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인 1월 18일, 최 씨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STX중공업에서 일했던 그는, 18일 출근은 했지만 몸이 너무 아파 잠시 쉬겠다며 휴게실로 갔으나, 그 자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던 것이다. 1월 7일부터 17일까지 무려 112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던 최씨는 '하청노동자'였다. (☞관련 기사 : 하청 노동자의 죽음, 장례도 못 치른 사연은…)
"이거 꼭 내 근무표와 비슷한데?" - 노동부 근로감독조차 비켜가는 비정규직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403개 사업장 장시간노동 실태를 지적해 5200여개의 신규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홍보했는데, 403개 사업장 모두가 규모가 큰 곳이며 거의 정규직 대상으로만 조사가 실시되었다. 올해에는 3만5000개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노동시간 실태 점검을 한다는데,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또한 "식료품제조업, 1차금속제조업 등 노동시간이 길고 협력업체에 대한 파급력이 큰 업종이 집중 점검 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협력업체 파급력이 큰 업종이란, 결국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들이 핵심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부의 '대규모 점검'이라는 홍보와 달리, 비정규직은 근로감독 대상에서 배제되어 있다. STX중공업에서처럼 사람이 죽어나가야 비정규직 장시간노동 실태가 폭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완성차 노동시간 실태조사를 할 때에도,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앞으로 '100인 이상 사업장' 노동시간에 대해 상시 점검 시스템을 갖추겠다고 하지만, 그동안 엄청난 외주화·도급화의 물결로 생겨난 대부분의 하청·용역·파견·도급업체는 100인 미만인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제조업 사내하청의 경우에도 원청은 하청업체 규모가 100명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비정규직이 몰려 있는 100인 이하 사업장은 장시간노동 근로감독에서 또다시 배제된다.
'일당바리' '데마찌' '특수고용' 늘어나는 참혹한 현장
근로감독에서 배제된 비정규직 부문은, 그래서 수많은 편법과 꼼수가 동원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속칭 '일당바리'(일용직·일당제)의 급증이다. 이 부문은 근로감독 영역에서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비정규직 규모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유족들에 따르면, 앞에서 언급한 STX중공업 하청노동자 최 씨도 '일당바리'로 취업한 사례이다.
일용직이 가장 많은 대표적 업종이 건설업인데, 당연히 정부의 장시간노동 근로감독에서 배제되어 있다. 건설노조가 끊임없는 현장 조직화와 투쟁을 통해 일부 현장에서는 8시간 노동제가 정착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당바리라는 이유로 철야근무와 심야근무를 강요받는 곳이 비일비재하고, 시간외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곳도 부지기수이다.
최근 몇 년간 조선업에도 하청노동자 상당수가 일당바리로 취업을 하고 있는데, 일감이 없는 경우에는 출근하지 말라는 속칭 '데마찌'(무급휴가)가 벌어지고 있다. 사업체에 취업을 했으면 응당 일감이 있건 없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감이 없는 경우란 결국 업체가 일감을 구해오지 못한 '귀책사유'에 해당하기에 '휴업임금'을 지급해야 함에도 무급휴가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데마찌가 길어지더라도 하청노동자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기 어렵다. 언제 출근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또 하청업체 퇴사를 하면 같은 원청 사업장 내에서 다른 업체로 취업이 일정 기간 제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속 계약' 형태로 일당바리를 채용하면서도 무급휴가를 보내는 것은 불법임이 명백하다. 노동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주차·월차·연차도 보장받지 못한다.
최근에는 아예 자본이 떠맡아야 할 위험부담까지 모조리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는 '특수고용' 전환도 늘고 있다. 일부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에게 아예 개인별로 '사업자 등록'을 해오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임금은 일당제로 지급하게 되며 '데마찌'는 합법으로 둔갑하게 된다.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 자영업자로 바꿔버리니 4대 보험도 회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정부의 근로감독 손길도 미치지 않는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1년에 2번씩 임금이 오르는 노동자들
그뿐이 아니다. 1년에 임금인상이 두 차례 벌어지는 노동자들도 있다. 부럽다고 말하기엔 처참하다.
최근 재벌들이 사업 철수를 선언하고 있는 어느 '빵집'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매년 1월과 5월에 임금인상이 실시된다. 매년 1월에 임금이 올라가는 이유는 법정 최저임금을 맞춰주기 위해서이다. 즉, 전년도 시급이 올해 법정최저임금보다 낮기 때문에 최저임금 수준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5월이 되면 자체적으로 근로자 복지 운운하며 시급 100~200원을 올려준다. 그런데 다음해 1월이 되면 또다시 법정최저임금 미만이 되어 다시 임금인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도 법정최저임금이라도 지켜지니 다행이지 않냐고? 단 몇 개월이긴 하지만 최저임금보다 100~200원 높은 시급을 누리지 않느냐고? 조삼모사가 따로 없다. 100~200원씩 올려주면서 생색은 회사가 다 내니 말이다.
최저임금 올라도 임금이 그대로인 노동자들
"작년에는 최저임금 올랐다며 상여금 10만 원 중에서 3만 원을 기본급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올해 또 최저임금 맞춰줘야 하니까 상여금 2만 원을 기본급으로 전환한다고 한다. 재작년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손에 쥐는 월급은 똑같은데, 기본급만 최저임금 따라 올라가고 각종 수당들이 없어진다."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 규모가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시급은 법정최저시급으로 맞춰주는데, 그 대신 각종 수당과 상여금을 기본급으로 전환해버리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항목은 점점 제수당과 상여금이 사라지며 기본급만 남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저임금 수준보다는 많이 받던 노동자들이 점점 최저임금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웬만한 미조직 공단에서 매년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없는 대부분의 제조업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법정최저시급을 받는다. 그럼 생활비를 맞추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노동자들은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할 수 있는 사업장으로 옮겨 다니게 된다. 어차피 기본 시급이 최저임금으로 동일하니, 노동시간이 많은 사업장이어야 생활비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압도적 다수의 미조직 노동자들이 장시간노동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업장들에 대한 정부의 근로감독도 없고, 임금을 보전해줄 방법도 내놓지 않으면서, 매년 최저임금 인상 때에는 정부고 자본이고 난색을 표한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건가?
주 40시간제와 함께 사라져버린 토요일 임금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이 임금 삭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단순히 잔업·특근으로 임금을 보전받아온 노동자들만의 우려가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주 40시간제'로의 법정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실제로 임금이 삭감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토요일 임금이 날아간 것이다.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40시간제'가 사업장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규모가 큰 사업장은 노동조합의 힘으로 단체협약을 통해 토요일 유급을 유지한 반면, 규모가 작은 사업장은 대부분 노동조합이 없어서 토요일 임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 40시간제가 실시되면서 토요일은 일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당연히 임금 안 주는 것이 맞지 않냐고? 그것은 노동시간 단축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시간 단축은 그로 인한 임금 보전방법을 함께 논의해왔다.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2003년 주 40시간제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국회는 부칙에 다음과 같이 '분명히' 임금보전 방책을 강구할 것을 규정한 바 있다.
근로기준법 부칙 <제6974호, 2003.9.15> 제4조 (임금보전 및 단체협약의 변경 등) ①사용자는 이 법 시행으로 인하여 기존의 임금수준 및 시간당 통상임금이 저하되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 ②근로자·노동조합 및 사용자는 이 법 시행과 관련하여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만료여부를 불문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이내에 단체협약, 취업규칙 등에 임금보전방안 및 이 법 개정사항이 반영되도록 하여야 한다. ③제1항 및 제2항을 적용함에 있어 임금항목 또는 임금 조정방법은 단체협약, 취업규칙 등을 통하여 근로자·노동조합 및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정한다. |
노동시간이 단축되더라도 기존의 임금수준이 저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토요일 임금이 '삭제'되는 방식으로 임금 저하가 벌어지고 말았다. 작은 사업장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대우조선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형 조선소 하청노동자들도 대부분 토요일 임금을 빼앗기고 말았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무료 노동과 체불임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든지 단순히 시급에 시간을 곱해서 임금을 받습니다. 주 5일 60시간을 일하면 (시급 5200원을 곱하여) 30만6000원입니다."
<한겨레> "왜냐면"에 실린 덕성여대 식당 노동자의 글이다. 이 경우는 시간외수당 50%를 떼어먹은 사례인데, 그나마 노동조합과 당사자가 폭로하고 항의한 끝에 체불임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폭로하고 해고될 각오가 있는 경우에만 세상에 알려질 뿐, 사회 전반적으로 무료 노동과 체불임금은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간단한 사례만 한 번 들어보자. 서울에서 어쩌다 밤을 새워 술 한 잔 먹고,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새벽 첫 버스나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지만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새벽 버스와 지하철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음을 말이다. 이들 대부분이 대학이나 빌딩에서 일하는 청소부들이다.
▲ 첫차에 가득한 청소 노동자들. ⓒ프레시안(최형락) |
그러나 이들의 근로계약서에는 보통 근무시간 시작이 오전 6시 또는 7시로 되어 있다. 간단하게 말해 새벽 5시부터 1~2시간 노동은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 '무료 노동'이라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새벽 5시부터 일하는 것으로 명시하면 6시까지는 야간수당 50%를 가산해야 하기에 이런 꼼수가 동원된다.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출근하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근무 특성상 대학 수업이나 빌딩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청소를 마쳐야 하니 보통 새벽 5시면 일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로감독관이 새벽 첫 차를 함께 타고 출근만 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현실인데도, 아니 사실은 다 알고 있는 현실인데도 무료노동은 버젓이 현장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사례 말고도 비일비재 하다. 휴일에 근무해도, 평일에 8시간 이상을 근무해도 시간외수당이나 휴일수당 못 받는 사례는 세상 천지에 깔려 있지 않은가?
정부가 계속 손 놓고 있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보자!
지난번에 썼던 것처럼, 한국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으로 내몰리는 중요한 이유는 시간당 임금이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저임금 노동자들, 특히 최저시급을 받는 노동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최저시급 4달러, 연간 2000~2500시간 일 해봐야 8000~1만 달러 수준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라고?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해보자. 하루에, 1주일에, 한 달에, 1년에 몇 시간을 일하고 있는지 직접 계산하고 공개해보자. 비싼 스마트폰은 둬서 뭐할 건가? 근무시간표를 사진으로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임금명세표도 올려보자. 이름과 사업체명만 드러나지 않게 하면 된다. 출근시간을 찍고 퇴근시간을 찍어서 실노동시간이 얼마인지, 그 중에서 '무료노동'이 얼마이고 체불임금이 얼마인지 드러내 보이자. 노동자가 죽어나가야 비정규직의 장시간노동, 턱없이 낮은 저임금이 폭로되는 현실을 바꿔봐야 하지 않겠는가.
4월 총선이 코앞에 다가오다 보니, 개나 소나 비정규직 정책이랍시고 쏟아내고 있다. 오는 6월에 결정될 내년도 법정최저임금을 놓고 조만간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지금이 저임금 노동자들 모두가 장시간노동을 폐지하고 생활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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