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미국 대선의 부통령 토론은 대선 자체의 판도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11일(현지시간) 미 켄터키주에서 열린 부통령 토론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며, 이번 토론회가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양 대선 캠프가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수개월간 오바마에게 지지율이 뒤지던 롬니는 지난 주 첫 토론에 사활을 걸었고, 이날 따라 유독 피곤해하면서 평소의 달변을 펼치지 못한 오바마에게 맹공을 가했다. 토론 직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롬니가 오바마의 지지율을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오바마는 대선의 향방을 가를 경합주에서 여전히 우위를 지키고 있다.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 폴 라이언으로서는 롬니의 성공을 이어가야 한다는 목적이, 바이든에게는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기에 토론이 불꽃을 튀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평소 온화하고 겸손한 이미지로 알려졌던 바이든은 이날 90분간의 토론에서 시종일관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자신보다 27살이 어린 라이언을 맞아 바이든은 상대방의 발언 도중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리거나 수시로 말을 끊고 끼어들면서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라이언의 주장에 "허튼소리"(malarkey), "부질없는 말"(loose talk) 등의 거친 단어를 사용해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라이언은 바이든의 공세에 "(전세를) 만회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 말을 끊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더 좋을 것 같다"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바이든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오바마의 실정을 들췄다.
▲ 미국 켄터키주 댄빌의 센터대학에서 11일(현지시간) 부통령 후보 토론회가 끝난 뒤 민주당 조 바이든 부통령과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의원이 서로 지나치고 있다. ⓒAP=연합뉴스 |
라이언의 '창', 만만찮은 바이든의 방패
이날 진행을 맡은 <ABC> 방송의 마사 라다츠 기자가 첫 번째 토론 주제로 리비아 벵가지의 영사관 공격 사건을 거론하자 라이언은 초반부터 치고 나갔다. 라이언은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본 것은 엉망진창인 오바마의 대외정책"이라며 백악관의 책임론을 부각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문제와 관련해 라이언은 철군론 자체에는 동의한다고 밝히면서도 그 결과가 적들의 힘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오바마가 이란 핵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공격했고 시리아 문제에서도 무력 개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바이든은 외교 공관의 경비 비용을 삭감한 것은 공화당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롬니에게는 오바마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과 같은 대외정책 성과가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란 제재는 역대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취해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공화당이 중동에서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반격을 가했다.
주제가 지난 주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경제 분야로 옮겨가자 바이든의 공격은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바이든은 오바마가 지난 주 토론에서 거론하지 않았던 롬니의 '세금을 내지 않는 47%의 미국인' 발언 등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라이언을 밀어붙였다.
라이언은 "부통령이 가끔씩 속으로 생각한 단어가 입으로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바이든 또한 지금까지 잦은 말실수로 유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그는 "롬니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미국인 (47%가 아닌) 100%를 신경 쓴다"라고 옹호했다.
바이든은 또 롬니의 5조 달러 감세 정책에 대해 불가능한 공약이라고 공격했는데 라이언은 롬니가 대통령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금을 감축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길 거절했다. 그는 "우리는 당파를 초월한 동의를 얻고자 한다. 롬니가 자신의 생각을 미리 펼친다면 그러한 동의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라이언, 이번엔 당신이 케네디인가"
미국 언론들이 이번 토론회에서 가장 재미있는 순간으로 꼽은 장면 중 하나는 존 F. 케네디(잭 케네디)를 거론한 라이언에 대한 바이든의 반응이었다.
감세 정책이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이든에게 라이언이 "잭 케네디 대통령도 세금을 낮추면서 성장률을 높였고…"라고 운을 떼자 바이든은 "이번엔 당신이 잭 케네디인가"라고 맞받아쳐 청중의 폭소를 이끌었다.(☞영상 보기)
바이든의 농담은 1988년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41세의 나이로 출마한 댄 퀘일 공화당 후보가 "1960년 (43세의)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가졌던 경험을 나도 갖고 있다"고 말하자 민주당의 로이드 벤슨 당시 부통령 후보가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응용한 것이다.
당시 벤슨의 발언은 역대 부통령 선거 토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회자되지만 민주당은 이 토론회 이후에도 공화당의 지지율을 넘어서지 못했다. 부통령 후보 토론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격렬하게 진행된 부통령 후보 토론회는 드물다고 전하면서 지난 2008년 대선 당시 바이든이 국정 경험이 거의 없었던 사라 페일린과 붙어 긴장감이 떨어졌다면 이번에는 예산 및 복지에 전문성이 있는 라이언과 격돌한 것을 한 원인으로 꼽았다.
신문은 또 바이든이 종종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숫자보다는 일화를 드는데 집중한 반면, 라이언은 최근의 추세를 보여주는 수치와 오바마의 정책이 초래한 결과를 강조하는데 집중했다고 평가했다.
애초 바이든의 잦은 말실수를 걱정한 민주당과 롬니가 라이언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도 라이언의 정책 구상을 모두 수용하지는 않겠다고 밝혀 불안감을 줬던 공화당 모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토론이 끝난 뒤 "1주일 전 오바마와 롬니가 보여주지 못했던 토론이었다"고 평가했다.
토론 직후 <CNN>이 여론조사 기관 ORC인터내셔널과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8%는 라이언 후보를, 44%는 바이든 부통령을 이번 토론의 승자로 꼽았다. <CBS> 방송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바이든 부통령을 승자로 꼽은 이가 50%, 라이언 후보를 꼽은 이는 31%에 그쳐 엇갈린 평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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