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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朴鳳宇와의 씁쓸한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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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朴鳳宇와의 씁쓸한 마지막

남재희 회고-文酒 40년 <35>

전혀 시와는 인연이 없어 시라고 하면 유치진(柳致眞)씨의 한 희곡 대사에 나오는 “시루떡 말이요”만 생각나고 또 짓궂게 그 구절을 이용하여 익살을 떨곤 하였다. 특히 영문으로 된 시는 전혀 감흥이 없다. 영문도 산문은 그렁저렁 이해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대면하여 사귀었던 시인들은 좀 다르다, 느낌이 온다. 신동문(辛東門)이나 신경림(申庚林)이 그랬고 김춘수(金春洙)와 박성룡(朴成龍)이 그렇고 강서, 양천에선 양성우와 이기와가 그렇다. 박성룡은 최근 작고했는데 신문들이 거의 무관심해 서운했다.

가끔 한국 시집을 들척인다. 박노해나 김남주에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내가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암울했던 지난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와 닿는 데가 있다.

요즘「시와 시학」을 살펴보다가 신경림의 시집「농무」에 수록된 「그날」이 조봉암씨의 사법살인을 애통해해서 쓴 시인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것으로 정치칼럼을 하나 써서 발표하였다. <신경림 시「그날」과 죽산과 민주노동당>이라 제하여서이다.

「시와 시학」은 훌륭한 잡지로 거기서 또 하나의 반가운 발견을 하였다. 친구라면 옛친구였던 박봉우(朴鳳宇)시인을 추모하는, 기인(奇人)으로 유명했던 천상병(千祥炳)시인의 시다.

「시와 시학」1992년 가을호의 천상병씨의 시를 소개하면―.

故 朴鳳宇를 추억하며

카페 ‘歸天’에 와서
옆에 있는 사진을 보니
朴鳳宇의 사진이 있었다.

살아 生前에
그렇게도 多情多感했던 봉우
그렇게도 말잘하던 봉우.
생각느니
天國에 갔으리라 믿는다.
천국에서 多福을 누리리라….

1960년대 중반 나는 우연히 박봉우 시인을 알게 되었다. 혹시 고은(高銀)시인을 통해서가 아닌지 모르겠다. 민음사의 박맹호(朴孟浩) 사장의 소개일 수도 있고. 모두 비슷한 연배였기에 소개가 없더라도 어울렸을 것이다.

술을 몇 번 마셔보니 박시인도 기인(奇人)으로 느껴졌다. 당시는 얼어붙은 냉전상황인데도 전혀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활달하다. 아마 그래서 필화나 설화 걸린 것으로도 기억한다.

술만 마시며 지냈으면 괜찮은데 화근은 통행금지시간이 되어 내가 근무처인 조선일보의 짚차로 그를 집에 데려다준 데에 있다. 주당인 박시인은 고랑망태가 되게 술을 마시고, 그러다 보니 통금에 걸리고, 생각나는 것이 편리한 조선일보 짚차이고, 마치 자가용처럼 이용하려 하였다. 대개 술마시는 영역이 청진동, 서린동, 다동이었으니 조선일보 위치가 아주 편리하다.

그것도 몇 번이지 회를 거듭하니 짜증이 났다. 우선 박시인을 먼저 데려다주고 내 집으로 가던 순서를 바꾸어 내 집에 먼저 가서 내리고 기사에게 박시인을 바래다 주라고 하였다. 그게 또 다시 화근이 될 줄이야.

박시인은 갈 생각은 안하고 내 집에 쳐들어와서 술을 내란다. 양주를 내놓으니 시간은 영어식으로 「작은 시간」이 되는데 그의 사설은 계속되기만 한다. 집식구에게 말이 아니다. 통사정을 하여 내보냈다. 그랬더니 동네 길을 왔다갔다하며 고성으로 외쳐대는 게 아닌가.

“나 박봉우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려 하는데…. 나 박봉우가 평양간단 말이야.”아마 10분 이상 떠들어 동네사람들 잠을 다 깨웠을 것이며, 그들은 아마 “웬, 빨갱이가 나타났나…”하고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1960년 중반이다.

말이 난김에 따져보면 흔히 시인에게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문학세계에서의 일이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자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후 짚차는 박절하게 사절이고 그러다 보니 그와 술도 마실 기회가 없게되고 아주 헤어지게 된 것이다. 풍문이나 신문으로 그가 고향 전주에 내려갔고, 거기서 친구들 알선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얼마있어 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것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재간 있는 시인이었는데….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보니 “직업이 조국인, 그래서 세 자녀의 이름도 각각 하나, 나라, 겨레로 지은 박봉우 시인”이라면서 그가 정신병원을 거쳐 전주로 내려갔다고 적고 있다.

박시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고은 시인 이야기도 잠깐 언급해야겠다. 고시인은 너무나 거물이니 잠깐 언급하는 것이 실례가 될 것이지만 양해 바란다.

1960년대 중반에 박맹호 형이 청진동에 마치 복덕방 비슷한 출판사를 차렸다. 거기에 스님에서 환속하여 제주도에 있다가 상경한 고시인이 사랑방처럼 들렸다. 그때만 해도 고시인은 별로 이름이 없었고 또 할 일도 없어 박사장 사무실에 들렸다가 때되면 짜장면을 시켜다 먹었었다. 정말 그때는 짜장면시대다.

박사장은 나와 청주고교 동기로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나왔는데 집안이 충북 보은에서 제일가는 부자이지만 집안신세 전혀 안 지고 약사인 부인의 조력만 받아 자력갱생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던 때이다.

물론 그도 문학지망이어서 초기엔 맥파로(麥波路)라는 주인공을 내세운 정치풍자소설로 현상모집에 당선된 바도 있지만 아버님의 정치를 돕느라 문학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한국서 손꼽는 유명출판사로 대기업이 되었고 그래서 나도 정치한답시고 신세를 듬뿍 졌지만, 그때는 겨우「요가」같은 책만 출판하고 초라했다.

거기서 고시인, 내가 자주 그렇게 부르는 고선사(禪師)를 만났다. 그리고 가끔은 술도 같이 했는데 그때의 그는 다듬어지지 않아 행동이 거칠었고 그런 가운데 천재적인 요기(妖氣)가 얼핏얼핏 보였다. 요기라고 한다고 화내지 말길 바란다. 나는 어느 시 전문 잡지에 수필을 써서 한용운 선생을 북한산에 비교할 수 있다면 고은 시인은 남산정도의 크기로 말 할 수 있는 민족정신의 맥을 잇고 있다고 칭찬한 일이 있으니 말이다.

술자리도 얼마간 거칠었다. 그런 그가 대학교수와 결혼한 후는 몰라보게 달라져 의젓한 지사시인으로 변모하는 게 아닌가. 내가 정치를 할 때는 선거구 안에 있는 화곡동에 살고 있으면서 정보기관의 감시를 늘상 받으며 살았다는데 이야기는 듣고 있으면서 나는 당시 여당에 적을 두고 있어 민주투사인 고시인을 찾아보지 못했다.

요즘 가끔 마주 치면 고시인, 박사장, 나, 모두 닭띠 동갑이고 같이 늙어가게 되니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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