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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잉글리시를 하면 되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0> 영어이야기 2

우리 아이의 학교 선생님들이 다 뉴질랜드 사람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캐나다에서 왔고 무슨 과목 선생님이었는지 기억 안나지만 에이레에서 온 선생님도 있었다. 작년에는 지리 선생님이 영국 사람이었는데, 학년 중간에 영국으로 돌아가고 말아 그 선생님을 아주 좋아했던 우리 아이가 그 과목 공부를 더 이상 열심히 하지 않아 내가 속으로 '조금만 더 있다가 학년이나 마친 다음에 가지' 소리를 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때 캐나다 선생님도 2년 있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선생님들에게 배우는 이유는 이 나라에 선생님이 부족해서란다. 부족한 이유는 이 나라 선생님들도 영국이나 다른 나라로 취직해서 떠나기 때문이다. 같은 영어를 쓰는 나라들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고, 젊은 나이에는 이 나라 저 나라에 취직하여 돈도 벌고 여행도 하는 것이 영어권에 태어난 사람들이 누리는 특혜가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영국 등 서구의 식민주의에 대해 열을 올리고 비판했지만, 그 때문에 세계에 퍼져 세계어가 되어버린 영어의 덕을 영어권 젊은이들이 누린다고 해서 새삼스레 다시 열을 올릴 나이는 아니고, 어쨌거나 그로 인해 그들이 누리는 자유함이 부러운 게 솔직한 고백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선생님을 만나면 우리 아이가 하는 말이 있다. “그 선생님 발음이 이상해.” 에이레에서 온 선생님의 발음을 흉내내며 우스워하기도 했다. come here 를 ‘콤 혀’ 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 발음 식의 혀가 아니라 혀와 효 사이의 소리이다). 미국 영어만 영어인 줄 알고 듣던 나에게는 BBC 표준 영어, 하층민 영어, 에이레 영어, 스코틀랜드 영어, 미국 영어, 호주 영어, 그리고 뉴질랜드 영어가 이렇게 서로 다른 줄 몰랐다.

이 나라 텔레비젼은 스카이라는 유선 방송 빼고 채널이 4개인데, 자기네가 만드는 드라마가 거의 없기 때문에 (딱 하나 있고, 가끔 시리즈물을 만들기는 한다, 몇 년에 한 번씩) 영국, 미국, 호주에서 만든 드라마를 방영한다. 덕분에 각 나라에서 온 프로그램을 보면서 영어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특히 발음이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면서 우리나라 드라마를 볼 때 사투리를 즐기듯이 즐기는 것은 드라마 자체가 주는 즐거움 외에 덤으로 따라오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경상도 출신 탤런트가 전라도 사투리를 한다든지, 서울 출신이 경상도 사람 역을 하면 어색하듯이, 영어로도 남의 동네 영어를 흉내내면 정말 귀에 설다. 영화 ‘데블즈 오운(Devil's Own)’에서 브래드 피트가 북아일랜드의 IRA 테러요원으로 미국에 자금줄과 선을 대러 가서 북아일랜드에서 온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 아이리쉬 영어발음을 하는데, 그 흉내내는 가짜 발음이 정말 우스워서 영화감상에 무척 방해가 되었다. 이곳에 산다고 해도 영어로 말을 할 일은 별로 없지만 듣는 것은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노상 들으니까 말하는 실력 느는 것은 모르겠는데, 듣는 실력 그 중에서도 지금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영어가 어디 영어다 싶은 것은 전혀 없던 실력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 실력을 어디다 써 먹을 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영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항의가 빗발쳐서 계속 방영하는 영국 드라마가 있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다. 드라마 제목이 암시하듯이 코로네이션 거리에 있는 가정들과 그 중에서도 그 거리에 있는 펍(영국 선술집)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소위 서민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거의 못 알아 들었다. 그래서 보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그 드라마를 놓치면 큰 일 나는 것처럼 부득이 못 볼 경우 녹화까지 해가면서 본다는 것을 알고는 (그 할머니가 영국에서 이민 온 할머니라면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런다고 이해를 하겠는데, 네덜란드에서 남아프리카를 거쳐서 한 30년쯤 전 뉴질랜드에 이민 온 할머니가 너무 재미있어 하길래) 나도 다시 몇 번을 보았다. 또 정 볼 게 없으면 그냥 멍청히 장면만 보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씩 그렇게 보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드라마 속의 대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들리기 시작하니 그들의 발음이 얼마나 BBC 표준 영어와 다른지 우리나라 드라마 볼 때 우스운 사투리 들으면 우습던 것과 마찬가지로 혼자 쿡쿡 웃으면서 실없이 따라 해보게도 되었다.

그러니까 영어 발음은 나라에 따라 또는 우리나라에 사투리가 있듯이 지역에 따라서만 발음이 다른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 영국의 상류층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한다 해도 그 속에서도 역시 하층계급 출신으로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층에 따라 쓰는 영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꽃파는 아가씨 오드리 헵번이 말하는 영어를 상류층 영어로 고치기 위해 언어학자가 기계까지 동원해 모음 발음을 교정하는 장면이 그냥 우습자고 있는 장면만은 아님도 알게 되었다. 그 영화는 계층에 따라 영어가 얼마나 다른지, 완전히 다른 언어이기나 한 것처럼 그 발음체계, 특히 모음발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음에 따라 계층을 확연히 보여주고 그 발음을 교정하는 것이 오드리 헵번처럼 반강제로 발음연습당하지 않는 한 힘든 일이기에 배우들이 출신계층에 따라 등장하는 드라마가 다르다. 사극에서 왕족이나 귀족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그런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의사나 변호사 등 현대 교육에 의하여 신분이 상승한 역을 맡는 데까지는 가도. 그들의 발음을 어쩔 수 없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재작년인가 작년인가에 코로네이션 스트리트 35주년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드라마가 35년을 장수하며 시청자의 식지 않는 사랑을 받았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그 드라마를 예닐곱 살 때 보며 자란 아이들이 다시 그 드라마 속에서 역을 맡고 등장하여 자기가 어릴 때 보았던 그 드라마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렇게 질긴 변함없음이 아직도 영국에서 계층이 존재하게 만드는 이유인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각설하고 다시 발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35년 전 시작할 때 등장 인물의 발음이 지금 등장인물들의 발음과 또 달랐다. 35년 전 배우들은 BBC 표준 발음에 가까왔다, 비전문가인 나의 귀의 판단이긴 하지만. 이건 또 어쩐 일인가 싶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생각한 가설 몇 가지. 그 때는 계층 간에 발음 차이가 크지 않았다. 이 가설은 마이 페어 레이디를 생각하면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그 때는 텔레비젼 초창기라서 탤런트가 따로 없고 연극 배우들이 텔레비젼에도 출연했을 테고 연극은 대사 전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배우들이 발음 훈련을 받았을지 모르고 그래서 그런건지. 아니면 BBC에서 처음에는 모든 방영 프로그램에 표준 영어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었기에 표준 영어를 발음하는 사람만 등장시킨 것인지. 60년대 영국 텔레비젼 드라마 역사에 대해서 무식한 그리고 언어학에 관한 문외한인 나 혼자만의 머리 속의 유희였다.

이런 관찰들로 인하여 느는 배짱은 나는 한국 영어발음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혀를 꼬부려 미국식 발음을 할 수도 없지만 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끼리도 저리 다른 발음을 하고 때로는 서로 알아 듣지 못하기까지 하는데 내가 내 식으로 발음하면 되지 싶은 거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영어쓰는 나라에 한 번 가보지 않고, 아니 영어쓰는 사람과 한번 말해보지 않고도 장하게 가르쳐 주신 그 발음기호에 따라 말하면 되지 싶다. 이건 콩글리쉬가 아니라 코리안 잉글리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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