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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을 위한 변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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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송두율'을 위한 변론 하나

<긴급기고> 그의 고뇌를 우리의 고뇌로 끌어안는 관용을 바라며

(1) 조선 노동당에 입당한 지식인. (2) 북한의 돈을 받은 사실. (3)"김철수"라는 가명이 가진 정치 이념적 의미에 대한 논란.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으로도 철학자 송두율은 이미 분단시대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은 위험인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발언과 행적은 이로써, 적어도 우리사회에서는 출발부터 객관적 평가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운명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송두율 자신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양심적 학자에서 거물간첩이라는 추락"은 이 사회가 거의 철통같이 지켜내고 있는 그 배제의 논리에서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40년의 세월 속에서 고독한 모습으로 유럽의 지성사에 맥을 대고 조국의 문제를 끌어안아왔던 그를 이러한 짧은 이력의 단서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우리의 민족사가 지난 세월 통과해왔던 우여곡절이 그렇게 단순하게 기준을 세워놓고 그 내면의 진상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중층(重層)의 현실을 인내를 가지고 속단을 피하면서 세밀하게 보려는 노력이 없이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거리 좁히기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낙인이 찍히면 결론이 나는" 그런 단세포적 발상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그로써 유린되고 마는 것이다.

***송두율, 우리 모두에게 거쳐야 할 역사적 통과의례**

이 자유를 회복하는 작업에 실패하게 되면서 남는 것은 분단시대의 이념적 폭력이 정한 일방적 틀에 묶인 질타와 매도, 그리고 <형벌의 정치>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누군가를 희생제의 제물로 삼으면서 본심은 자신의 지배 권력을 확보하려는 파시즘의 악몽을 강요하는 자들만의 질서를 위한 <광기의 과정>이 되어간다. 지금 송두율을 가장 앞장서서 난타하고 있는 세력의 목표는 송두율의 몰락이 아니라, 그리하여 얻게 될 자신들의 권력이다.

우리의 경계심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송두율은 자칫 이들의 권력 게임에 희생당하는 <먹이>가 되고 만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미래를 위해 저지해야 할 어둠의 계략이다. 송두율은 그렇게 희생되어도 좋은 일회용 소모품이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 이 민족이 그토록 지향하려는 민족 내부의 보다 심화된 상호이해의 길이 존재하고 있으며, <송두율>은 그로써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적으로 되풀이 거쳐야할 불가결한 역사적 통과의례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송두율은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 그는 자신의 조선 노동당 입당에 대한 자의식 부재가 곧 "노동당 입당"이라는, 지식인으로서는 중대한 선택의 현실적 결과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 점과 관련해서 그는 더 이상의 변명을 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유럽 좌파의 역사에서 지식인의 좌파정당 가입문제가 지식인의 독자성을 흔들고 어떤 논란과 상처, 그리고 학문적 비틀림을 가져왔는지를 모르지 않을 그에게 이러한 근거 제시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더군다나 남북간의 화해를 모색하는 경계인의 교량적 역할을 꿈꾼 그에게 어느 한쪽을 택했다는 혐의를 부인하기 어려운 조선 노동당 입당은 치명적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당원으로서의 자의식 부재와 상관없이 이 사실 하나로 그에게는 남북간의 교량적 역할의 위상은 박탈되고 마는 것이다.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버린 지식인의 노력은 그것의 출발이 아무리 선의를 담고 있다 해도 도리어 현실적으로는 역풍을 자초하는 전략적 전술적 어리석음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송두율의 치명적 과오**

조선 노동당에 속한 지식인의 교량적 역할이 조선 노동당의 지휘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하물며 한국 정치에서도 아무리 개인적인 정치입지가 있다 해도 당의 공론을 이탈하여 개인의 선택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점에서도 송두율의 노동당 입당은 그 자신의 사상적 선택이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가로막는 중대한 과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가 허심탄회하게 자성적 고백을 미리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그를 아끼는 이들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이제야 털어놓다시피 해버린 인상을 준 것도 그와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다. 돈 문제나 가명 김철수 문제는 다 이 노동당 입당에서 비롯되는 의혹과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그에게 현재 가해지고 있는 비판과 논란은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앞으로 적지 않은 세월 피할 수 없는 자기책임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송두율의 30년 전 행적을 볼 때 그 당시 역사의 현실이라는 기준에서 접근하여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송두율이라는 개인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스스로 외면하고 돌아서는 비정한 존재들이 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법적 판단에도 정상참작이라는 것이 있듯이, 송두율의 선택은 바로 그 역사의 현실에서 그를 강력하게 끌고 간 요소들의 이해가 전제될 때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70년대 초반, 남과 북은 지금의 척도로는 상상이 쉽게 가지 않을 만큼 국제적으로 서로 매우 다른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남한은 군사독재체제의 강화로 인한 민주질서의 파괴가 내부에서 적지 않은 저항과 희생을 낳고 있었던 반면, 북한은 당시 제3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발전을 보이고 있는 모델로 인식되고 있었다. 전통적 양식의 건축과 녹지대로 아름답게 가꾸어져가고 있는 사회주의 도시 평양의 모습과, 빈민가를 삽으로 퍼내어 외곽지대로 몰아내면서 이미 부동산 투기의 도시로 만들어지고 있던 서울은 그 발전의 방식이 가진 차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70년대의 남과 북,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한 해외 지식인들의 고뇌**

그와 동시에,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에 용병으로 끌려가고 있는 남한과 반제 비동맹체제의 지도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던 북한의 국제적 위상은 당시 이러한 바깥소식이 봉쇄되어 있다시피 했던 남한의 현실에서는 무지의 범위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간신히 경제계획의 성과를 보이고 있던 남한과, 해외의 빈국에 대한 경제적ㆍ교육적ㆍ의료적 지원까지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었던 북한의 차이는 남한의 민중들에게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을 뿐, 당시로서는 명백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에 유학한 한국 지식인 사회는 당시 금기로 되어 있던 북한의 현실에 대한 지적 욕구가 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더하여, 당시 유신체제 성립으로 한국 민주화 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해외 민주화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본원적 민주화의 전개는 어렵다는 결론에 기울어가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송두율과 동일한 또는 유사한 해외 민주화 운동 내부의 인식은 시작된다. 해외에서의 한국 민주화 운동 지원은 민주화투쟁의 현장인 한국에 대한 보조역할에 그칠 뿐, 해외 민주화 운동의 독자적 영역은 그렇다면 무엇인가라는 고뇌어린 문제 제기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국내에서는 하기 힘든, 해외동포 사회의 남북간 <교량적 역할론>이 등장하는 것이며, 송두율은 이러한 환경 아래 이를 자신의 학문적 관심사로 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밀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 민주화 운동의 결론적 지향점에서 도달하게 된 교량적 역할의 첫 단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그것은 북한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실상을 두 눈으로 보고, 그들의 삶이,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져왔는가를 알지 않고서는 남과 북의 새로운 접점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일단 북한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일이었다.

***북한의 문을 열고, 남과 북의 접점 마련 노력**

그 <일단>의 현실에서 감수했던 바들이 오늘날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했던 이들의 대부분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와 각오를 가진 이들이었다. 물론 그 감수의 내용에는 북한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분명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인 북한 현실을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과 기준으로 그대로 비판하고 나서기보다는 일단 그 사회의 내면에 존재하는 요구와 논리에 이해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제를 붙들고 있었기에 그러한 결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송두율의 현실은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전체의 통일에 대한 바로 이러한 해외 한국 지식인들의 관심과 결단에 맞닿아 전개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여러 한계에 놓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작업, 그것을 그는 주목했고 그래서 부단히 남과 북의 접점을 여러 차원에서 마련하는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이는 엄청난 오해와 개인적 희생을 내다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송두율의 노력이 가진 나름의 가치에 진솔하게 주목할 수 있다면, 그가 자의식 부재의 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 모든 노력의 입지를 어느 한편의 입장에 좌표를 맞추고 했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수구냉전세력의 집합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나라당에도 진보주의자들이 있고, 탈냉전 평화개혁을 내세우는 신당과 민주당 내에는 한나라당의 수구세력 못지않은 인사들이 있다는 점 하나로도 그의 노동당 입당이 그의 사상적 실천의 내용을 그대로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송두율의 지난 세월이 가진 의미**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해외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택을 한 인사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송두율의 지난 세월은 남과 북의 상호 오해를 풀고 서로 근접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이 무엇인가를 발견해내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게 <공작전문의 간첩>이라는 틀을 씌우기에는 그는 너무도 내성적이고 심약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37년만의 귀국을 통해서 남한 사회의 내재적 논리가 가해오고 있는 압박을 자기 성찰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양쪽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그 내재적 논리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매우 실존적 각성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 보다 뼈저리게 투시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존재이다. 남이나 북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앞으로 일차적으로는 그런 내재적 논리의 이해를 성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송두율, 그에게 과오가 있다. 하지만, 그 과오를 덮고 남을 자산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랑자와 같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는 해외거주 지식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독 가운데서 끊임없이 유지해온, 민족의 현실을 어떻게든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진실한 자세와 그로 인한 학문적 성취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송두율의 미래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관용을, 그것이 우리 사회의 힘이 될 것**

그는 이미 실정법적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하면서 영구귀국과 함께 후학들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작가 황석영이 분단의 시대를 넘겠다고 하면서 북을 방문한 이후 자의반 타의반 해외 유랑생활을 마침내 끝내고 실정법적 처벌을 예상하면서도 귀국을 각오했을 때의 심정이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나 필자나 모두 일본에서 출생하여 고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적지 않은 세월을 해외에서 보낸 인생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깊은 동지애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인생사의 아픔이 새겨진 결과이리라.

지난 여름, 미국 뉴저지에서 북 미주 가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이 주최한 한반도 문제 세미나에 연사로 갔던 필자는 그곳에 역시 연사로 온 그와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 이렇게 말했다. "송선생님,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꼭 한국에 가십시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나라이지만, 그곳에는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서 그들과 새롭게 호흡하십시오.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남과 북에 대한 나름의 결론과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울한 표정의 그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가 훌륭한 학자로서 고국에서 자신의 평생을 쏟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 이상, 소중한 인재들이 분단시대의 이념적 폭력에 희생당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미래를 스스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되기를 희망한다. 분단시대의 질곡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귀중한 지식인을 우리가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를 죽이는 것은 분단시대라는 괴물의 목숨을 연장하는 일이 될 뿐이다.

부디, 송두율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용과 함께 그의 내면을 거쳐 온 지난 시기의 분단사에 대한 우리 모두의 자성적 성찰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올 우리의 세월은 보다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미래의 능력, 그 하나가 추가되는 즐거움을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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