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7> 학교이야기 1

아이가 학교에서 준 것이라고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 3에 해당되는 이곳의 form 4 학년 초였다. 제목은 ‘학생을 한 개인(individual)으로 여기고 가르치기’라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속한 학년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먼저 있었다. 학교가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학제가 한국과 완전히 달라서 고등학교가 다섯 학년이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2천 명이 넘는데 한국에서는 보통 규모의 학교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두번째로 크다.) 학생들이 한 개개인으로서 받아 마땅한 돌봄과 관심을 받도록 보장하고 싶다는 것이 그 편지의 전달내용이었다.

한 개개인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하겠다는 말이 눈에 설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우린 늘 집단으로만 교육받고 존재해왔는데, 나라와 민족 앞에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개인을 내세우는 것은 이기주의와 동의어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읽어내려갔다.

‘목표 설정 프로그램’ 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맞게 계획을 세워서 학기말에 한 번씩 체크를 하게 할 것인데, 부모에게 아이가 선택한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의논하고 그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라는 것이 학교에서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내용은 별것이 아니네, 학습목표를 세우라는 말인가 보다 라고 자동으로 생각했다.

덧붙여서 ‘개인적인 기술과 자질/관계를 맺는 기술과 자질(personal/relationship skills and qualities)’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이 나중에 아이가 자기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술과 자질을 갖춘 행동을 하도록 부모들도 아이들을 격려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그 기술과 자질이 무엇인지 목록을 쭉 적어놓았다.

그 목록을 나는 열번도 더 읽었다, 그런 말은 내가 교육받은 16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개인적인 기술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걸 그대로 옮겨본다면

“지도자가 되어도 따라가는 자가 되어도 편안할 줄 안다

필요하다면 위기상황에 기꺼이 처할 줄 안다.

좌절과 실패에 대처할 줄 안다

정확한 자기 이미지를 갖는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줄 안다

호기심을 보여준다.

과제에 충실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도움을 청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배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물건과 소유에 대한 책임을 진다.

변화에 잘 대처한다.

적절한 유머감각을 갖는다.

활동과 토론에 참여한다.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독립적으로 일(공부)할 줄 안다.

(말로 되어있든 글로 되어 있든) 지시에 따를 줄 안다."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임을 지금 이 나이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성품을 갖게 된다면 공부를 좀 못한들 이 세상 어디를 간들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가 될 성품이 없으면서 따라가는 일에도 늘 불만이고, 위기사항은 늘 피하기만 하면서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한다면 이 나라에서든지 우리나라에서든지 어디 산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감격하기 잘하는 나는 아 이 나라 학교는 역시 우리나라하고 다르구나고 감탄을 하며 아이가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명문이라고 소문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 학교는 역사가 유구한 학교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으로 정복하여 뉴질랜드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준 힐러리 경도 그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 아이들도 그 학교에 꽤 있다고 했다. 왜냐, 그 학교의 대학진학율이 다른 학교보다 월등 높기 때문이다. 그 엄마의 말에 의하면, 또 그것이 사실인데, 이 학교는 반을 나눌 때 시험을 보아 성적 순으로 나눈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A반부터 B반, C반, 이런 식으로 쭉 나가기 때문에 아이 반이 어느 반인지 알면 그 아이의 전체 등수가 어느 만큼 되는지 안다는 것이다. 입학할 때 그렇게 정해서 첫 학년(Form3)에는 시험 볼 때마다 반을 바꾸고 그 다음 학년 부터는 그렇게 볼 때마다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성적이 계속하여 두 번 좋으면 그러니까 그 윗반 학생보다 잘 하면 그 윗반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반이 이동된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아이가 두 반을 건너 올라가서 보니 배우는 내용과 진도가 이전 반에서 공부한 것과 다르고 심지어는 교과서도 달라서 그 동안 그 반에서 이미 공부한 내용을 따라가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우열 반 갈라서 공부시키는 것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한국 아이들은 거의 과외를 한다는 것이 그 엄마의 설명이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우열반이 있기는 하다. 첫 두 해를 공부 잘하는 반 2개 반과 잘 못하는 반 2개 반을 만든다. 중학교에서의 선생님 평가와 학군 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서 미리 테스트한 결과를 가지고.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런 반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학부모를 위한 저녁모임을 준비해서 각기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에 그 반에서 담임선생님이 그 반에 속한 아이의 부모들에게만 그렇다고 알려줄 뿐이다. 아이들은 늘 공부 잘 해서 상 타는 아이들이 주로 몰려 있는 반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 그러나 두 해가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섞어 놓는다. 수학만 빼놓고. 왜 세번째 학년부터는 우수반을 만들지 않느냐고 어떤 키위 엄마가 물었다, 그 질문을 들으며 여기서도 우수반에 들어가면 부모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기는 하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 편의상 그리고 아이들의 능력에 따라 반을 구별하기는 했지만 이 반에 속한 아이들만 공부 잘 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다른 반에도 여기 이 반에 속한 아이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세번 째 학년부터는 과목을 모두 학생이 선택하기 때문에 우수반을 따로 만들 수 없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어느 학교가 더 좋은 학교인지는 각자 자기의 교육관에 따를 일이다 싶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공부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기술을 아이가 체화한다면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훨씬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을 하지만 먼저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학교를 선호할 수 있다. 각자 교육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이것은 이래야 하느냐 저래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