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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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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

논쟁을 재개하며<상> 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노자ㆍ허동현 교수가 다시 만났다. 지난 해 프레시안을 통해 '한국근대 1백년 논쟁'을 벌였던 두 역사학자는 올해 다시 논쟁을 재개하기에 앞서 2003년 마지막 날, 프레시안 본사에서 대담을 나눴다. 박ㆍ허 교수는 이날 1시간반에 걸쳐 '한반도의 지난 1백년'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지난 해 논쟁은 <우리 역사 최전선>이란 제목의 책으로 묶여 지난 해 출간됐다. 두 교수는 이번 대담을 시작으로 '백년 전 열강이 본 우리, 우리가 본 열강', '신여성, 기생, 영화, 불교, 이광수 등 친일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등에 대해 격주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두 분의 대담을 2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한국근대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프레시안: <우리 역사 최전선>은 많이 나갔습니까?

허동현: 만 부 찍었습니다. 나름대로 선전했죠. 박노자 선생님 책은 기본적으로 3-4만부는 나가는데 제가 같이해서 만부로 줄었죠(웃음). 역사 서적이라 아무래도 사회과학만큼은 독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노자: 역사 관련 서적은 아무리 단순화시켜 쉽게 다룬다고 해도 어려운 면이 있어요.

프레시안:'백년 전 역사논쟁'을 프레시안에 연재하시면서 댓글 등 독자반응이 어땠습니까?

허: 저희 글에 올라온 댓글들을 보면서 프레시안 독자 중에 '지식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수준 높은 댓글들을 접할 때는 그 댓글에 답글을 달고 싶기도 했습니다.

박: 일부는 전체주의적인 사관을 가지고 비판이 아닌 일방적인 비난을 하는 분도 계셨지만 그 부분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사실 확인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어 제대로 못 쓴 부분이 있을 때죠. 또 저도 모르게 서구적인 관점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서구적 관점으로 재단했거나 역사의 복합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을 독자가 지적할 땐 저도...모골이 송연했습니다.

프레시안: 백 년 전 경험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문제와 대응에 대해서 논쟁이 막 시작되려다 끝나지 않았나해서 아쉬운 감도 있었습니다. 논쟁을 하시면서 백 년 전 역사,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나 지향 등에 있어서 두 분이 합의하신 부분이 있습니까?

<사진 1>

***보는 주체에 따라 '다양한' 역사 가능, '하나'의 '진리'는 있을 수 없어**

허: 백 년 전과 오늘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항을 통해 살펴봤지만, 사실은 공통분모 찾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려 했던 것이거든요. 독자들도 저희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같지 않느냐 하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박: 저희들이 합의한 부분이라 한다면 사관의 문제에 있어 진리의 상대성 부분입니다. 역사도 역사를 보는 주체에 의해 서술되는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입니다. 그 내러티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주체들이 그만큼 다르다는 얘기지 왜곡이다 진실이다 하는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거든요. 하나의 역사를 상정하고 맞다-틀리다 싸우는 게 아니라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에 대해서는 합의하고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 질서에 대한 접근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질서가 이제는 막다른 골목으로 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현재의 입장을 통해 백 년 전 한국인들의 눈을 알게 모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에 따라 역사를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어쨌든 현 세계질서에서 한국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근본적인 전제로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역사를 보는 눈과 내러티브가 다르죠. 다른 내러티브들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보충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독자한테 보여주면 역사적 상대주의와 상대성 원칙에 의거한 똘레랑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생길 것 같습니다. 사실 왜곡이 없는 이상 사관의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진실이다 왜곡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구요.

<사진 2>

***"지금의 한국, 세계체제 냉전 질서 하의 결과물", "우리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인정 안하는 논리"**

프레시안: 수정주의 사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냉전 이후 한국의 경제적 성공의 원인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많습니다만 허교수님은 우리의 독자적 능력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근면함도 사실이지만 한국이 냉전 질서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서 휘둘린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허: 저는 수정주의 사관이나 세계 체제론적인 인식을 갖고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 대부분이 이러한 사관과 인식 하에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수정주의사관은 미국사회의 건강성을 모색하는 진보적 학자들이 미국의 외교정책이 제국주의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이고 세계체제론도 미국 지배하의 세계질서를 극복하려는 대안 찾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본 게 아니라 바깥의 눈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관과 인식을 갖고 한국현대사를 보다 보면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역사이자, 극복되어야 할 역사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아까 박노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역사를 보는 눈과 내러티브는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저는 세계체제론적 시각을 갖고 보더라도 2차대전 이후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다시 중심부(?)로 고속 이동한 경험은 우리사회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중심부의 자본과 이곳의 개발독재와 재벌 세력의 야합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지금 우리의 성공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요인을 찾는 눈과 서술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개발독재와 재벌 세력들이 중심부 자본과 야합해서 우리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우연한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본다면, 한국은 존재하지 말아야 할, 정당성이 결여된 나라가 돼버려요.

저는 그런 인식에 반대하는 거죠. 오늘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이룬 우리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시민의 눈으로 우리가 거둔 성공의 겉과 안, 공(功)과 과(過)를 균형있게 서술해야만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우리 현대사의 오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 시민사회가 거둔 성공의 역사를 자긍하는 눈과 서술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죠.

<사진 3>

프레시안: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는 냉전질서 하에서 독특한 위치로 인해 소위 '안보주권을 희생하고 경제적 실리를 얻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 물론 우리가 세계체제의 중심인 미국의 쇼케이스나 반공의 보루 역할을 하면서 얻은 게 있습니다. 그러나 수정주의 사관으로 한국 현대사를 보는 브루스 커밍스의 말처럼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그 꼭두각시인 정당성이 결여된 남한의 독재정권에 미국 시민들의 피땀인 세금을 퍼붓는 과정에서 군부와 재벌의 야합에 의한 천민자본주의가 우연하게 발전했다는 식의 말에 동의하기 싫은 것이지요.

미국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상품을 지키고 전시하는 보루나 쇼케이스를 원한 것이지, 한국의 진정한 성장, 즉 다원적 시민사회의 구현과 산업화를 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시민사회가 거둔 성공을 개발독재와 재벌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이 거둔 성공의 주된 원인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흘린 땀과 피의 대가에서 찾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수정주의 사관이 풍미하던 1980년대에 우리 사회의 현실―광주 학살과 같은―을 돌이켜 보면 수정주의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인식이 분명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민사회를 이룬 오늘의 입장에서 조명할 때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흘린 피와 땀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민력 성장의 역사로서 시민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노자, "최소한의 합리성 지닌 관료집단과 '선비정신' 지식계층이 한국 발전 이끌어"**

박: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세계체제와 한국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때 한국의 독자적인 성장요인으로 적어도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국은 다른 세계체제 주변부 국가에 비해 관료체제 전통이 깊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단점이 될 수도 있으나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 장점도 될 수 있거든요. 우리 보통 고시 제도를 많이 욕하잖아요. 그래도 평가해줘야 할 부분은 세계 체제 주변부 어디에서도 국가 공무원 채용이 그나마 이 정도의 최소한의 합리성과 공공성을 가지는 나라는 거의 한국이나 기타 동아시아권밖에 없거든요

러시아나 동구라파 같은 경우는 공공연하게 공무원 채용시 뇌물이라든가 배경 이라든가 등의 사적 네트워크가 개입되는데 한국사회는 대단히 사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연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공무원 임용과 승진이 어느 정도 공적으로 이뤄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70-80년대의 군부독재를 좋아할 일은 없지만 군부독재가 그나마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전부터 어느 정도 합리성과 독립성, 공공성을 가진 관료 체제의 골간이 이미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위에 군벌들은 막말로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해도 중간 경제 관료의 긍정적인 역할들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제가 이름 붙였는데- 한국적인 유교적 이상주의라는 근본 심성이죠. 그런 것이 결국은 민주화운동의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지식인들한테는 교육받고 독서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이 주입되는데 이것은 바로 의(義), 의인, 양심입니다. 예컨대 독립운동의 역사나 전통사회의 역사를 읽을 때 지식인들이 이런 가치를 강력하게 주입받습니다. 60-7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이상이 비타협적인 독립군이 되는 시기가 있었죠.

'부조리한 사회와 타협하면 나쁜 것'이라든지 '본인의 출세만 도모하면 나쁜 것이다'라는 것을 상식으로 익혔던 것이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같은 관념이 80년대까지 지식인들의 심성 밑바탕에 아직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표현할 때는 민주주의, 독재타도, 민족주의적 수사로 표현됐지만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선비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살 수 없다'는 관념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를 바로잡든지 어쨌든 간에 사회와의 타협은 선비로서 있을 수 없다'는 그런 의, 의인 정신이 한국사회를 여기까지 끌고 온 원동력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 같은 경우 일인당 소득이 한국보다 높지만 지금도 박정희 시대와 흡사한 독재 정권 하에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이 통치 형태에 있어서 제도적 민주주적인 형태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 저변에 유교적 전통 심성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유교 전통 자체는 두절이 됐는데 심성은 그렇게 쉽게 안 바뀌죠.

***허동현 "관료들의 최소한의 공공성을 지키게 한 민력의 성장은 2공화국 때부터 이뤄져"**

허: 이제 논쟁이 좀 본격화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의 독자적 성공 요인에 대해 박노자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에 이견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한국의 성공을 이끈 견인차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말하셨는데 사실 공무원 공채제도의 확립을 처음으로 모색하고 실행했던 정권은 제2공화국 장면정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박정희 시대에 군인들의 집권이 있었기에 한국의 산업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이지만, 그 성공 요인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장기경제개발계획, 관료의 공채제도, 국토개발사업 등이 실제로는 9개월밖에 존속 못했지만 제2공화국 때 입안되고 시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시민사회의 성장을 억압하고 우리의 미래를 가불해 간 군사정권이 오늘 한국의 성장을 가져온 공로자로 보는 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상명하달의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관료 주도의 일방주의적 경제개발정책을 따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하면 민과 관이 동등한 입장에서 난상토론을 벌이며 국가의 경제정책을 함께 토의하고 고민한 제2공화국의 기억이 소중한 것이지요.

제 생각으로는 군사정부가 관료의 공채제도를 그나마 유지한 것도 시민들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민력의 신장이 있었기에 군사정권 하에서도 관료제도가 그나마의 공정성과 합리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박: 그게 어디까지나 과거제도가 천년 이상 존재했던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라서 '민의(民意)와 같은 공공성 기대 심리가 가능한 것이지요. 군인들이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군인의 횡포와 독재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에 의해서 관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측면이 있는 거죠.

<사진 4>

***'의리'는 사적 집단의 집단적 이기심일 뿐, 우리 조상들이 강조했던 '의'와 달라**

허: 또 하나 다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박노자 교수님이 유교적 심성, 즉 의(義)가 근대 이래 한국 지식인들의 의사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지식인들도 공적인 '의'보다 사적 관계인 소위 '의리'를 앞세우는 것 같더군요. 소위 '노빠'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추세로 보면 어떤 정치집단이건 자기 무리끼리의 '의리'를 '의'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사회운동을 이끈 운동자들에게 선비정신의 계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지사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의'와 '공'을 진정 중시했다면 오늘과 같은 정신적 공황사태를 맞지 않았을 테지요. 근대에 들어서서 한국사회가 물질을 숭배하는 물신(物神) 지배하의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일구어 낸 우리가 잃어버린 게 있다면 바로 '의'와 '공'을 소중하게 여겼던 정신적 가치겠지요. 사적 집단간의 '의리'만 판치는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한 세기 전 선비들과 같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하길 바랄 뿐입니다.

박: 장준하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을 보면 그래도 지사정신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문제는 그 '의'의 정신은 일반인 차원에서 자꾸 패거리 논리, 즉 일본식의 '의리'로 변질된다는 것이죠. 한국 유교 전통의 '의'는 '공공선'을 의미하지만, 일본적인 '의리'는 결국 사적 집단의 단체적 이기심 이상이 될 수 없어요.

***허동현, "식민통치와 6ㆍ25전쟁으로 인한 양반계층의 완전 몰락, 사회적 상향의지 불러일으킨 '발전 원동력'인 동시에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주류형성의 원인"**

허:'의리'라는 말은 사실 전통시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의(義)와 리(理)를 이야기했지요.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리란 일본에서 무사나 야쿠자 같은 사적인 집단들이 중시한 친분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 천박한 조폭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를 썩지 않게 해주는 소금과 같은 선비의 지사정신이 다시 한번 구현되기를 저 역시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를 찾는 그 정신'들이 근대이래 한국사회를 여태껏 움직여온 주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 백 년 전에 나물 먹고 물만 먹더라도 의를 찾겠다는 정신은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과 권력과 지위를 쫓는 사회로 변한 것은 선비와 양반 계급의 몰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왕조의 붕괴 이후 우리는 돈만 있으면 모두가 양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사실 오늘 우리의 '성공'은―어찌 보면 물질 면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성공'은―의를 쫓는 선비정신의 몰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의보다는 의리를, 선비정신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쫓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와 6ㆍ25전쟁이라는 두 개의 비극, 내지 '발전 충격(development shock)'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먼저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5백년을 지탱한 양반이라는 조선의 지배계급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회적 상향의지(social upward mobility)를 갖게 되었어요. 또 6ㆍ25전쟁으로 인해 동족부락이 해체되는 등 '민족 대이동'이 있었고 이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집중과 익명성의 보장이 누구나 평등한 민주사회의 추구라는 엄청난 변화를 촉발한 것이라고 봅니다.

소위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와 같은 엄청난 발전 동력 효과를 준 거죠. 저는 다원화와 산업화로 가는 변화의 동력을 주는 제도와 이념이 도입되고 정착된 시대가 1950년대라고 생각합니다. 종래 이 시기를 독재와 빈곤만이 있던 암흑시대라고 보는 학설들이 우세했습니다. 수정주의사관의 눈으로 보자면 이승만 정권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어야 하기에 이 시기에 독자적 발전의 토대가 놓여졌다는 점을 무시했고 한국의 산업화를 박정희 정권의 공으로 보는 우파적 사관도 박정희 시대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 1950년대를 정체와 퇴영의 시대로 그리는 것이 당연지사였지요. 그러나 저는 종래 이승만 정권이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기여한 이승만 정권의 공헌도 그 과오―친일파 옹호나 시민 학살 같은―를 비판하는 것만큼 정당하게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도입된 것은 이승만 정권 때이고 이렇게 도입된 토대를 딛고 성장한 시민사회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보자고 요구한 것이 4ㆍ19였고, 그 결과 성립된 제2공화국이 이러한 시민적 욕구를 실천하려던 도중에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지요. 박정희 군부 정권과 그 이전의 이승만과 장면정권의 차이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그 지향점이 일본식과 미국식 근대화로 달랐다는 것이에요.

박정희 정권 이후의 군사정권은 모두 시민사회의 성장, 즉 민력이 커지는 것을 짓누른 것이고, 이러한 민족과 국가를 앞세워 개인의 존재를 부정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 무려 30년 이상이 걸렸다는 점에서 개발독재의 시대를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요.

현재 한국이 일본에 뒤지지 않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이룬 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러한 물음의 해답은 서구근대를 직수입한 이승만 정권과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려한 장면 정권,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민력의 성장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아탑을 우골탑으로 불리게 한, 소와 전답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 후세의 미래에 과감히 투자한 농부들이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희생을 정당히 평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 5>

***박노자,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이식된 미국적 근대, 일본적인 일상적 근대에 묻혀 오히려 민중들의 자발적인 요구 무시"**

박: 예 말씀하신 것 중에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승만 정권하 정권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국식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일단은 이상화시키고 교과서적으로 이해한 미국적 근대를 '모델'로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적인 근대적 규율, 일상적 근대를 만든 것이 일본 식민통치시대구요. 그 식민지적 일상 통치, 대민 통제 방식을 제1공화국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거시적으로는 미국적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하에서 비밀경찰조직, 안기부같은 조직은 없었던 것을 평가해주기도 하죠-미시적으로 통치 형태를 본다면, 예를 들어 그 당시 마을 선거를 어떻게 치렀습니까. 경찰들이 동장들을 불러서 야당표 나오면 너희 죽는다 이런 거 아닙니까. 말단 행정관이라도 향촌사회에서 왕 노릇을 한 거고 이 것은 일제시대하고 똑같았습니다. 기층 민중에 대한 통제 방식은 일제 때와 차이 없고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30년 근속상을 받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 첩 두는 것도 그대로구요.

거시적인 차원에서 봐도 조봉암 선생의 법살 같은 걸 보면 미국의 매카시즘과는 또 차원이 다릅니다. 매카시즘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소련간첩 혐의가 짙은 로젠버그 부부를 총살하긴 했지만 단순한 정치적 라이벌까지 죽이려 하지는 않았거든요. 따라서 일제 시기의 미시적 근대는 지속됐으며 이 차원에서 이승만 시기 근대의 비(非)미국적인 기원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허동현, "제 2공화국의 지방자치 수준 오히려 지금보다 높아..산업화가 있은 후에야 민주주의 가능하다는 것은 군사쿠데타를 옹호하려는 사후해석"**

허: 저도 서구 근대의 제도장치들이 도입되자마자 바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에 참정권을 부여한 것이 프랑스보다 1년 앞설 정도로 적어도 제도적인 면에서 제1공화국 때 도입된 민주주의는 지금보다도 못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박노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축첩의 악습은 이미 제2공화국 때 철폐됩니다. 소위 작은마누라를 둔 사람은 공직에서 쫓겨났지요.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된 지 약 10여년 만인 제2공화국 시절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읍ㆍ면ㆍ이장까지 직접 뽑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태동된 바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에 비해서도 지방자치의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많은 정치학자들이 제2공화국 당시의 민주주의를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평가 절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로스토(Rostow, Walt Whitman)류의 경제발전 단계론 내지 근대화론의 영향을 받아, 후진국에서는 경제 발전단계를 뛰어넘는 민주주의의 성장은 불가능하며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의 도약(take-off), 즉 산업화가 있은 이후에야 민주주의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시각에서 제2공화국 당시에 꽃핀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유산될 운명이었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5ㆍ16군사쿠데타의 필연성 내지는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기인한 사후(事後, post-factum)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1공 때 상층부에 의해 도식적이고 교과서적으로 이식된 근대화는 2공 때 민초, 뿌리로 확산되는 계기는 있었죠.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교원노조-지금 전교조-를 만들려는 시도를 그 때 처음 했어요. 그런데 그런 움직임을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서울대 국사학과의 원조로 꼽히는 이병도 선생님이셨어요. 당시 이 교수님은 문교부에 해당하는 부서의 장관을 맡고 계셨죠.

허: 제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왜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왜 시민적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한국적 특수성입니다. 세계체제하에서 한국이 성장한 것도 한국의 특수성이듯이 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의 힘이 분출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포기했는가 이것도 한국이 처한 특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군부독재가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와 같은 국가권력이 조성하는 공포에 의존해 통치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의 민주주의 기본틀은 지켜졌던 것도 사실이지요.

우리 시민사회는 6ㆍ25전쟁을 통해 맛본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독재의 우익 전체주의를 감내하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요. 두려움의 기억을 이용하는 대중 동원과 조작, 즉 반공을 내세우는 안보논리―대표적 사례로 평화의 댐―로 시민사회를 우롱한 것이지요. 시민들이 기본적인 인권의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최소한 이나마 민주주의 체제와 사유권이 보장되는 시장경제 체제였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이제는 이쪽의 군벌들 말고 중간, 하급관료 즉 탈식민주의 사학이 이야기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역할은 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관료 체제 전체의 효율성을 보면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그래도 한국이 나은 편이죠.

허: 서구제도를 삼권분립의 역사라고 보자면 우리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견제와 균형의 논리는 한국사에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지요. 양반 지배구조가 5백년 이상 간 것도 통치체제가 상당히 튼튼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박: 지방관 같은 경우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위로 보고서도 올리고 그랬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중앙의 향촌에 대한 파악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말단의 행정관리까지는 상당히 조율이 잘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성장을 이야기하자면, 제1공화국 때는 그 상층부를 어떻게 평가를 해도 분단의 책임을 상당히 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어쨌든 서구적 근대화를 자신들의 목표로 생각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제 1공화국 때는 민주주의는 '밑으로' 제대로 정착이 안됐지요. 그러나 4ㆍ19 혁명 이후에 민중들의 에너지 분출이 시작됐고 그 에너지 분출과 이미 이식된 근대화 담론이 합쳐져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민주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민중들이 요구하는 민주적 근대(교원노조같은)와 이병도 장관같은 식민지 시기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관료들 사이의 괴리가 상당했습니다. 관ㆍ민의 합심이 그렇게 잘 됐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중들이 바라는 바와 보수적인 자유주의자 사이의 차이가 상당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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