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저명인사들이 오면 공항에 나간 기자가 공식처럼 묻는 말이 있었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떠날 때도 묻는다, '한국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가 유명한 가수이건 배우이건 스포츠맨이건 정치인이건 상관없다. 이 말을 물어보고, 원더풀이라는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큰 나라에 가면 남이 자기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안하고 당연히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지도 않는다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 맞는 말이라고 나도 끄덕였었다. 다른 나라에 가보지도 않은 주제에.
뉴질랜드 기자들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걸 보고 놀랐다. 조금이라도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람이 오면 텔레비젼 뉴스 기자가 공항에 나가 물어본다. 뉴질랜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환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전과도 같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을 2년 전 뉴질랜드 북섬에서 영화 촬영을 했다. 그 때 촬영 중간에 배우들이 수도 웰링톤에 나들이했을 때도 이 질문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대답은 뉴질랜드가 환타스틱하다는 것이었고.
얼마 전 테니스대회에 안나 코니코바라는 여자 선수가 왔었다. 작년에 세계 8위까지 올라갔던 것이 최고의 성적이고 지금은 부상으로 몇 달 연습을 못해 70-80 위로 떨어졌다는 선수인데, 늘씬하고 금발이라서 세계 순위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고 그래서 광고 수입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선수가 도착하는 날 당연히 스포츠 기자가 공항에 나갔고 뉴질랜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조나 로무를 아냐고 물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거의 전 국민이 열광하는 럭비 경기에서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 질문에 안나는 그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기자는 다시 올 블랙을 아냐고 물었다. 올 블랙은 럭비 국가 대표팀 이름으로 이름 그대로 항상 새까만 유니폼을 입는다. 럭비 선수는 이 팀에 들어가는 게 최고의 꿈이다,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이 팀이 호주나 남아프리카 팀에 지는 날이면 한 명 정도는 심장마비로 생명을 잃고 스포츠 심리학자는 충격받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무료 상담해준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 선수는 감히 그게 뭐냐고 또 되물었다. 머쓱해진 기자는 이 선수가 뉴질랜드에 관하여 공부를 많이 하진 않은 것 같지만 어쨋거나 좋은 경기를 기대한다고 마무리를 했다. 그 선수가 첫 경기에서 이기자 코트 옆에서 즉석으로 몇 마디 인터뷰가 있었다. 또 오클랜드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이 선수가 그 동안 며칠 시내도 구경하고 해변에도 가보았는데 좋다고 대답하자 모두들 흐뭇했다.
사람만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싶다. 나라도 이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고 싶어한다, 초등학교 지리 시간에 배운 뉴질랜드는 양을 키우는 목초지가 너른 평화로운 나라였다. 생각보다 남극에 가까이 위치하여 있는 조그만 이 섬나라가 (우리나라보다는 면적이 넓지만 인구 면에서는 10분의 1도 안되니까 작은 나라라고 치자)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에 참여해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1,2차 대전 뿐 아니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도 참여했고, 최근 몇 년 간 일어난 걸프전, 코소보 사태, 인도네시아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티모르 사태 등 세계평화를 위해 뉴질랜드가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비록 군대가 아니라 군의관만 파송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세상에서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면 사람뿐 아니라 나라도 서운해한다. 95년에 2차세계대전 종전 (그리고 승전) 50주년 희년 축하가 유럽에서 성대했다. 뉴질랜드에서 유명한 뉴스 토크 쇼 진행자인 폴 홈즈가 런던에 득별 파견되었다. 그가 런던 거리에서 흘러가는 사람들 가운데 서서 그 분위기를 전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뉴질랜드가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것을 아느냐고? 20대로 보였던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뉴질랜드가 참전했었느냐고 되물었다.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더라면 혹시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시청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