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했던 대학 시절 우린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일학년부터 청운의 꿈을 안고 해외유학을 가겠다고 이를 악물고 영어공부하고 또 공부 잘 해서 간신히 장학금이라도 타야 나라 밖을 나가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외국에를 다녀왔다는 2000년도의 통계 숫자를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학생 말고는 외국에 나가는 일이 그리 떳떳치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권력층과 연관이 있어서 소위 복수 여권을 가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미국 영주권 내지는 시민권이 있다고 하면 별로 곱게 보이질 않았다. 더구나 북한과 대치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정부에 의하여 우리는 항상 준전시 상태임을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정부의 말대로 여차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전쟁에서 안전하게 피할 기회를 가지고 있는 미국 영주권자들이 이뻐 보일 수 없었다.
그런 느낌이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국민정서를 만들어낼 리 만무였다. 미국 시민권이었는지 영주권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10년 전쯤 연대 총장으로 뽑히신 분이 그 둘 중 하나를 가진 분이어서 총장이 되려면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비가 붙었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 분이 장관이 될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일개 시민으로 살다가 전세 뺀 돈 단돈 2천만원 들고 용감하게 자기 나라 아닌 나라에서 살겠다고 이민왔는데도 외국에 사는 일이 그리 떳떳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런 국민정서 때문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분위기인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한국에 그냥 머물러 있고 아이만 데리고 이곳에 이민 온 엄마가 7년 전 여기 올 때 그리고 그 후 일년에 한 번씩 한국에 다니러 갈 때 주변 사람들이 못된 사람 취급했는데, 작년부터는 어쩌면 그렇게 선견지명 있었냐는 말을 듣는다니 말이다.
일레인 할머니와 차를 마시다가 할머니 아들네 이야기가 나왔다. 언젠가 만났을 때 의사가 돈 벌 생각으로 의사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해서 나를 감동시킨 30대 의사인데, 몇 년 전부터 호주에 가 있다, 박사과정을 하느라고. 그 아들이 학위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 돌아오겠네요 하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당분간 거기서 일할 것 같다고, 여기서는 그 아들이 공부한 것을 써 먹을 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이 나라는 젊은이들을 꼭 이 나라에 붙들어 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피터 블레이크 경의 예를 들었다.
그는 소위 바다의 왕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요트 조종을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사람이었다. 요트를 잘 몰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 엮고 지도력이 있어서 아메리카 컵 대회라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또 그 역사 속에서 미국말고 다른 나라가 우승한 적이 한 번 밖에 없었던 미국 요트 대회에서 뉴질랜드가 최근 연속 2회 우승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5년 전 우승하여 그 컵을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날 온 국민이 열광하였고, 환영행사 참석하도록 학교 수업을 하지 않은 학교도 많았다. 그런데 그가 작년에 브라질에서 피살당했다. 브라질의 열대림이 훼손되면서 생기는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연구조사를 위해 강을 따라 배를 몰고 다니다가 해적의 습격으로 변을 당했다. 50대의 많지 않은 나이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그는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정복한 힐러리 경과 함께 이 나라의 국민영웅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영국에 가서 살았다, 힐러리 경과 마찬가지로. 그 부인은 영국 사람이다. 그래서 일레인 할머니 말이 그의 장례식도 그가 살던 영국에서 치러지고 장지도 영국이라고 했다. 그가 뉴질랜드인이고 또 뉴질랜드 사람들이 사랑하는 국민영웅이기에 뉴질랜드 사람들은 그가 뉴질랜드에 묻히기를 바라지만 그의 부인이 영국 사람이고 아이들도 다 영국에 있고, 또 그가 20년 넘게 영국에서 살았으니 아쉽지만 그가 영국에 묻히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뉴질랜드 사람들이 자손을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이건 일레인 할머니 혼자서만의 생각이 아니다. 해마다 연초에 이 나라에서는 여왕으로부터(뉴질랜드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나라 여왕이고. 물론 뉴질랜드는 독립국가이고 여왕만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여왕에게 실례가 될 테고 영국 여왕이 이 나라 여왕도 겸직한다.) 작위를 받는 사람들 명단이 발표된다. 우리로 치면 훈장이지만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으면, (물론 뉴질랜드에서 추천하여 뉴질랜드 총독이 뉴질랜드에서 그 수여식을 집행하지만) 힐러리 경, 블레이크 경 하는 식으로 이름에 붙이는 존칭이 달라진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작년부터는 영국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뉴질랜드 정부에서 직접 주는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 작위가 아니라 Companion of New Zealand라는 뉴질랜드 자체의 훈장이 되었지만. 올해 발표된 인물 중에도 역시 이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육상선수로 30년 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수십년 씩 살고 있어도 한 번 뉴질랜드인이면 영원한 뉴질랜드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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