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박원순 서울시장이 희망제작소에 있을 때, 국정원이 여러 기업에 희망제작소 후원중단을 요구하자 당사자들이 이를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 때문일 게다. 그러면 국정원에서 막후세력의 힘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국정원의 전사, 즉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의 중앙정보부(중정),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보여준 검은 힘 때문이다. 물론 <남영동 1985>가 그렸던 전기고문 같은 심각한 신체적 고문을 국정원이 지금 하지 않지만, 지금도 아무도 모르게 엄청난 물리력 - 인력과 예산 - 으로 개인을 고립시키거나 공포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과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진 국정원의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지시' 문건이나 '반값등록금 차단' 문건은 국정원이 이른바 민주정부로 표방되는 민간정부의 야당 집권시대 10년을 거치며 이름을 바꾸고 역할을 조정하려는 개혁 시도가 어디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준다. 단지 '요요현상'으로 치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8년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국정원이 기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했고,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등 여러 인권침해사건을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국정원 개혁'이 가능한 것인지, 왜 실패했는지를 짚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떤 세력이 집권하느냐에 좌우되는 상황은 우리를 소위 정권교체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에 옭아맬 것이고. 국정원에 의한 국가권력의 통제와 인권침해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정치개입만 막으면 될까?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이번 사건을 두고 '국정원 정치개입'의 문제점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국정원이라는 사실상의 국가비밀정보기구를 존치시키는 한 이 문제는 어쩌면 풀기 어려운 게 아닐까?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 개혁으로 추진한 '탈정치·탈권력화'가 한계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권안보기관'이라는 오명을 탈피하고자 국정원의 대면보고를 중단하는 등, 국정원의 탈정치화를 위한 의지를 보였음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를 '정당정치'로 협소하게 이해하였고, 국가정보나 안보의 필요성을 당연하게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이 제도 개혁과 인적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국가정보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해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연합뉴스 |
안보개념을 놓지 않는 한…
안보란 미국 부시 정권이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공공연히 선포하고 자국민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버젓이 할 수 있도록 한 통치개념임을 역사적으로 겪어 알고 있다. 그래서 유엔 인권최고대표도 국가안보가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것을 우려하며 그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인간 안보를 내세우며, 안보를 재개념해야 한다고 강조할 정도로 '안보'는 인권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아무리 남북분단인 한국사회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안보를 국정원의 직무로 두는 이상 국정원의 막후 정치는 언제나 가능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정원을 산업정보 지키기, 사이버 보안, 테러 정보에 집중하도록 바꾸었다"고 했지만, 이 또한 안보개념에서 탈피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 국정원법 시행령인 '정보 및 보안업무기획·조정규정' 2조의 정의에서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2. "국내보안정보"라 함은 간첩 기타 반국가활동세력과 그 추종분자의 국가에 대한 위해 행위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취급되는 정보를 말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 아래서 국정원이 정치인뿐 아니라 시민단체, 노조, 언론인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찰을 했다는 사실은 단지 집권세력이 보수정치세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비밀사찰정치가 가능한 토대, 국정원이라는 국가비밀정보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하기에 국정원 개혁안으로 논의되었던 국정원의 직무(3조) 중 수사권(1항 3호, 4호)과 기획조정 업무(1항 5호)을 뺀다면, 국정원의 탈정치, 탈권력화가 가능하지 않았겠냐는 평가 의견이 허전하게 다가오는 것일 게다. 만약 그렇게 개혁했더라도 개혁, 탈정치, 탈권력화가 달성되기 어려운 이유는 '안보개념'을 고수하고 있는 한 정보의 집적을 통한 권력화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정원의 역할을 국외정보로 한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프랑크 라뤼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을 국정원 직원(차량)이 미행하다가 발각 난 사건은 '국내정보와 국외 정보'란 분류의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그는 한국의 표현의 자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유엔 인권기구의 공식절차로서 방문한 외빈이지만 한국의 인권상황을 조사하는 활동을 하므로 그를 미행·사찰하는 행위는 국외정보라고 하기 어렵다. 시행령에서도 국외정보의 정의는 모든 부문에 걸쳐져 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정보가 국외정보이든 국내정보이든, 그 정보를 수집하고 작성하고 배포하는 국가정보기관의 통제력이 미칠 때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이 아닌 왜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국정원
중정이나 안기부가 많은 시민에게 행한 고문과 구금 등의 국가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기구로 변신하려면 국정원 스스로 국정원의 '흑역사'를 반성하는 것이 첫출발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 홈페이지에 나온 역사에는 이러한 반성이 한 줄도 없다. 중정으로 시작한 역사를 아주 당당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국정원의 개혁에서 인적 청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인적 청산을 그저 새 집권정부의 자기 사람 심기로 이해한다면 이는 큰 오해이다. 중정이나 안기부가 행한 국가폭력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이기 때문에, 인권의 큰 규범 중 하나인 '불처벌 원칙'에서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 기구인 것이다. 특히나 국가기구가 행한 국가범죄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 및 청산은 인권침해 구제 및 예방에서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국정원의 개혁이 인적 청산으로 가능할까 싶다. 국가비밀정보기구가 현존하는 한, 아무리 민주적 통제장치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지더라도 '조직생존' 논리로 여러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정원이 공적 조직이라고 하지만 국정원 운영은 비밀조직에 가깝다. 정보기관의 '비밀'이라는 속성이 국가권력의 사적화·사유화를 촉진하기에 비밀정보기관과 민주주의적 시민사회는 공존하기 어렵다. 아무리 한국이 분단국가라지만 국가비밀정보기관이 '적'을 상정하고 테러조직을 상정하는 한, 국가비밀정보기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들을 '잠재적 위험인자'로 감시하고 배제시킬 수 있다. 국정원 홈페이지에 나온 국정원 직원윤리헌장에 버젓이 "직무상 기밀은 끝까지 엄수한다.", "평생직원으로서의 긍지를 소중히 간직한다"라는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기관임에도 공적 기관의 공무원의 자세나 국민이나 사회구성원에 대한 책임감은 전혀 없으며, 비밀활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나마 국정원의 예산이나 활동을 감독하는 유일한 기구인 국회 정보위 회의조차 비공개로 되기 일쑤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새누리당 서상기 위원장이 자신이 발의한 '국가 사이버테러 방지에 관한 법률안' 상정을 요구하며 국회정보위의 소집을 거부하고 있을 정도이니, 국정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요원하게 보인다.
*이 글은 "[인권으로 읽는 세상] 막후세력 국정원, 정치개입만 막으면 될까"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www.freeuse.or.kr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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