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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 껍질 아래, '노인복지'의 속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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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 껍질 아래, '노인복지'의 속살을 보라

[복지국가SOCIETY] 역사를 통해 바라본 '노인'과 '노인복지'의 탄생

오래 살게 된 것은 분명히 축복이지만 한국 사회의 많은 노인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단적으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노인자살률이라는 지표는 그러한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야기된 이유 중의 하나는 평균수명의 연장이라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한국 사회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사고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구조의 변화라는 매우 심각한 현상이 너무 급속하게 진행되다보니, 이를 둘러싼 논의들은 대부분 "늙고 쓸모없어진 노인들을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일 뿐, 기대수명의 연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부족하다. 한국 사회는 노인 공경을 매우 높은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노인의 빈곤율과 자살률을 보면 노인들을 존경하기는커녕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보다 고령화 현상을 일찍 경험한 유럽 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상대적으로 노인 복지가 꽤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공적 연금제도가 발달하여 은퇴 이후의 노인들이 오히려 안정적인 삶을 잘 영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국가들은 언제부터 노인 문제를 경험하기 시작했을까? 이들은 어떻게 이 문제에 대처해 왔고,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이 글에서는 주로 서구의 선례를 통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노인 복지에 대한 역사적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중세 말 근대 초의 노인에 대한 인식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노인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이중적인 것이었다. 고대와 중세에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가졌던 경멸과 찬양이라는 이중적 태도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에 플라톤이 스파르타의 장로 정치를 찬양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년을 하나의 쇠퇴로 보면서 지혜도 정치적 능력도 없는 시기로 생각했다.

이러한 시각은 16~17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즉 노인은 한편으로는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롱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학적으로 보면 노인이 일종의 경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에 숲 속에서 살던 노인들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종종 이들은 그들의 외모 때문에 마법사와 마녀로 오인받기도 하면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긍정적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일정 정도 격리되면서도 또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노인은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계층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도 못하였다. 예를 들어 자선의 범주에서 노인은 다른 빈민들과 달리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역사가 장-피에르 부아(Jean-Pierre Bois)는 "중세시기에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범주 안에서 자신의 생존 능력에 의해 규정되었다. 젊거나 늙었거나 아니라 사회에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판단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노인에 대한 중세인들의 관심과 관념이 현재와 같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인에 대한 태도가 이중적이었던 것과 동시에 중세에는 노인을 위한 전문화된 자선 기구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노인은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자선의 대상으로 강조하는 과부와 고아, 병자와 장애인과 같은 범주에 들지 못했다. 다만 '병든 빈민'에 대한 자선이 아마도 노인에 대한 자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뿐이다. 또한 노인에 대한 자선의 언급이 있는 경우에도 그 경계는 매우 모호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당시 가난한 맹인들을 위한 캥즈-뱅(Quinze-vingt)에 노인들이 많이 들어갔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그들이 노인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적 불구 때문에 자선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인들은 아직 자선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시에 가장 흔하게 쓰이던 '아픈 빈민'(Pauvres malades)에 속해 있었다.

16~17세기에도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강하게 존재했지만 16세기 초 빈민의 수가 급증하고, 특히 노인들이 빈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노인 빈곤의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프랑스 사회는 소극적이나마 대응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즉 노인들에게 자선을 제공한 사례가 이전보다 더 자주 관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리옹시가 1534년 1월 자선을 담당하는 보시총국(Aumô̂ne générale)을 설립했을 때, 이 기구는 빵을 사먹을 수 없는 노인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자선을 베풀었다.

1544년에 파리에서 창설된 빈민국의 부속기구 가운데 프티 메종(Petites Maisons)은 가족과 떨어져 살던 7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에 대한 자선을 중점적으로 담당했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허약한 노인들을 파리 시가 인지했다는 점에서 노인에 대한 전문화가 시 차원에서 논의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곳에서의 삶이 현대의 요양원에서의 삶처럼 안락하지는 않았겠지만, 점차 자선사업에서 노인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취해졌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노인에 대한 배려는 이전 세기보다 더 자주 관찰되었다. 렝스(Reims)에서는 1630년대부터 남녀의 성을 구분하여 노인을 수용하였으며, 1657년에는 노인들만을 위한 병원을 창설했다. 릴에서는 1624년에 남성 노인을 위한 생-샤를 보로메(Saint-Charles Borromée) 병원이 건설되었다. 노인에 대한 배려는 특히 국가가 상이군인에 대한 처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크게 발전했다. 특히 노병들에 대한 연금 지급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558년 블레즈 드 몽릭(Blaise de Montluc)은 왕에게 불구가 되고 상처를 입은 가난한 군인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앙리 3세 때에는 불구가 된 군인들에게 부조를 제공하기로 했지만 부조를 받으려면 상처가 있어야 했고 나이가 많았어야 했으며 복무기간도 중요했다. 이후 1670년에 앵발리드(Invalides)가 창설될 때 불구가 된 군인들이 최우선적으로 그 대상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국가에 헌신하고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복무할 수 없는 군인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상이군인들을 위한 기관의 설립과 발전은 장차 군인연금의 탄생과 정비로 이어졌다.

노인계층의 확대와 긍정적 이미지로의 변화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변화한 것은 18세기 들어 인구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면서부터다. 실제로 18세기부터 기대수명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기대수명의 증가는 당시로서는 매우 놀랄만한 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생-기욤(Saint-Guillaume) 교구에서 1세 아이의 기대수명은 1709~1722년의 33년 6개월에서 1774~1776년에는 36년 3개월로 크게 증가했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노인계층'의 탄생이라고 부를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제네바에서 18세기 초와 말 사이에 65세 노인들이 80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생존할 가능성은 1,000명 당 142명에서 223명으로 증가했다. 1850년 무렵부터 평균수명은 28세에서 34세로 증가했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1789년에 행한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남성 인구가 전체 인구의 7.8%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에 기인한 것인가? 전쟁의 감소, 대규모의 전염병이 잠잠해진 것, 의학의 발전도 그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기후 변화에 있었다. 기후 온난화와 적절한 강수량은 새로운 경작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남유럽에서의 옥수수, 북유럽과 중부유럽의 감자, 그리고 곡물 수확의 증가가 그것이다. 기근의 감소는 영양의 개선으로 이어졌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인구는 600만~700만 명이 증가했으며, 혁명 전에는 2,600만 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연령도 증가하여 최소 60세는 되어야 했다.

노인 수의 증가와 함께 노인과 노년에 대한 시각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노년을 온화한 죽음이라고 보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한 것은 과학자들이었다. 뷔퐁(Buffon)은 1749년에 󰡔인간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 de l'homme)에서 노년기를 신체가 수척해지고 서서히 노쇠해가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죽음이란 어떤 한 순간에 닥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년기의 모든 순간이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어떤 치명적인 마지막 순간이란 없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18세기에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노년에 대한 담론도 새롭게 바뀌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 때까지 활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각이 대두한 것이다. 뷔퐁은 인간의 수명을 90세, 100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으며, 특히 신체를 잘 관리함으로써 수명을 크게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 대신 그는 인간은 자신의 생의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쾌락은 모든 연령대에 가능한 것이었다.

노인이 가지는 양육이라는 사회적 가치 역시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루이 15세나 루이 16세 시대의 회고록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회고록을 남긴 사람들 중 일부는 조부모가 그들의 교육을 담당했음을 기록했다. 마담 죠프랭(Madame Geoffrin)은 조모에 의해 키워졌는데, 조모는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명민한 사람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부모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문학에서도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빈번하게 다루어진 주제들이 노인들의 현명함과 풍부한 경험이었다. 노인들의 현명함은 죽어가는 노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났다. 이제 노인들은 침대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구원을 말하기보다는 자녀세대가 져야할 책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캉디드󰡕(Candide)나 󰡔나의 아버지의 삶󰡕(La vie de mon père)에서 노인은 영웅들의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노인은 지성과 덕성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소설들은 노인들의 이러한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노년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문학 작품들은 가족관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노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1700년에서 1789년 사이에 수많은 희곡들이 노인을 등장시켰다. 이 희곡들에서는 종종 노인들이 젊은 여성과 결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제 더 이상 이를 다른 등장인물들의 냉소나 분노를 야기하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조롱하기를 일삼는 몰리에르 희곡과는 달랐던 것이다. 1745년에 필립 네리코-데스튜슈(Philippe Néricault-Destouches)의 '사랑스런 노인의 장면'(Scènes de l'aimable vieillard)은 젊은 아내에게 사랑받는 늙은 남편을 등장시켰다.

회화의 경우 18세기 전반기에는 노인을 묘사한 사례가 거의 없었지만, 하반기가 되면 많은 그림들이 노인을 그렸으며 전달하는 메시지도 "노인을 공경하라"로 뚜렷해졌다. 그 이후 다른 어떤 주제보다 자선과 가족의 덕목에 대한 찬양이 다루어졌다. 이 시기에 계몽주의 시대에 철학자들은 질서와 덕을 보장하는 '노인-사려 깊음'을 고양시켰다. 노인들은 그들이 가진 사회적 유용성 덕분에 존경받아야 했다.

노인에 대한 이미지의 개선은 노인계층을 부양하기 위한 사회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노인을 위한 호스피스의 개념은 구체화되었다. 큰 병원들은 병원의 일부를 양로원으로 변형시켰다. 이것은 이후 노인 전문 호스피스로 발전하게 된다. 1733~1747년 사이의 한 농부는 토네르(Tonnerre) 병원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커다란 방에 30~40명의 노인들이 기거하고 있었고 매우 잘 대우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블루아의 종합 병원에 입원한 이삭 지라르(Issac Girard)는 1723년 8월 10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병원에 들어간 날은 나에게 아주 좋은 날이었고 내 인생에게 가장 행복한 날 중의 하나였다".

리옹의 자선 병원 역시 노인들을 위한 특별시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노인들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노인 구호 활동도 활발해져 구호의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는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높았다. 아미앵에서 1778년에 행정관은 걸인들에게 시청에 등록할 것을 요청했다. 548명의 남녀 걸인들이 등록했는데, 60세 이상인 사람이 62.76%였다. 블루아에서 1707~1813년까지 종합병원에 들어온 2,455명에 대한 조사를 보면 60세 이상의 노인의 수는 적어도 35%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이가 알려진 성인들의 73%를 차지하는 수치였다. 1770년에 리옹의 자선병원에 체포되어 수감된 걸인들의 나이를 보면, 60~80세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노쇠하여 생활능력이 없어진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병원에서 피난처를 찾았던 것이다.

노인계층의 지혜와 이의 사회적 공유가 바로 복지국가의 책무

이와 같은 서구의 노인 문제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흐름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서양에서는 노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빈곤한 노인 계층에 대한 사회의 대응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6, 17세기는 아직 기대수명이 증가하기 전이고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강했지만 노인들을 배려하는 사회의 노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두 번째, 18세기 노인 문제의 급증은 사회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변화였는데, 이에 대해 서구 사회는 노인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꿈으로써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차후 노인 문제에 대한 제도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세기가 되면 노인 수의 증가와 함께 노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확산되면서 병원 역시 호스피스 기능을 맡게 된다. 병원은 국가의 지원 아래 빈민 수용소의 역할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며, 이후 노인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책임을 맡게 된다. 이후 병원은 노인들의 건강과 함께 그들이 겪었던 고독감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심리적 방향으로도 그 관심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모든 것은 노인이 사회의 주요한 계층이며, 이들의 지혜가 사회에 매우 유용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노인은 보수적이다"라는 말 이전에 노인들을 위한 교육적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혹은 '동방예의지국', '어른 공경의 오랜 전통을 가진 한국'이라는 피상적인 말 이전에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제도적 장치를 통해 노인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노인들에게 적절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지혜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것은 진정한 '복지국가'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책무라는 것이다.

▲ 사진은 본문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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