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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가사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7>

가야겠다고 다들 일어나서 나가는데, 에릭 할아버지는 설겆이를 해주고 가시겠단다. 내 남편이 설겆이 해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남자들이 다 그렇지 않냐고 눈을 꿈쩍 하시면서. 그래서 걱정마시라고, 그 사람도 설겆이가 이렇게 많으면 도와준다고. 그랬더니 정말 믿을까 말까 하시면서 주일 날 확인하시겠단다. 우리 교회 할아버지들은 교회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설겆이는 당연히 자기 몫이다. 적어도 마른 행주질은 할아버지 몫이다. 이렇게 설겆이를 해주니까 음식 준비도 하리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었나 보다.

속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되고, 그래서 배도 고파지지 않고, 또 위염인가 싶었다. 서울서는 그런 증세가 있었을 때 위염이라고 진단을 받았으니까. 며칠 버티다 병원에 갔다. 약을 처방하면서 의사는 그런데 내 눈꺼풀 안쪽이 너무 하얗다고 피 검사를 해야겠다고 검사요청서를 써 주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 다행히 의료검사소가 붙어있어서 곧장 피를 뽑으러 들어갔다. 5시가 문 닫는 시간인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간호원이 나와 문을 잠갔다. 내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직 세 사람 있어서 그 간호원이 퇴근 시간을 못 지키겠구나 싶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이가 쉰은 훨씬 넘어 보이는 간호원이었다. 오늘 바쁜 모양이라고 내가 말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소연을 했다. 오늘 따라 왜 사람들이 그리 밀려드는지 정신없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두 사람 앉으면 나머지 사람은 서서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두 사람 서 있으면 더 들어갈 수도 없이 작은 대기실에 그보다 약간 큰 검사실이 있는데, 혼자서 일하는 간호원에게 내가 왔음을 알리려면 대기실에 있는 벨을 흔들어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은 정말 혼자서 바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했다고 말하면서 덧붙이는 말, 이제 퇴근하면 슈퍼에서 장을 보고 가서 집에 가자마자 앉지도 못하고 저녁을 해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 남편이 저녁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키위들은 남자들도 음식을 잘 한다는데, 당신 남편은 안 하느냐고. 30년 넘는 결혼 생활에 단 한 번도 남편이 밥을 차린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스물이 넘는 아들도 아버지 닮아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나는 우리 남자들도 거의 그렇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면서 잠시 남성에 대한 공동 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할아버지들이 설겆이는 잘 하는데, 음식을 할 줄 아는지, 부인이 힘들면 밥을 차리는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얼마 후 일레인 할머니가 요새 할아버지를 훈련시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일흔이 넘으시니까 두 분 중 어느 분이 먼저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혹시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사실 경우를 대비하여 할머니 없어도 사실 수 있게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 등 집안 살림을 조금씩 가르치신다고 했다. 딸과 며느리와 함께. 그 동안 할아버지에게 그런 일을 전혀 시키지 않아 버릇을 못 들였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끔 취미가 요리임을 말하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키위 남자들은 거의 다 할아버지 급이라 그런가, 내가 아는 한 식사 준비는 여전히 주로 여자의 몫임을 알게 되니, 인류 역사 속에서 정해져 내려온 여자 남자의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요지부동으로 확고한가를 새삼 느낀다, 여성참정권이 세계 최초로 시행된 이 나라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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