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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냄비근성을 버려라"

<월드컵과 언론> 히딩크 감독, 어제는 '오대영(5:0)' 오늘은 '영웅'

지난 26일 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2대3으로 분패한 한국 축구대표팀과 거스 히딩크 감독이 모처럼 한국 언론의 집중 찬사를 받고 있다. 한국 언론의 찬사는 특히 강한 체력훈련을 통해 대표팀을 업그레이드 시킨 히딩크 감독의 조련술과 용병술에 집중되며 히딩크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세계 최강이라는 프랑스를 맞아 시종일관 화려한 플레이로 각종 비리소식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했으니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히딩크 감독에 대한 치사가 지나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을 무작정 추켜세우기에 앞서 지난해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 0대5로 대패했을 때 한국 언론이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보자.

<사진>

***지난 해 히딩크 감독은 경질대상**

지난 해 5월 30일 열렸던 한국 대 프랑스의 경기는 당시 한국 축구의 현 주소를 그대로 드러냈던 졸작이었다. 한국 언론의 평가 역시 '컨페드컵/ 佛 '예술축구'에 맥없이 무너졌다(경향신문 2001.5.31.)' '"자존심도 끈기도 한물갔다" 비난 봇물(국민일보 5.31.)' '"투지마저 실종" 네티즌 맹비난(문화일보 5.31.)' 등 비판이 주를 이뤘다.

문제는 경기력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히딩크 감독의 인격이나 자질론과 사생활 등에 대해서도 한국 언론의 가차없는 메스가 가해졌었다는 것이다.

'히딩크 축구 허와 실 - 무엇이 문제인가(대한매일 2001.6.)' '진단 히딩크호 - 히딩크는 귀를 열어라(한국일보 6.)' 등에서 한국 언론들은 당시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잘 모른다"며 기자들에게 "기본도 모른다" "한국 신문은 보지도 않는다"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축구협회 등이 나서서 올바른 충고를 하지 않는다면 '히딩크호의 표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히딩크에 대한 비판은 급기야 경질설까지 오르내리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한국일보는 '아이러브사커 - 감독을 바라보는 한일의 차이(2001.6.22.)'라는 기사에서 컨페더레이션스컵 기간중 내한한 재일동포 축구인 이국수씨(전 베르디 가와사키 감독)의 말을 인용해 "트루시에는 항상 한 게임을 잘못하면 경질된다는 극한의 상황에서 경기를 했고 그것이 그와 일본축구를 향상시킨 원동력"이라고 말했다며 히딩크 감독이 책임감을 가질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올해 초 열린 북중미 골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저조하자 중앙일보 2002년 2월 9일자 '폴란드 "한국보다 미국 더 경계를"'이란 기사는 한술 더 떠 폴란드 언론의 보도를 인용해 "골드컵 성적이 좋지 않아 한국 대표선수들 사이에 긴장과 불안이 감돌고, 팬들은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히딩크 감독의 해임설까지 나오고 있다"며 "남미·유럽의 평가전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면 결코 기쁘지 않은 '깜짝 파티'가 그를 기다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히딩크 감독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히딩크는 지금은 오히려 일본 대표팀의 부진으로 비판의 대상이 돼버린 일본 트루시에 감독과 비교돼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트루시에 일본 감독은 쉬지 않고 '공부', 히딩크는 '휴가'**

국민일보 2001년 8월 7일자는 '히딩크 틈만 나면 '휴가'-트루시에, 쉬지 않고 '공부''라는 기사에서 "추락하는 거스 히딩크, 욱일승천하는 필립 트루시에"라며 트루시에를 추켜세우고 히딩크에 대한 실망감을 극대화했다.

히딩크에 대한 비판은 개인만의 사생활도 피해가지 않았다. 경향신문 2월 5일자 '<위기의 히딩크호> 감독 회의론'은 "과연 히딩크는 한국 축구에 무엇인가"라며 "전쟁터에 나간 장수가 여자친구를 대동해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 해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

히딩크 감독에 대한 평가는 지난 4월 27일 0대0으로 비긴 중국과의 평가전까지도 비판적이었다. 오죽했으면 경향신문이 4월 29일 '<쓴소리 단소리> 히딩크 탈출설?'이란 풍자기사에서 정치판의 각종 음모론과 색깔론에 빗대 히딩크 감독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네덜란드팀 감독으로써 한국을 5대0으로 이기고, 지난 해에는 한국팀 감독으로 프랑스와 체코에 5대0으로 졌기 때문에 '오대영'이란 한국식 이름을 갖게 됐다고 썼을까.

경향신문은 '아니면 말고'식의 정치판 음모론을 빗댄 이 기사에서 "히딩크 감독의 탈출작전 또한 여차하는 순간을 위해 은밀히 추진되고 있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경기인 폴란드와 미국전서 패하거나 비겨 16강진출이 무산되면 마지막으로 포르투갈과 맞붙을 6월14일, 금요일을 탈출일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날 전반전이 끝나기 전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데 문학경기장서 30∼40분 걸린다는군요. 그러면 밤 9시30분 두바이로 떠나는 대한항공편이 있대요. 물론 암스테르담 직항이 좋겠지만 그날 비행기 시간이 낮 12시30분이어서 중간 기착지를 이용한다는군요. 김홍걸 사건과 관련, 최성규 전 총경도 미국도피전 인도네시아로 먼저 떠났잖아요. 무슨 당치도 않은 얘기를 하냐고요. 아니면 말지요, 뭐."라며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무책임주의와 냄비근성을 풍자했다.

이렇게 각종 비판에 시달리던 히딩크 감독에 대해 한국 언론이 '히딩크 영웅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지난 17일 한국 대표팀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4대1로 완승하자 언론들은 일제히 "히딩크호가 업그레이드됐다"며 '확대경: 생각하는 축구 눈 떴다(중앙일보 2002.5.17.)'에서 "히딩크 감독은 체력만이 아니라 경기와 상대를 파악하는 눈과 머리까지 바꿔놓았다"는 등으로 극찬했다.

***스코틀랜드전 이후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영웅**

지난 21일 한국 대표팀이 축구종가인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을 맞아 대등한 경기 끝에 1대1로 비기자 '16강 감 잡았다(대한매일 22일자)' '히딩크 한국팀 확 바꿨다(중앙일보 22일자)'며 히딩크 감독의 수훈을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히딩크 영웅만들기의 백미는 역시 26일 프랑스전 결과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다. 27일자 도하 신문들은 이례적으로 1면에 큼직하게 '날마다 강해지는 한국 축구 - 16강이 손에 잡힌다(경향신문)' '한국 축구 자신있다(동아일보)' '한국축구, 세계가 놀랐다(세계일보)' '잘 싸웠다(중앙일보)'고 히딩크와 한국 축구대표팀의 수훈을 칭찬했다.

잘한 경기를 보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못한 경기를 보고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며 아주 쉬운 일이다. 문제는 한번 잘못하면 호들갑을 떨며 당장이라도 감독을 바꿔야 할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다가 한번 잘하면 영웅만들기에 나서는 한국 언론의 '냄비근성'에 있다.

이미 한국 축구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회 도중 차범근 전 감독을 경질한 바 있으며 2000년에는 올림픽 8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허정무 감독을 경질하기도 했다. 차범근 전 감독의 경우 본선 출전때까지는 언론의 온갖 찬사를 받으며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본선 2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 5:0으로 대패한 이후 그야말로 역적 취급을 받으며 대회 도중 경질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만일 히딩크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면 벌써 경질됐을 것이라는 게 많은 축구팬들의 지적이다. 사실 차범근 전 감독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한국 언론은 히딩크 감독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자제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스코틀랜드·잉글랜드·프랑스 전에서 계속 부진을 면치 못한 채 '오대영'으로 대패했다고 가정해보자. 월드컵이 불과 며칠 남지 않는 시점이지만 한국 언론들은 '지금이라도 감독을 교체해야 한다'며 여론몰이를 하지 않았을까. 월드컵 붐도 지금처럼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일본 대표팀과의 비교 등을 통해 한국 대표팀과 감독은 여론의 질타에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다.

물론 건전한 비판은 발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히딩크 감독의 잘잘못까지 모두 감싸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판은 발전을 위한 비판이 돼야지 대안도 없으면서 경질설부터 들고 나오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 운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언론의 보도자세가 아니다.

한국 축구에만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언론의 '냄비근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 축구는 하시라도 감독을 경질하라는 성화에 시달릴 것이고 체계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냄비근성 또한 지역감정 못지않은 한국 사회의 망국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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