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헤카베, 세계대학축제의 지평을 바꾸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헤카베, 세계대학축제의 지평을 바꾸다!

'헤카베' 통신 <5ㆍ끝>

8월 22일 새벽. 고요한 올림피아 시내를 깨우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모두들 단잠에 빠져 있는 이 때, 언덕 위 드루바 야외 극장으로 향하는 무리들. 어제 밤 늦도록 공연 연습을 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헤카베> 팀이다. 잠이 덜 깬 피곤한 모습들이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내일 있을 공연 때문이리라. 그리스에서 외국인이 그리스 비극을 공연하는 것. 이 쉽지 않은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이국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극장으로 오르고 있다.

새벽 연습은 약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현지 진행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음향과 조명을 맞추어야 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연습이 끝난 뒤, 숙소로 향하는 길은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무척 무더웠다. 숙소에 도착하니, 햄과 치즈 그리고 갓 구워 낸 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과 허기에 지쳐 있던 우리는 서둘러 식사를 마친 뒤, 모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찌는 듯한 그리스의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은 낮잠과 수영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8시경. 우리는 올림피아 세계대학연극축제 본부가 있는 한 초등학교로 향했다. 세밀한 부분을 다듬을 수 있는 마지막 연습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줄거리가 축약되어 있는 프롤로그. 헤카베의 어린 아들 폴리도로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부분에서, 연출가는 폴리도로스에게 영어 대사를 요구했다. 두 달 남짓한 연습 기간 동안, 폴리도로스 역을 맡은 배우는 영어 발음과 어조를 익히느라 무척 힘겨워했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 노력의 결과를 알 수 있다. 그의 영어 대사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야만, 관객들은 우리말 공연을 버거워하지 않고 끝까지 재밌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연출가는 마지막으로 폴리도로스의 영어 대사 중 어색한 부분을 꼼꼼히 짚어 준다. 코러스의 노래와 움직임으로 채워지는 4개의 스타시몬은 녹음한 노래와 얼마만큼 박자, 음정을 맞추는지가 관건이다. 완벽한 음향 시설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아서일까. 아직도 몇 부분에서 박자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있다. 연습이 몇 번 반복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제대로 된 음향 설비를 갖추고 있는 드루바 극장에서는 괜찮으리라.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 연습. 답답한 마음을 이기기 위해서, 연습에 더욱 집중해 본다. 주요 배역들-헤카베, 폴리크세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폴리메스토르-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5개의 에피소드들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극적 긴장감이 좀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남는다. 연출가는 배우들에게 상대방의 대사에 반응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대사와 극적 상황에 익숙해지다 보면, '연극이 반응의 예술'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연출가의 현명한 지시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연기를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연습이 끝나고 난 뒤, 모두들 드루바 극장으로 가서 리투아니아와 이태리, 그리스 공연을 관람했다.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다른 나라의 공연을 보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축제의 열기를 가슴 가득 받아 안으며, 내일 있을 우리 공연을 기대해 본다. 부디 좋은 공연이 되기를!

8월 23일. 드디어 공연날이다. 이 날을 위해 이제껏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다. 여기 멀고 먼 나라, 그리스까지. 오늘 우리의 공연은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그리스인들에게 어떤 무늬를 그려 줄 것인가.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루바 극장에서의 등퇴장 연습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짤막한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의상을 점검하고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에는 드루바 극장까지 우리를 실어다 줄 버스가 도착할 것이다. 그 때까지 16명의 배우의 분장을 마쳐야 한다. 버스가 도착할 때쯤, 주요 배역을 맡은 여배우들의 분장만이 완성되었다. 별 수 없이 코러스와 남자 배우들의 분장은 드루바 극장에서 해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 공연이 두 번째였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스태프들은 음향과 조명, 무대 장치를 손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배우들과 분장팀은 분장실에서 분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덕택에, 독일 공연 직전에 모든 배역의 분장이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독일 팀의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공연이 끝난 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조직위원 안젤리카는 영어와 그리스어로 우리 공연을 소개했다. 웅성거리던 객석은 어느 새 차분해져 있었다. 모두들 세계대학연극축제에 처음 참가한 한국의 공연을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환상적인 조명이 무대 전면을 가득 메운 천 자락들을 비추었다. 우리의 연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한 관객들 앞에서 프롤로그, 파라도스, 에피소드, 스타시몬이 이어졌다. 조명과 음향 그리고 배우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공연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말과 우리 노래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이 드루바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때때로 나오는 그리스어 대사는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헤카베의 복수가 성공한 뒤, 드디어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그리스 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우리의 공연도 긴 여행을 끝마칠 수 있는 것이다. 코러스와 헤카베가 천천히 무대 뒤로 돌아들어가는 엑소도스의 마지막 장면으로 연극은 막을 내렸다.

조명이 꺼지자마자 객석 여기저기에서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껏 어떤 공연에도 일어서지 않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루바 극장에 모인 각국의 관객들은 우리 공연을 보았고, 이해했으며, 열광했다. 4차례나 이어진 커튼 콜, 그 이후에도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우리 팀을 격려해 주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우리 팀의 공연이 프로 수준이었다고 입을 모았으며, 특히 우리 극이 그리스 정통극에 가까웠다는 점에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의상과 음악 모두에 고대 그리스 문화와 한국의 전통이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은 '충격 Shock'이었다고 했다. 조직위원장 드미트리는 우리 공연을 그리스 비극을 매우 현대적으로 되살린 '아주 예외적인' 공연이었다고 극찬하면서, 이러한 연출가의 접근을 '천재적 genious'이라고 평가했다. 공연 때마다 사회를 보던 안젤리카는 우리의 공연이 앞으로 그리스 연극 발전의 귀중한 토대가 될 만한 훌륭한 공연이라는 칭찬을 덧붙였다.

이제 올림피아 세계대학연극축제는 변화할 것이다. 연극 공연보다는 세계 젊은이들의 교류와 협력에 치중했던 축제는 공연 중심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동양의 한 작은 나라, 한국에서 날아온 연극팀의 공연이 그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변화는 이제 곧 시작될 것이다.

***필자 소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 MFA(예술학실기석사) 과정 재학 중. 뮤지컬 <공포의 꽃가게>(연출 김학민, 경희대 수원캠퍼스 예술 극장) 번안 및 드라마터지. 연극 <헤카베>(연출 김석만, 그리스 올림피아 드루바 야외 극장, 국립극장 하늘극장) 드라마터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