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에 이만희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과 문정숙이 주연한 <만추(晩秋)>의 배경은 서울이다. 그리고 1981년 감수용 감독이 연출하고 정동환과 김혜자가 주연한 <만추>의 배경은 강릉이다. 그러나 2010년 김태용 감독이 연출하고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으로 활약한 <만추>의 배경은 미국의 시애틀이다. 1966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과 2010년의 시애틀은 어떤 유사성과 차이가 있을까?
그런데 2010년 김태용 감독이 <만추>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간 곳은 미국의 시애틀이다. 김태용 감독이 시애틀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60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에서 보여주었던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의 공간이 오늘날의 미국 시애틀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6년의 서울과 1981년의 강릉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공간은 근대적인 가족과 자본의 권력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과 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을 찾는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대한민국의 외부로 쫓아내는 공간이 되었다. 김태용 감독은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우정을 추적하기 위하여 미국의 시애틀로 갔다. 물론 그곳이 미국의 시애틀이 아니어도 좋다.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이 이루어지는 곳은 미국의 텍사스일 수도 있고, 필리핀의 마닐라일 수도 있고, 인도의 캘커타이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권력과 자본들도 또한 1966년의 서울이나 1981년의 강릉처럼 호락호락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태용 감독은 1966년 <만추>의 배경이었던 서울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돈(자본주의의 자본)에 대한 욕망이 1981년 <만추>의 배경이었던 강릉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깡패집단이 되고, 마침내 2010년 미국 시애틀에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미국이라는 깡패국가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을 추적한다.
II. 탈근대적 지구촌의 깡패국가, 미국
문제는 미국이라는 국가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근대화 과정의 유랑자들이 만든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미국은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인디언들은 물론이고 백인, 특히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범죄자나 타자로 취급한다. 훈이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직 돈만 벌어서 자기 나름대로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애나의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7년 동안의 소외된 삶에서 우러나오는 쓸쓸함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돈만이 그의 살아있음을 보장해 줄 것이고, 그 돈을 위하여 현실의 영혼과 젊음을 파는 것은 미국이라는 깡패들의 나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애나는 다르다. 아직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훈이보다 한 세대나 두 세대, 혹은 그 이전에 미국에 온 그녀는 돈이란 삶의 보완물이지 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이미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근대적인 남성의 애정불구자이고, 오빠를 비롯하여 그녀의 가까운 가족들은 오직 어머니가 남긴 돈에만 관심이 있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사랑이나 우정은 그저 사치품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소수자들로 치부하는 앵글로-색슨 중심주의 깡패국가에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돈과의 관계만을 삶의 중심에 우뚝 세우고 사는 고립된 감옥의 세계를 감지한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미국이 앵글로-색슨 중심주의 깡패국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앵글로-색슨이 아닌 모든 소수자들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돈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좀비들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좀비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7년의 감옥생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올 수 있었던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반납하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루지 않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망설임의 순간에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시애틀 행 버스에서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붙였던 좀비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느낌을 지닌 훈이다.
근대의 국가적 서열구조나 자본주의가 만든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삶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욕망은 모든 살아있는 사람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러한 생명의 힘은 근대의 국가적 서열구조나 자본주의에 덜 물들어 있는 여성에게 더욱 강렬한 힘으로 작동한다. 그 사람이 바로 시애틀의 호텔로 찾아와서 훈이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함께 도망치자고 요구하는 옥자(김서라 분)이다. 애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받은 옥자의 애절한 목소리를 훈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옥자에 대한 훈이의 마음은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힘을 믿고 있는 동일한 인간에 대한 우정이다.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을 성적 대상이거나 인식적 타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그러한 소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도 못한다. 옥자의 미국인 남편, 스티븐(제임스 번즈 분)은 권력이나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훈이에게 다가가는 옥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훈이의 삶을 폭력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마음과 느낌이 아니라 돈과 권력으로 사랑과 우정을 가로채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폭력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훈이를 애타게 찾는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2년 후 감옥에서 출소한 애나의 기다림은 어떻게 되었을까?
III.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
2010년의 <만추>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미국의 자본과 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태용 감독이 영화 <만추>를 다시 만들기 위하여 서울과 강릉을 거쳐 미국의 시애틀로 간 이유는 오늘날 지구촌 모든 지역의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만드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미국이라는 자본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영화적 삶의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그리고 2010년의 <만추>를 통하여 1981년과 1966년의 <만추>를 되돌아 볼 때, 미국이라는 제국을 정점으로 하는 각 지역의 깡패집단과 자본의 종속으로 이루어진 국가권력이 지구촌 모든 지역들의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는 거대한 족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추>에 등장하는 훈이와 애나가 서로서로 갈망하며 찾는 것처럼 이라크인과 이란인, 아프가니스탄인과 파키스탄인, 볼리비아인과 과테말라인이 서로서로 갈망하며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미국은 마치 영화 속의 스티븐처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지역과 지역이 만나지 못하도록 폭력으로 가로막는다.
1966년, 1981년, 그리고 2010년의 <만추>가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이웃하고 있는 지역과 지역, 그리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사랑하고 우정을 맺는 관계를 차단하는 근대적 국가와 깡패집단의 최고 정점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영화 <만추>에서 훈이를 애타게 찾는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은 우리와 같은 100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 즉 서남아시아와 이슬람 지역의 300년,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지역의 500년 역사가 만든 근대화 과정의 종말에 대한 욕망이고 기다림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지난 100년, 300년, 혹은 500년의 근대화 과정은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의 지역과 지역, 그리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망각하고 오직 식민지 지배국가와 피식민지 국가의 종속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만을 사유하고 행동했던 시대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반도가 지니고 있는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는 지역과 지역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오직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으로 점철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나의 삶에 대한 욕망과 기다림은 미국이 근대 제국주의의 서구 유럽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한 나라로 되돌아가고, 훈이와 애나와 같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지역과 지역의 여러 나라들이 자유롭게 만나서 사랑하고 우정을 맺는 삶에 대한 욕망이고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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