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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스타' 김주희, 그 경기는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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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스타' 김주희, 그 경기는 멈춰야 했다

[이종훈의 멘붕 스포츠]<4> 세계챔피언인가, 스펙 푸어인가?

"복싱에 마법이 있다면 엄청난 인내력을 가지고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상처가 찢어져 벌어지는 것을 참고 망막이 터져도 참고 싸운다는 거지. 그건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한 모험이다."

지난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휩쓴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나오는 명대사이다. 지난 2010년 9월 12일 '4대 기구 통합 타이틀 방어전 및 세계복싱연맹(WBF)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 경기를 끝마친 김주희 선수의 사진을 보면서 이 대사가 다시금 떠올랐다. 사진 속의 그녀는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한쪽 눈이 혹처럼 부어 있었고, 얼굴은 뼈가 깨진 것처럼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복싱이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한 모험"이라는 영화 속 대사가 '허구가 아닌 현실'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리고 언론은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김주희를 가리켜 '한국판 밀리언달러 베이비'라고 치켜세웠고,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당시의 이런 찬사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당시 경기는 중단되었어야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복싱 경기 룰에 따르면, 선수가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에는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의사가 선수의 상태를 체크하게 할 수 있으며, 더 이상 경기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그동안의 채점을 가지고 판정으로 승패를 가려도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시 김주희 선수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심하게 부어올랐고, 코피까지 계속 흐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주심은 경기를 계속 진행시켰고, 의사 또한 김주희 선수의 상태를 체크하지 않았다.

▲ 2010년 9월 12일 4대 기구 통합 타이틀 방어전 및 세계복싱연맹(WBF)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 경기를 끝마친 김주희 선수. 한쪽 눈이 혹처럼 부어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주심이 경기를 중단하려 했어도, 이 날을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계속해온 '악바리' 김주희 선수가 경기를 계속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4살의 작고 여린 여성이 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다는 말로 위험천만한 모험을 하려고 한다면, 말려야 마땅하다. 챔피언 벨트보다는 선수의 안전이 수천 배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은 우리 언론이 말하는 '세계 최초의 세계 8대 기구 통합 챔피언' 김주희를 비롯해 최현미, 김단비, 우지혜, 유희정, 박지현, 홍서연, 신건주, 신윤희, 김연희 등 총 10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챔피언 숫자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을 세계 여자복싱 최강국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듯 보인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한국 챔피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걸까? 그것은 현재 세계 여자복싱계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 벨트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우리 언론들은 김주희 선수가 이른바 '세계 8대 기구 통합 타이틀전'에서 승리해 세계 8대 기구 타이틀을 석권한 세계 최초의 선수가 됐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당시 김주희 선수는 석권한 세계 8대 기구는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여자국제복싱연맹(WIBF), 세계복싱연합(GBU), 세계복싱연맹(WBF), 여자국제복싱평의회(WIBC), 국제복싱평의회(UBC), 챔피언오브디그니티협회(CODA), 세계프로복싱연맹(WBPF)이다.

김주희 선수가 이 8대 기구의 챔피언 벨트를 얻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을 부인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이 8대 기구들을 검색해 보면, 왜 우리 언론들이 이 기구들에게 '세계 8대 기구'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대부분의 홈페이지가 체급별 랭킹 선수 이름만 나열해 놓은 조잡한 수준이고, 심지어 홈페이지를 찾을 수 없는 곳들도 있다. 또, 등록 선수 숫자의 경우, 거의 모든 기구들이 한 체급에 등록된 선수가 10명이 채 되지 않는 체급들을 갖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턱없이 작다(몇몇 기구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명박 정부 시절, 제주도를 비롯해 대한민국 전체를 우롱했던 '세계 7대 자연경관'의 세븐원더스가 연상될 정도다).

미국의 복싱 관계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세계 여자프로복싱은 수많은 단체가 세계 기구를 자처하며 난립하고 있는데다가, 이들 기구들은 체급도 치즈버그 하나를 먹느냐 안 먹느냐에 따라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 게다가 심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홈 텃세가 심해 누가 최강자인지 구분할 방법도 없다. 때문에 세계챔피언이란 이름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이것이 지금 세계 여자 프로복싱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지금 전 세계 여자 프로복싱은 세계챔피언 벨트의 공급 과잉으로 그 희소성과 가치를 잃어버린 인플레이션 상태이고, 한국의 여자복싱 관계자들은 이런 인플레이션을 적절히 이용해 세계챔피언들을 양산해내는 수완을 보여 왔다.

덕분에 국내에서 열리는 여자 복싱 경기는 거의 대부분이 세계 타이틀전이다. 대한민국은 한국 타이틀전보다 세계 타이틀전이 더 흔하게 열리고 있는 나라이며, 실제로 한국 챔피언보다 세계 챔피언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기형적인 구조를 가진 나라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여자복서로 살아가려면 세계챔피언 벨트 한두 개는 기본 스펙이 된 지 오래고, 선수들 역시 흥행을 위해서 체급을 바꾸거나 이 기구, 저 기구를 옮겨 다니며 가능한 더 많은 벨트를 따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 지 오래다.

한국 여자 프로복싱계의 이런 벨트에 대한 압박과 집착은 4-5경기 만에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초단기 세계챔피언 등극을 양산하고 있다. 심지어 김효민, 최현미 선수의 경우처럼 1-2경기 만에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선수들도 있다. 복싱 역사를 통틀어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들이 유독 한국에서만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한국 여자 프로복싱은 이를 위해 가짜 선수를 데려와 시합을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최현미의 경우처럼 치르지도 않은 데뷔전을 가짜로 조작하는 사기 행위도 불사하는 대담성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복싱팬들은 실력이 아닌 세계챔피언이라는 스펙만을 내세우는 여자 복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8대 기구 통합 세계챔피언이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아온 스타 김주희마저도 경기 스폰서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해야 할 처지가 됐다. 프로복서에게 경기가 없다는 것은 곧 수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얼굴이 퉁퉁 붓도록 맞아가면서 꿈에 그리던 세계챔피언이 되어도, 경기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여전히 생계를 위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한국 여자 프로복싱이 겪고 있는 위기와 침체는 세계챔피언이라는 스펙에만 함몰된 기형적인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선수들이 꿈을 안고, 꿈을 위해 링 위에서 엄청난 인내심과 노력을 보여줬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런 기형적인 구조와 꼼수들로 인해 그들의 인내심과 노력은 평가절하되었고, 급기야 그들의 눈물과 땀방울마저도 차갑게 외면받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여자 프로복싱은 "세계챔피언전이 아니면 경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말로 선수들에게 "벨트를 하나라도 더 따라"고 강요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가? 그렇다. 지금의 한국 여자 프로복싱 구조는 스펙 과잉과 스펙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인해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취업이 안 되는 '스펙 푸어'와 '워킹 푸어'를 양산하면서도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스펙 쌓기에 더 매달리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닮았다. 2000년 이후, 우리 기업들은 수상 경력, 어학연수, 토익, 자격증, 봉사활동 등의 빈칸이 만들어진 이력서를 내놓았고, 그 결과 청년들은 이 빈칸을 메우기 위해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싸우고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실업난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해가 지날수록 취업대란은 더 심각해졌고, 스펙 쌓기 싸움 또한 더 치열해져만 갔다. 이런 구조가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많은 청년들이 스펙 쌓기와의 싸움에서 패했고, 스펙 때문에 청년의 삶은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지는 삶이 전락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이 스펙 쌓기와의 싸움에서 패한 청년들의 노력과 인내심을 평가절하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스펙 푸어', '워킹 푸어'라는 딱지를 붙이며 그들의 눈물과 땀방울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는 스펙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사는 청년들을 향해 "인내심의 마법을 믿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 상처가 찢어져 벌어져도 참고, 망막이 터져도 참고 싸워라"는 영화 속 대사를 남발하고, 맞아서 일그러진 김주희 선수의 얼굴 사진을 들이밀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말해 왔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을 먼저 보호하라"

이 말은 앞에서 말한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트레이너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꿈을 위해 위험한 모험'도 불사하려는 자신의 선수인 메기에게 영화 내내 강조하는 말이다. 어쩌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스펙 쌓기의 쳇바퀴로 인해 불안감과 경제적 고통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해줘야 하는 말은 이 말이 아닐까?

아울러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불고 있는 '스펙 타파 열풍'이 일시적인 바람에 그치지 않도록 기성 세대들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스펙과의 싸움은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그 부모 세대들의 삶마저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주범이다. 따라서 기성 세대에게 있어 청년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스펙과의 싸움에서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에게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지면서 꿈을 향해 위험한 모험을 선택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네 자신을 먼저 보호하면서 꿈을 향해 가라고 할 것인가. 답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스포츠평론가 이종훈은…

'무한경쟁과 승리의 스포츠'보다는 '힐링의 스포츠',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보다는 '나를 응원해주는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은 자칭 비주류 스포츠평론가이다.

현재 MBC 라디오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과 팟캐스트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 위의 글은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의 코너인 [멘붕 스포츠]를 기사로 옮긴 것입니다. <공짜 가라사대>는 여행, 레저,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상품을 공짜로 나눠주는 팟캐스트입니다.

☞ 팟캐스트 바로 듣기 http://podbbang.com/ch/5783
☞ '공짜 가라사대' 온라인 카페 http://cafe.naver.com/freec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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