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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그리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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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그리스로 간다"

해마다 여름이면 세계 각국의 대학생들은 배낭을 둘러메고 유럽으로 향한다. 수많은 유적지와 박물관들을 돌아다니며 젊은 날의 꿈을 다지기 위함이리라. 각종 매스컴에서 유럽의 살인적인 더위와 가뭄을 연일 떠들어댈지라도, 유럽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하는 여행지는 여전히 유럽이다.

여기, 매우 독특한 유럽행을 준비하고 있는 21명의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의 목적지는 프랑스도 독일도 이탈리아도 아니다. 이들은 수동적인 문화 체험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자신들의 몸짓과 소리를 각인시키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들은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통해 만나게 된 어색한 사이도 아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무언가에 똑같이 '미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연극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숨 막힐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서도 여전히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직접 관객과 호흡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이 21명의 젊은이들은 그 외로운 숙명을 배우고 있는 연극학도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그리스 비극 '헤카베'. 제3회 올림피아세계대학연극축제. 모두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소중한 이름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들로 구성된 '헤카베'팀은 제3회 올림피아세계대학연극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18일(월) 그리스로 떠났다. 약 2천5백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올림피아에서 공연되었던 '헤카베'를 2003년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공연하게 된 것이다.

이 믿기지 않는 일을 현실로 바꾸어 놓기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바로 연출가 김석만 교수이다. 그는 이미 2001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제23회 정기 공연으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었다. 당시 한국 초연이었던 '헤카베'는 그리스 비극을 제대로 무대화하겠다는 그의 학구적인 열정으로 가득 찬 공연이었다.

이후, 김 교수는 제5회 세계대학연극협회 총회(5th International University Theatre Association World Congress,이하 IUTA)와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통해 연극원의 '헤카베' 공연을 홍보했다. 그 결과 제5회 세계대학연극협회 총회는 제3회 올림피아세계대학연극축제(3rd Olympia International Meeting of University Theatre) 에 '헤카베'를 초청하게 된 것이다.

1994년 벨기에에서 설립된 세계대학연극협회(IUTA)는 대학과 그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교육, 창작, 이론 및 실기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는 단체이다. IUTA는 대학 연극의 특수성 강화와 대학 연극의 상호 협조 및 연대 강화, 회원 간의 교류 촉진 및 정기적 교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그 동안 세계대학연극축제에 회원국들을 참여시켜 왔다.

이번 제3회 세계대학연극축제는 8월 17일(일)부터 24일(일)까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펼쳐진다.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로 유명한 작은 도시 올림피아에서 연극의 올림픽이라고 불릴 만한 젊은 연극제가 열리는 것이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리투아니아, 멕시코, 이란, 터키, 그리스 등 13개국 23개의 세계 각국 대학의 연극팀이 참가하는 이 축제에 우리나라가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대표인 연극원의 '헤카베' 공연은 8월 23일 저녁, 그리스 올림피아(Olympia)의 드루바 야외극장(Drouva Forest Theatre)에서 펼쳐진다. 숲으로 둘러싸인 야외무대에서 우리 젊은 배우들은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은 트로이 왕비 헤카베의 비극을 온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유명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인 '헤카베'. 트로이가 그리스에 패배한 뒤, 헤카베는 한 나라의 왕비가 아닌 노예로 전락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잃은 그는 오디세우스와 아가멤논에게 정의를 호소하지만, 그 호소는 외면당한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선택은 복수뿐이다.

연출가인 김석만 교수는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을 경험한 우리 한국인의 삶과 헤카베의 비극적 현실 사이에서 커다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의 현재 삶의 기본 전제가 되고 있는 전쟁과 분단에 대해 배우들 각자가 강하게 인식하기를 원했다. 연습 초반, 배우들에게 6.25 전쟁과 남북 분단 상황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그림을 그리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배우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삶이 전쟁이나 분단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 비극적인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김 교수는 배우들 스스로 작품을 깊이 연구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독특한 연습 방법은 '연설 대회'와 '대사가 있는 패션쇼'였다. 연설 대회란 작품의 주요 대목들 직전에 일어났음직한 사건들을 상상한 뒤, 각자의 연설을 준비해서 발표하는 행사를 말한다. 그리고 대사가 있는 패션쇼란 각자 가장 부끄러운 장면,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 가장 의아한 장면, 가장 확신에 찬 장면, 가장 동정적인 장면을 찾아서, 각각에 적합한 동작들을 대사와 함께 표현하는 행사이다. 배우들은 연설 대회와 대사가 있는 패션쇼를 통해, 중요한 대사와 이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동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두 달 남짓한 연습 기간은 배우들에게 '헤카베'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선물해 주었다. 초연 때와는 달리, 전쟁과 비극적 인간에 대한 보다 통시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을 보여 줄 이번 공연에서는 중요 대사들을 영어와 그리스어로 전달하는 독특한 공연 방식이 선보일 예정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 언어학자인 한국외국어대 유재원 교수가 드라마터그(dramaturg)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 현지에서 그리스 비극을 공연하게 될 연극원 '헤카베'팀. 이들의 공연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새롭게 밝혀주는 의미있는 도전이 되기를 기대한다. 현지 소식은 이어진다.

***필자 소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 MFA(예술학실기석사) 과정 재학 중./ 뮤지컬 '공포의 꽃가게'(연출 김학민, 경희대 수원캠퍼스 예술극장) 번안 및 드라마터지. 연극 '헤카베'(연출 김석만, 그리스 올림피아 드루바 야외극장, 국립극장 하늘극장) 드라마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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