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언론계의 치부를 강타하고 있는 사건은 바로 벤처비리의 총체적 집합체로 일컬어지는 윤태식 게이트다. 그런데 상당수 주요 언론사가 윤게이트로 홍역을 앓고 있는 지금 언론계 안팎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번 사건에 대한 한겨레의 보도태도다.
지난 16일 한겨레신문 내부의 자체 심의실은 종합심의 보고서에서 “윤태식 게이트와 관련해 대부분의 신문들이 검찰에 소환된 김영렬 전 서울경제신문사 사장을 둘러싼 의혹들을 주요 의제로 삼은 반면, 한겨레는 1면에서 2단으로 스트레이트로 간단히 쓰고 이렇다 할 해설기사도 다루지 않아 의아스럽다”고 지적했다. 지난 15일 검찰소환조사를 받은 김영렬 전 사장 등 윤태식 게이트 언론인 연루사건을 중요하게 다룬 다른 종합일간지에 비해 한겨레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비판이 한겨레 내부에서조차 심의대상에 오를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난 해 언론개혁 논쟁, 무엇을 남겼나**
지난해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를 통해 족벌언론을 비판하며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한겨레가 윤태식 게이트라는 언론개혁운동의 최대 호재를 소홀하게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한겨레는 자체 감사결과 윤태식 게이트에 연루된 자사 임직원은 없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현재 진보지라는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경영위기, 그리고 편집국 인력운영 등의 다양한 내재적·구조적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들은 별개의 사안들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한겨레가 한국 주류언론에 대한 대안언론으로서 발전해나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으며 진보지 한겨레라는 한국 사회의 실험적 언론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도표>
한겨레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지난해 언론개혁시리즈에 대한 한 한겨레 중견기자의 평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후 언론개혁시리즈를 시작할 때 내부에서는 시기적으로 정부편을 드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니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언론개혁이 시급한 과제라는 공감대하에 한겨레의 전력을 기울여 보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언론개혁시리즈를 통해 한겨레가 얻은 성과는 별로 없고 친여지라는 오명만이 더 크게 남았다는 자괴감이 앞서 기자들의 힘이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윤태식 사건과 관련해 한겨레가 앞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자괴감은 진보지로서의 한겨레 정체성과도 맞물린다. 현 정부들어 신자유주의라는 미명하에 이뤄지고 있는 기업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 등에 대해 소위 주류언론이라는 동아 조선 중앙 등은 IMF라는 시대적 상황과 대세에 따라 정부정책에 호응을 하면서 따라가면 되나, 기층민중을 대변한다는 진보지로서의 한겨레는 무엇인가 다른 정교한 시각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열악한 취재환경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또 한겨레 역시 기업체로서 생존해야 하는데 한겨레에 적합한 수익모델을 찾기도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기자는 “한겨레의 문제는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기자들의 현실적 급여 수준이나 취재비 등이 경쟁사인 조중동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고 88년 공채 이후 기자들과 75년·80년 해직기자 선배들과의 세대차이가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인력에 대한 회사측의 재투자는 전무한 상태에서 그동안 저절로 전문적 소양을 갖춘 기자가 만들어지길 기다려왔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기자는 “지난 93년 한겨레 노조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아사히 신문 노조간부들이 한겨레를 방문해 ‘이렇게 자질이 있는 진보적인 학생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한겨레는 얼마나 좋으냐’는 말을 했을 때 한 선배가 ‘저 얘기는 머지않아 우리들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말한 적이 있다. 80년대 학번까지만 해도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며 한겨레 기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러한 자부심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경영위기와 정체성의 혼란**
현재 한겨레의 급여수준은 10년차 기자의 경우 연봉이 3천만원 안팎이며 취재비는 교통비와 식비를 합해 하루 7천원 수준이다. 지난해 노사합의로 상여금 300%가 삭감되기 전까지는 종합일간지 10개사중 중간 수준을 유지했으나 올해는 중하위권으로 처질 전망이다. 한겨레는 지난 99년 45억원 정도의 적자를 기록한 후 2000년에는 상여금 50% 삭감 등으로 7억원의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300% 상여금 삭감에 합의한 지난해에는 광고수주액의 급격한 감소로 다시 수십억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70년대 해직기자들이 갖고 있던 지사적 기자의 소명의식만으로는 현실적으로 한겨레 젊은 기자들에게 더 이상 생활인으로서의 기자란 삶을 지탱하게 하는 충분한 자양분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게 한겨레 기자들의 지적이다. “한겨레 기자는 지사정신만으로도 살 수 있어야 하며 임금문제로 파업하는 것은 한겨레답지 못한 일이라는 일부 선배들의 지적은 가정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기자들에게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또 75년이나 80년 해직기자들의 경우 상당 기간 언론현장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후배기자들에게 충분한 취재노하우를 전수하지 못했다는 점과 연계돼 편집국 인력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세대차이 문제도 제기된다. 한겨레 기자들의 특징으로 한 기자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써 본 기자는 적은 반면 칼럼을 쓰려는 기자들은 많다. 그래서 한겨레 기사에는 팩트보다 논조가 앞선다는 지적이 많다”는 문제점을 꼽기도 했다. 이 문제는 곧 한겨레가 편집국 기자들을 배치하는 데 있어 전문성을 중시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과 연계된다.
한겨레 노조가 운영하는 지면개선위원회(지개위) 소식지는 이와 관련, 22일자 ‘가기 싫어하는 출입처 인센티브 필요’라는 기사에서 “법조팀은 각 신문사마다 중장기적으로 인력관리를 하는 팀인데, 우리 회사는 그게 없었다”는 한 검찰출입기자의 말을 인용해 편집국 법조팀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법조팀의 경우 검사들과 안면을 넓히고 신뢰를 쌓아야 취재가 가능한데 현재 사회2부 법조팀은 검찰출입경력이 짧은 기자들로 구성돼 있고 선후배간의 원활한 취재노하우 전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또 다른 문제 하나는 정치적 색깔로 구분되는 파벌문제다. 사장과 편집국장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파벌문제는 지난해 선거에서도 어김없이 재연됐는데 내년 초에 있을 다음 사장과 편집국장 선거가 한겨레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분수령이라는 게 많은 기자들의 예상이다. 한 기자는 “현 정부의 인사난맥상이 검찰총장 사퇴 등 지금의 사태를 빚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겨레가 여당 편향이라는 비판 역시 파벌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며 “단적인 예가 지난 99년 심재륜 고검장의 항명파동 당시 불거진 검찰의 정치적 중립문제를 정부쪽 시각에서 떡값문제로만 접근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대간 의식차이, 그리고 내부 파벌**
그렇다면 한겨레가 진보적 정론지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에 대해 30대 젊은 기자들은 세대교체를 통한 경영진과 편집국의 인력구조조정을 우선순위로 꼽고 있다. 인력구조조정을 통해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세대교체를 통해 현재 언론환경에 맞는 인물들이 한겨레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 기자는 “한겨레 조직이 가지고 있는 가족문화와 공동체라는 동류의식을 타파해야 한겨레가 기업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조직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조직원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현재 ‘신문 3대지 진입을 위한 5개년 발전계획’을 세우고 있다. 회사측은 지난 18일부터 오는 24일까지 각 부서 조합원을 상대로 2002년 경영계획, 퇴직금 출자전환안, 증자계획 등에 대해 경영설명회를 하고 있으며 노조 역시 22일부터 31일까지 역시 각 부서를 상대로 간담회를 열어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중이다.
당초 노사가 지면개선 경영혁신 출자전환 등의 목표를 갖고 노사공동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으나 노조측은 회사측이 경영실패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책임없이 직원들의 최후담보라 할 수 있는 퇴직급여충당금을 자본금으로 전환하는 출자전환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태에서 공동위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회사측은 노조측이 요구한 회사발전방안 마련을 위해 상근자 두명을 지난해 11월 노조에 파견하며 성의를 보였는데 노조가 노사공동위에서 종합적인 발전방안을 논의하자는 회사측 입장을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쇄신의 몸부림**
한 팀장급 기자는 “한겨레가 추진중인 퇴직금 출자전환은 운영자금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라고 출자전환의 의미를 강조했다.
결국 노사간의 신뢰문제가 공동위 발족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겨레가 세운 목표처럼 진보적 정론지로 영향력 3위안에 드는 신문이 되려면 노사갈등과 세대차이, 경영위기 등은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한겨레 지개위는 최근 한겨레 기획위원으로 2월부터 일할 예정인 홍세화씨의 입사를 반기며 “홍씨 입사가 편집국이 활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반겼다. 다른 언론들의 입사제의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 홍세화씨는 한겨레에 대해 “한겨레는 한국사회의 희망이며, 한겨레의 정체는 한국사회의 정체이며, 한겨레의 좌절은 한국사회의 절망”이라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홍세화씨의 말처럼 한때 국내외 언론학자들로부터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상황에서 진보를 지향하는 한겨레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연구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한겨레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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