 자존의식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다시 돌아온 야수의 시대, 일본 우익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오늘 우리 시민사회가 진정한 자긍과 자존의식을 갖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일본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잘 나타나듯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한일간에 한중간에 전개되기 시작하였지요. 이들의 민족주의와 정면 대결하는 방법보다는 두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사회와의 국제적 연대를 통한 화해와 협력의 신시대를 모색하는 개방형의 열린 민족주의를 갖는 성숙한 우리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첩경일 것입니다.

이러한 열린 민족주의가 야수의 시대에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지켜 줄 최소한의 방패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구와 일본이 수세기전과 한 세기 전에 이룩한 국민국가를 아직도 못 이룩했기 때문이지요. 탈북자와 해외동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상속의 국민개념과 현실의 국민인식이 충돌하며 우리와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동포와 재외동포를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EU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유럽은 국민국가를 넘어 지역 공동체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안의 통합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체라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 주위를 보면 중국과 일본이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모색하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 안의 지체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지체라는 이중의 지체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의 강국들이 야수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갖기 전에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갑옷을 먼저 벗을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 시민사회의 고민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힘으로 정면 대결할 수도 없으니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옆의 두 강자에게 더불어 살기를 설득하는 개방형의 열린 민족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한 세기 전 프랑스와 영국의 쟁패 속에서도 국가를 지킨 태국이나 냉전 하 동서 양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며 독립을 지킨 핀란드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동현 "오늘날 최대 위협은 일본 우익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폐쇄적 민족주의"**

프레시안:‘다시 돌아온 야수의 시대’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미 야수의 시대는 19세기부터 지속된 것 아닙니까?

허: 물론 19세기는 야수의 세기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얼마 전까지 존속한 냉전체제 때는 큰 야수 둘의 대결장이었기 때문에 힘보다는 도덕률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절대 강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나를 따르면 너를 보호해준다”는 이런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죠. 예를 들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를 택하면 이를 쫓는 국가집단 내에서는 서로를 형제로 보았지요. 가족관계에 비유하자면, 작은형이 막내동생을 때리면 큰형이 “야! 그러지 마라”라고 개입할 수 있는 게 냉전체제에요. 그러나 냉전이 붕괴된 지금은 털끝만한 이익을 놓고 형제간에도 힘으로 다투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제 세계는 이데올로기나 도덕이 아닌 힘에 의해 규율될 뿐이지요. 가장 힘이 센 자가 군림하는 시대.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게 당연한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물론 더불어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고 지식인으로서 이 세상이 인간의 얼굴을 띠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 보면 가슴 한 모퉁이가 공허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죠. 간어제초(間於齊楚)라는 고사성어가 웅변하듯, 정전제와 왕도정치를 채택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는데 열심이었던 등나라는 결국 망국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등나라와 같은 소국이 아니라 제나라와 초나라 같은 강자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귈 수 있는 것이지요. 강자가 바뀌지 않는데 약자의 이상 추구란 항상 공허한 것이지요.

박노자: 두 가지 얘기할 것 중에 첫 번째는 현재 세계 체제 속에서는 미국의 역할이 달라지고 한국의 대미관계 혹은 대중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민족주의를 버릴 때냐 (사실 국민주의라고 해야죠. 민족주의라기보다는) 하는 문제입니다. 첫째는 남한은 1945년에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상황 전개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되지 않았습니까?

<사진 7>

허: 저는 박노자 선생님과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체제를 재편하는 와중에 우리가 타율적으로 편입된 것일 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주체로 놓고 우리를 피동적인 객체로 놓고 역사를 보면 우리 근ㆍ현대사가 너무 처참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사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 재편과정에서 주체적인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수립이 미국의 세계체제 재편과정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해도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미국의 의도대로만 움직인 괴뢰정권이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승만 정권의 대미외교를 보면 오히려 역대정권들 중 제일 자주적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박노자 "정치담론적으로 우리가 미국 하에 있지만 경제적 기반은 중화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박: 미국 중심의 체제에 편입됐다는 것은 물론 미국이 찍어 누르는 걸로만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 한국의 독립운동의 우파를 본다면은 이미 대미관은 상당히 숭미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그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안창호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안창호가 필리핀에 가서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이 왜 이리 자유로운지, 마음대로 미국을 욕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감동에서 여행기(比律賓視察記, <삼천리> 제5원 3호, 1933년 3월)도 썼습니다. 미국에 편입된 것은 미군이 들어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독립운동 우파의 주체적인 숭미적 움직임도 주요한 역할을 했죠.

그런데 대만, 싱가포르까지 중화권에 포함시키자면 지금 이미 대미무역량보다 대중무역량이 훨씬 커요. 경제적으로 동아시아적 블록(block)화가 이미 형성되고 있어요. 한국의 경제 상황의 가장 큰 변화라면 제조업체의 중국 이전입니다. 아직은 정치담론적으로 우리가 미국 하에 있지만 경제적 기반이 중화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이승만의 대미로비능력은 뛰어났으나 미국에 대한 주체적인 비판과 의식이 어려웠습니다. 50년대 <사상계> 같은 잡지를 보면 민주주의는 즉 미국이고 곧 선진이다 라는 인식 하에 민족주의라는 말조차 잘 안 나와요. 민족주의는 선진적이지 못하다는 등식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중화권에 편입되어 가는 시점에 한국이 구조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현상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우리가 미국의 모든 것을 숭배했듯이 지금 중국의 경제 성장을 숭배하고 미국의 끔찍한 이면에 무관심했듯이 중국의 경제 성장의 이면에 대해서는 기초지식도 비판 의식도 없지요. 중국에 대해서 실정도 모르고 제대로 비판할 줄 모릅니다. 비판하기는커녕 중국 근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중국 민족주의 담론에 대해서 전혀 관심조차 없어요.

허: 박노자 선생님의 분석은 대륙세력이 강할 때는 대륙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해양세력이 강할 때는 해양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식민주의사관의 타율성론과 비슷한 이야기처럼 들릴 소지도 있다고 봅니다. 중국세력의 팽창을 주된 변수로 놓고 이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식의 접근은 한국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이 미국을 추종하는 '하얀 가면'을 썼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가면은 미국이 억지로 씌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서 스스로 쓴 것이란 말이지요.

박: 그게 제일 무서운 거죠.

허: 비서구 지역에서 한국만큼 프로테스탄티즘이 번성한 데가 없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한국은 이미 서구보다 더 서구적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자주를 얘기하는 것은 사실은 미국에 대해 대등하게 대접해달라는 요구지 미국을 벗어나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가치는 미국적 가치이지요. 사실 촛불시위에 보이는 반미의식도 뒤집어 보면 미국과 자신을 동일시한 데서 온 한국인의 열등의식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만큼 컸는데, 너희와 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왜 아직도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근대이후 중국의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시민사회는 개발독재 시대의 전체주의를 넘어 개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중국은 아직도 박정희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전체주의의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인단 말이지요.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중국을 상품시장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개발독재의 질곡을 뚫고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에 진정한 시민사회가 어서 도래해 두 나라의 시민사회가 공동의 번영을 위해 현안에 대해 대화하고 협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백 년 전과 같이 다시 힘이 지배하고, 열강이 우리를 둘러싸고 쟁패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 다시 돌아왔거든요. 한 세기 전과 유사한 힘의 쟁투가 전개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주권과 독자성을 유지하느냐가 가장 긴급한 과제이겠죠. 열강들 사이에 교차하는 이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책략은 무엇일까요?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미국에 일방적 짝사랑을 퍼부었던 이유도 미국 쪽이 우리 주변의 다른 열강보다 한반도에 대해 덜 탐욕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냉전이 깨진 후 동북아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갖는 전략적 이해의 강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 년 전에 우리가 쓰고 싶어도 못 썼던 미국이라는 카드를 이제는 쓸 수밖에 없지 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박노자 "미국의 위선과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 모두 비판할 수 있어야"**

박: 민주적 가치의 상당 부분은 이미 우리에게 어느 정도 상식화돼 있지요. 우리가 경제적으로 중화권에 편입돼도 담론적으로 편입될 수 없는 이유는 중국의 담론이 현재 공격적 민족주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만약 보편선이 담보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면 몰라도요. 지금 중국에서 ‘개명전제론’을 주장하는 양계초의 글들이 다시 대량 출판되고 있거든요. 이 ‘개명전제’가 사실 독재거든요. 1906년에 양계초가 내놓은 ‘개명전제론’이 등소평 개혁에서 하나의 청사진이 된 것입니다.

양계초의 논리는 박정희와도 연결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지배담론에 우리가 편입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이미 그 단계를 지났기 때문에요. 경제적 연관이 밀접했음에도 담론적으로는 한국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려면 중국을 등거리로 다뤄야 합니다.

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박: 그리고 우리가 미국 영향권에 편입됐던 당시에 하지 못했던 미국에 대한 주체적인 비판을 중국에 대해서 거침없이 할 줄 알아야지요. 얼굴이 돼버린 미국적 가치 중에는 미국이 전혀 실천하지 못한 것이 많아요. 예를 들어 인권은 미국이 하나도 실천 못한, 종종 외교적으로만 이용되는 명분일 뿐이죠.

허: 요즘 미국의 주도하는 네오콘(neo-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과 일본의 보수 우익이 말하는 대외 침략 논리가 똑같아요.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에 대해 네오콘이 주장하는 논리는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흉기론”과 내용과 논리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열강들이 한반도를 장악하면 한반도는 강도의 손에 들린 흉기와 같이 일본열도의 가슴을 겨눌 것이기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강도의 손에 들린 무기를 뺐는―한반도를 자기 영역화 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자위라는 논리인데, 이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적성국가와 테러조직에 대한 선제공격 정책을 선언한 네오콘의 전쟁 옹호 논리와 동일하지요.

현재 미국을 주도하는 네오콘의 모습은 과거 냉전체제 미국을 이끌던 세력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요. 네오콘은 힘이 곧 정의라고 믿으며 무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요.

<사진 8>

박: 이런 미국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에 대한 종전의 자세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중국은 힘깨나 쓰는 나라가 됐고 이미 고구려사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 같은 만만한 나라는 얼마든지 찍어 누르려고 하고 있거든요.

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도 북한을 중국 지방사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것인데, 이는 우리의 역사 기억에 대한 침략일 수 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갑작스런 북한붕괴가 가져올 힘의 균형의 붕괴 가능성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처럼 북한이란 입술이 사라졌을 때 중국이라는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고 보는 생각이지요. 적어도 북한지역에 자국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들이지 않기 위한―연고권 주장을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가 짙다고 봅니다.

박: 그렇죠, 다 편입하려고 그러는 거죠. 최근 북한 국경에 중국군 15만을 배치한 것도 주의해서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허: 북한지역은 고구려의 강역이니 북한 붕괴 시 이를 비적성지역으로 만들어 완충지대를 두겠다는 것으로도 보이거든요. 백 년 전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 아래에서 한중관계는 힘이 우선하던 관계가 아니었지요. 대국이라 해도 힘이 있다고 힘으로 누르기보다 아비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동생을 대하듯 일종의 보호자라고 해도 좋았겠지요.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우리에게 침략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지요. 지금 냉전 붕괴이후 북한과 중국의 관계 변화는 백 년 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 담론적으로는 여기에 과감히 맞설 필요가 있죠. 민족주의적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중국 민족주의의 한계를 우리의 견지에서 지적하는 게 가장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한국의 위치는 민족주의를 넘을 수 있는 수준이 됐어요. 이 견지에서 중국 민족주의의 조급성과 그 억압성을 한국학계가 과감하게 분석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담론적인 중국민족주의 해체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허: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어깨를 짓누른 두 개의 과제가 있었지요. 반봉건(근대만들기), 반외세(침략배격)이지요. 그런데 동시대의 서구인들 같으면 근대 만들기만 하면 됐어요.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난제를 동시에 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백 년 전의 지체가 오늘의 우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이 땅에 사는 지식인의 양식에 비쳐 볼 때 민족주의로 포장된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이러한 노력이 허무해진단 말입니다.

유럽이 국민국가를 해체하는 노력을 보이는 이때 우리는 국민국가 만들기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유럽이 지역 통합을 달성한 이때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자국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자민족 우월주의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지체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지체이겠지요.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지식인이자 동아시아 지역의 지식인으로서 우리와 우리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이중의 과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 세기 전 우리 선조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봅니다.

박: 동아시아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도모하자면 한국지식인들이 중국 민족주의의 분석과 해체와 함께 중국의 여러 가지 야만적인 행위들을 관심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양계초 같은 사람들도 티베트 소유권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말했거든요. 그것이 중국 근대 만들기의 시작이죠. 중국 민족주의의 실천과정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티베트 현대사부터 배워야 합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를 통해 미국이 무엇인가 알았듯이 이제는 중국의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가를 같은 각도에서 배우는 것이 우리의 주체성 확립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중국에 대한 분명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입장, 민족주의를 넘을 줄 아는 성숙된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등거리외교나 담론의 상대주의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미국의 최근의 석유약탈전쟁에 대응할 때는 대응모델로 참고해 볼만한 것이 독일, 프랑스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상황과 위치가 다르지만 한국도 WTO가입한 나라잖아요.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미제의 보복이 예상된다면 과연 그 실상은 어느 정도일지 정확하게 실제적 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했죠.

‘이라크 파병 국익론’을 이야기하는 쪽에서 미국의 경제 보복이 매우 두렵다는 것이 중요 논거 중 하나인데 WTO 체제에서 그들이 가할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대략 어느 정도 되는지 일단 구체적으로 실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등거리외교가 젤 중요하지요. 중국과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미국 예속관계라는 잘못된 유산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미국, 유럽을 이용하면서 담론적으로, 외교적으로 중국을 견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동현 "중국ㆍ일본 견제하려면 미국과 제휴할 수밖에 없어"**

허: 제 생각으로는 우리 주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일본이 우리와 더불어 살 마음을 가질 때까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제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미국 이외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쓸 패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중국과 일본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네오콘들의 세계전략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현재 미국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최전성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무너지지 않는 제국은 없으나 미국이 우리가 사는 당대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이 지배하는 야수의 시대에 최악(最惡)과 차악(次惡)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될 때 어떤 세력과도 전략적 제휴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선악을 기준으로 한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적합한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박: 다만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급상승하고 현재 미국경제는 점차 무너져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허: 제 생각으로는 고구려에 대한 기억의 침략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상징하듯, 앞으로 우리의 생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은 미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오리라고 봅니다. 이는 백 년 전과 비슷해요. 이 때 우리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결국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프레시안: 실질적인 위협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것에 박노자 선생님은 동의를 안하시는 것 같은데요?

박: 위협이라기보다는 일본 같은 경우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지금 일본정권은 대미추종세력이거든요.

허: 백 년 전에도 일본은 영국추종세력이었지요. 그 때 일본을 영국의 번견(番犬), 집 지키는 개라고 불렀지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영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이리와 같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충직한 개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던져 준 먹이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 북핵문제가 잘 안 풀리는 방해요인으로 미국을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단극복을 진짜로 미국이 방해하는 겁니까?

허: 북핵은 공격용 무기라기보다는 대미협상용으로 북한이 택한 최후의 카드이자,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유일한 티켓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을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북한이 처한 위기가 그만큼 크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미구에 올지도 모를 북한 붕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동안 통일에 대비해온 독일에서도 동독 사람들이 통일후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의 경우 북한 주민들이 느끼는 좌절과 소외는 몇 배는 더 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 시민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마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안의 이익집단간의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요. 저는 원칙적으로 남북한의 통일, 한 세기 전에 이루지 못한 진정한 국민국가의 수립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로 먼저 우리 마음속의 차별의식에서 놓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을 우리와 갈라 차별하면서 통일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내부 식민지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이 북한 주민들을 우리와 동일한 국민으로 볼까요? 아마도 식민지 백성으로 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북한주민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예상되는 이런 식의 통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켜 북한 붕괴 이후 연고권을 주장할지도 모를 중국이나, 피를 나누었으니 북한은 우리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나 식민지를 노리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박: 중국위협론에 대해 좀 얘기해볼께요. 지금 중국은 외자에 의한 종속형 성장을 급속하게 이루고 있는데 재밌는 것이 외자 중 80%가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화교자본이에요. 외자종속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중화권 안에서의 역학 관계입니다.

허: 화교자본이라고 하지만 국민국가 차원의 자본이라기보다는 이미 세계자본이고 중국은 이미 세계 체제에 속했다고 봐야합니다. 외환보유고는 제일 높지만 앞으로 경제위기가 터질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환보유고가 높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서방 자본의 투자규모가 크다는 것이고 이는 역으로 중국이 자본투자를 통해 얻는 과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자본투하에 따른 이익 창출이 원활하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착취강도가 그만큼 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경험한 개발독재 시절 독재정권은 일종의 외국자본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중국의 집권세력도 외국자본의 관리자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외세와 이익을 나누고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개발독재세력이 먼저 외세와 마찰이나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후세인도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개발독재 세력이었고, 먼저 미국에 도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계체제에 포섭된 주변부가 중심에 도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만약 주변부가 중심에 도전할 때 마주치게 되는 현실은 현재의 이라크의 경우가 대변한다고 봅니다.

박: 중국의 성장기는 우리의 60년대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이 제일 필요한 것이 자본과 기술이고 중국입장에서 보면 한국자본은 화교자본 못지않게 중국 친화적이고 관리 시스템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이 중화경제권에 편입돼도 홍콩처럼 내부적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허 한국기업들이 중국 많이 가는 게 시스템이 한국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전쟁에 관해서라면 중국은 지금 전쟁하기 어렵지만 미국입장에서는 중국이 위협이 되거든요. 게다가 미국은 전쟁 안하고는 살 수 없는 나라죠.

미국에서 군사기업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가 망하거든요. 지금 미국 제조업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 군수 기업체 말고 어디 있습니까. 지금 미국은 중국에 투자하면서도 견제하고 가상적 적 중의 하나로 파악하는 상태입니다. 중국 군대 현대화가 이뤄지기 전에 -만약 네오콘 정권이 지속된다면- 미국이 대북침략을 통해 중국을 도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죠. 위협을 얘기하자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로 간다해도 우리 내부의 민주 질서가 위협받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즉,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잠재적 도발은 분명히 우리 생존에 대한 최대의 위협입니다!

허: 저는 앞으로 어떤 정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우리의 생존을 가지고 미국이 장난하지 못하게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반도 문제를 놓고 6자회담이 가능한 것도 이 곳이 미국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이거든요. 이는 이라크와 북한이 미국에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승부를 가른다는 것은 미국입장으로서도 버거운 일이지요. 한반도에 대해 이해를 갖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의 눈치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미국입장에서 보면 이라크가 먹음직스러운 닭다리라면 북한은 먹으려 해도 먹잘 것이 없는 계륵이나 닭목이예요.

미국이 보기에 북한은 먹을 고기도 별로 없는 데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게다가 북한은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협상용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북한에게는 훌륭한 갑옷일수도 있지요. 일단 북한이 사회주의권이 다 붕괴된 이후에도 이렇게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북한 나름대로 우수성이 있는 거죠. 핵과 미사일이 상징하듯 과학기술력도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것이구요.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 중심의 눈으로만 한반도 문제를 볼 수 없는 북한 나름의, 남한 나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백 년 전과 오늘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를 둘러싸고 외세의 쟁패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백 년 전과 같지만 다름이 있다면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사용할 창과 방패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백 년 전의 경험을 거울삼아 우리의 생존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힘 있는 분들께 역사공부 좀 하라고 해야하는데..(웃음)

***박노자 "몰락해가는 미제의 발악이 제일 두려워"**

박: 결국 우리의 과제는 이미 이루어낸 경제, 시민사회, 내부 민주주의 성장 등을 바탕으로 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지요. 허교수님 같은 경우는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과 어느 정도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이시고 저는 주체성은 미국권, 유럽권, 중화권으로부터 중립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견차라면 차이입니다.

허교수님은 동아시아 세력권내의 역학관계를 가장 큰 위협으로 보시는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지금 몰락해가는 미제의 발악이 제일 두렵습니다. 일제 말기도 생각나구요. 지금 우리가 동아시권에서 해야할 일은 우리 혼자 민족주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담론적으로 가시적 움직임이 별로 없는 중국의 민족주의에 메스를 가하고 중국적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이면을 지적하는 일이겠죠.

허: 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익 집단이나 정파들이 털끝만한 이익을 놓고 끝없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폐해를 넘어 모두가 더불어 사는 다원적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아무리 큰 수라 해도 0을 곱하면 0이 되어 버리는 곱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정치와 사회를 곱셈에 비교할 때 자기 몫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다고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자기가 0이면 뭘 곱해도 0이란 말이지요. 자신의 몫 남과 나눌 때 우리 사회의 곱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나누려고 할 만큼 공동의 빵도 커져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 백년전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했잖아요. 개화파하고 위정척사파하고 어디 같은 자리에서 토론이라도 한 적 있습니까

허: 박노자 선생님은 거시적 입장에서 세계체제론적 시각에서 조망하시니까 오늘의 세계를 미국과 중국의 다툼을 주된 변수로 우리를 종속 변수로 놓고 보시는 것이지요. 저는 백년 전의 경험을 보자면 영국과 러시아라는 다툼에서 일본이 영국에 종속되었지만 그 대가로 한국이 먹이로 던져졌듯이 세계체제적 시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동아시적 맥락과 역학관계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인 것이지요.

프레시안: 두 분이 강조점은 다르지만 주체성 확립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합의하시는 듯합니다. 두 분 내공이 대단하셔서 앞으로 10시간도 거뜬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요 기본적으로 문제의식이 같다면 앞으로 연재를 통해서 가급적 공통분모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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