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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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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할아버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8>

키위 친구들에게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뉴질랜드에서 계속 살거니 아니면 언젠가는 돌아갈거니?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결국은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질문을 하나 라는 게 나의 처음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착 못하고 돌아가는 아시아 이민자들이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98년 홍콩 중국 이양을 앞두고 이민 왔던 홍콩 사람들은 홍콩이양 후에 아무 일 없음이 확인된 후 거의 다 도루 가버려 그 사람들 몰려 살던 곳이 텅 빈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문화적인 배경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크다. 이곳보다 홍콩에서 돈을 더 벌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이민 올 때 다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이민 온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뉴질랜드에 살러 가는 거라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능곡에 살다가 영등포구로 이사를 갈 때 영원히 영등포에서 살 건지 아니면 다시 이사할 건지를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처음엔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하나.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인데.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장담하기도 우습고,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대답하기도 얌체같고. (왜 얌체같은 느낌이 드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니까 여기서는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그래서 결국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글쎄, 그러면서 실없이 웃기도 하는 게 내 대답이다.

처음 우리 교회에 간 날 내 옆에 앉아있던 분은 에릭 할아버지와 프리다 할머니이다. 찬송가를 엔간히 따라 부르는 내가 귀여워보였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속한 같은 장로교이지만 미국 장로교 영향을 받아 미국 찬송가가 주종을 이루는 우리나라 교회의 찬송가와는 달리 영국 찬송가라 거의 아는 찬송가가 없고 더구나 악보는 없이 가사만 있는 찬송가라 정말 적당히 따라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워낙 찬송가 곡들은 예측이 가능해서 슬금슬금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름이 뭐냐부터 시작하여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 분이다. 그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는 남편과 나의 보호자가 되셨다. 평소에는 없지만 마침 크리스마스를 위해 성가대 모임이 있으니 성가대를 하자는 그 분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더니 운전을 못하는 나를 위해 우리 집까지 일일이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셨다. 이런 저런 무료 콘써트에 대한 정보도 주고 그분들이 가실 때는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에릭 할아버지는, 커크 더글러스를 닮았다고 나 혼자 생각하면서 그 말을 하면 실례인지 아닌지를 몰라 말은 못했지만, 아주 젠틀한 영국신사였고, 프리다 할머니는 종달새처럼 명랑한 나보다 작은 날씬한 할머니였다. 그 분들을 키위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런데 가까와지고 그 집에도 놀러 가고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보다 일년 먼저 영국에서 이민 오셨다는 것이다.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대학 시절 뉴질랜드에서 유학 온 청년과 연애하여 결혼했고, 남편 따라 뉴질랜드로 왔기 때문에 몇 번 뉴질랜드를 방문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엔지니어였는데, 은퇴하고 나서 할아버지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영국에는 더 이상 가족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외동 딸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뉴질랜드로 아예 이민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성공회 교인이었는데,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사돈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같이 우리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느 날 집을 팔려고 내놓으셨다고 했다. 놀라는 나에게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신다고 말씀하면서. 지금부터 4년 전 일이다. 같은 영연방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여전히 영국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을 하시는데, 뉴질랜드 달러 가치가 많이 떨어져 처음 오실 때에 비해 소득이 줄기도 했지만 고향이 그립다고. 할머니는 돌아가서 친구들 만나는 것은 좋지만 여기서도 친구를 다시 사귀었고 무엇보다 이곳에 하나 밖에 없는 딸도 있고 손자 손녀도 있어서 떠나고 싶지 않은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자고 우긴다며 살짝 눈을 흘기셨다. 여자들은 어디 가나 잘 사는데, 남자들은 다 저렇다고 말씀하면서.

얼마 후 끝내 집을 팔아버리고 그 두 분은 영국으로 돌아가셨다. 그곳에서 이곳을 그리워 하신다는 이야기를 사돈 할머니네를 통해서 듣다가 일년 후에 그분들이 다니러 뉴질랜드에 다시 오셨을 때 뵈었더니 그 사이에 많이 늙으셨다. 그리고 가신 후에 나도 전화 한 번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도 오고 갔으나 2년 뒤 할머니가 치매로 기억을 거의 상실해 사돈 할머니가 전화해도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그런 상황에 영어로는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말을 하여야 할지 혼자 답답해하다 소식은 끊겼지만 누가 나보고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거냐는 말을 물어보면 그분들 생각이 난다. 겉보기에는 모습도 같고 언어도 같은 언어라 우리처럼 말에서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고, 텔레비젼의 한 채널은 영국 프로그램만 방영하는데도 고향이 아니어서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모를 일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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