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후 다른 노동자들이 용무를 마치고 상담실을 빠져나가고 마침내 상담실에 통역을 해야 하는 입 무거운 남자 노동자 한 사람이 남게 되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 안에 저장된 몇 개의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신들이 짐을 싸 3시간 반 동안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이곳으로 '도망 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 사진들과 동영상에는 '어둑한 풀밭', '얼어버린 농로', '비닐하우스 뒤편 도랑', '연탄 화덕이 설치된 비좁은 취사 공간', '다라이(대야)와 거기에 걸친 물 끓이는 전기 막대 장치' 등의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입을 오므려 조용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화장실이 없어요! "
"뭐라고요? 그게 뭔 소리? 공중화장실도 없어요?"
"없어요. 화장실 없어요."
C 씨와 M 씨는 야채 비닐하우스 30여 동에서 일을 했다. 얼추 5000평이 넘는 시설 야채 작업장이다. C 씨와 M 씨의 숙소는 그 크고 하얀 비닐하우스촌 변두리에 가설된 '작고 검은 비닐하우스'다. 의문이 들었다. '이런 규모의 작업장에 화장실이 없는 게 말이 되나?'
▲ 이들의 '화장실'로 쓰이던 밭둑 도랑. ⓒ김이찬 제공 |
"숙소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버려진 들판에 여름엔 수풀이 우거졌어요. 거기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이니까 거기까지 가서 용변을 봤어요. 그런데 너무 멀어요. 그래서 조금 동네 지리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비닐하우스 뒤편에 밭둑의 도랑을 따라서 용변을 보았어요."
"그래도 두 사람이 9개월씩이나 화장실 없이 지냈다는 게 납득이 안 돼요. 매일 아침 5시부터 저녁 6시나 7시까지 일했는데…. 일터나 숙소 근처에 화장실이 없다면, 그럼 어디에서 용변을 봐요?"
"매일 같은 곳에 용변을 볼 수 없으니까, 배변할 수 있는 몇 군데를 정하고, 그 근처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용변을 봤어요. 처음엔 3일~5일 배변을 참기도 했어요."
"참내…창피했겠다…."
"선생님! 창피했지만 그건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너무 추워서 그렇게 못 하겠어요. 한국 겨울 이렇게 추워요?"
"사장님한테 화장실 달라고 말 안 했어요?"
"여러 번 했어요. '너무 추워요. 사장님 화장실 주세요'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사장님 말했어요. '한 사람 200만 원 줘. 다른 데로 가게 해 줄게. 딴소리할 거면 캄보디아에 보내 버릴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너무 슬프고 너무 추워서 그냥 나왔어요."
게다가 이 작업장엔 일한 후에 몸을 씻을 온수도 없고, 욕실도 없다. 샌드위치 패널로 가설된 방을 데우는 유일한 난방 장치인 연탄보일러는 시간을 맞추어 연탄을 갈아대지 않으면 꺼지기 일쑤다. 더구나 이 노동자들은 그들이 살아온 20년간 '연탄'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겨울에 매일 12시간 가까이 일해도 그나마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침실마저 난방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어디에 가서 몸을 쉴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분노할 겨를이 없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의 체류권에 심각한 위험을 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용허가제도 안에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이탈'하면 안 된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탈 신고'라는 것을 하는데,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1개월 안에 당국에 근거를 가진 항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미등록 노동자'(한국 법무부의 호칭으로는 '불법 체류자')가 된다.
관할 고용노동부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구제 방법을 물었다. 그 직원이 답한다.
"그래요? 참 안됐네요…. 그런데, 지금 노동자들한테는 고용센터에 진정할 권리가 없고, 사장님이 '이탈 신고'를 하면 근로자들이 '불법'이 되니까, 지금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복귀해야 해요."
화가 난다.
"아니, 이렇게 추워서 취사하고 목욕하는 공간의 물들도 꽁꽁 얼어붙은 데다가, 화장실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데 그곳으로 돌아가란 말이에요? 노동자들이 창피해서가 아니라, 추워서 절대로 거기로 갈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 일터를 떠나면 안 돼요. 일터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안된 일이지만 고용센터는 직권으로 노동자들의 사업장을 변경해줄 수 없어요. 사장님이 허락해야 해요."
▲ 이들이 살던 주거시설(왼쪽), 배수 시설이 없는 부엌 겸 욕실 공간(오른쪽). ⓒ김이찬 제공 |
하는 수 없이 관할 노동청 근로감독과에 다시 진정을 하였다. 진정 요지는 첫째, 매월 300~315시간씩 일했는데 월급을 103만4000원 지급한 것, 둘째, 화장실이 없고, 근로자들이 화장실을 요구하자 사장이 노동자 1인당 200만 원씩의 금품을 요구하는 등 현실적으로 주거와 근로가 불가능하다는 것.
한참 머리를 긁적이던 근로감독관이 말한다.
"아무리 알아봐도, 근로기준법이나 노동 관계 법령에 화장실에 대한 규정이 없네요."
"그러면 조사 안 하실 거예요?"
"하기는 할 텐데, 임금 부족분에 대해서만 조사할 수 있어요. 화장실에 대해서는 사용자에게 구두로 '권고'할 수는 있지만 법령에 명시된 것이 없으니 강제할 수 없어요…."
그렇다.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에서 '화장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니, 근로감독관들이 머리만 긁적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안전하게 배변하는 것"은 생존권적 기본권이 아닌가? 그런데 정부 기관이 현행법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도 극도로 인색한 상황이라면, 명문으로 규정되지 않은 권리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해주길 기다리는 게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다.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화장실 없는 노동자들이 어깨동무하고, '노동청에 가서 원 없이 똥을 누는 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인의 정류장'은 이주 노동자 교육과 상담을 통해 이들의 삶을 영상 등의 미디어로 풀어나갈 수 있게 돕는 문화 단체입니다.
*이 글은 "[김이찬의 인권이야기] 똥 쌀 권리"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www.freeuse.or.kr을 찾아가면 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