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오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아세아 민족 분격대회’는 아세아 민족들을 제대로 분격시키지는 못했으나 구색은 갖추었다. 대회가 한창이던 밤 9시 10분 무대주변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온 바람에 아세아 민족들을 분격시킬 겨를도 없이 행사는 중단됐으나 그 대신 친일파들이 분격으로 치를 떤 것이다.
특히 이 모임을 주최한 대의당(大義黨) 당수이자 하필이면 폭탄이 터질 때 ‘아세아민족의 해방’이라는 연설을 하던 박춘금(朴春琴)의 분격은 하늘을 찔러 당장 범인들 목에 5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래서 사건을 일으킨 조문기(趙文紀ㆍ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수 명의 조선청년들이 수배됐으나 그로부터 13일 뒤에 히로시마에 더 큰 폭탄이 터짐으로써 이들을 붙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박춘금이 더 분격했는지, 현상금 5만원을 축내지 않아서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렵 박춘금에게는 돈이 무척 필요했다. 우선 일제가 망하고 건준이 들어서자 그는 건준 치안대장 장권에게 20만원을 주려 했다. 장권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건준 재정부장 이규갑에게 40만원과 금광 자동차 등을 주려고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그는 일본으로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의 ‘명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박춘금은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과 같은 반열에서 기억돼야 할 인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완용 등이 일제침략의 서두를 장식했다면 그는 휘날레를 장식한 점이다. 일제 패망을 20여일 앞둔 시점에서 벌인 부민관 행사도 그렇다.
1891년 경남 밀양서 태어난 그는 일본 술집 심부름꾼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점도 양반태생의 이완용 등과 다르다. 일본 술집서 배운 일본어를 밑천으로 일찍 일본에 진출한 그가 조선노동자들을 모아 상애회(相愛會)라는 단체를 만들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그렇다.
다만 그는 조선 노동자에 대한 사랑보다 폭력으로 더 출세의 가두를 달렸다. 전남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그는 악덕지주의 부탁을 받고 농민들에게 권총을 들이대기도 했으나 그것도 초기의 싱거운 일이었다. 그 뒤에는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폭행하고도 무사한 그였다.
그런 것은 이완용으로서도 힘든 일이었으며 실제로 그의 출세도 이완용 부끄럽지 않았다. 이완용이 조선 귀족원 의원이었다면 그는 도쿄에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에 두 차례나 당선됐다.
그런 박춘금은 일제가 계속 패망의 전조를 보이자 제정신을 잃고 끔찍한 구상을 하게 됐다. 그는 조선내의 반일 또는 반전분자 30만을 학살하려 했고 부민관의 대회는 그 출정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 행사가 애국청년들의 거사로 실패한 것은 다행이었으나 박춘금의 ‘명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그는 광복 직후 한동안 헤맸을 뿐 곧 일본으로 가서 81세까지 편안히 살다가 죽자 고향에 누웠고 그 옆에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재야단체들이 그 송덕비를 철거하려고 해서 밀양은 시끄럽게 됐다. 밀양태생의 작곡가 박시춘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실시해온 가요제도 친일행적 시비에 말려서다. 이들 두 박씨의 케이스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으나 박춘금의 경우 도시 ‘정상참작’의 꼬투리도 찾기 어려운 점이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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